만경대 두루도 전도

 

 

 


8월 22일 셔만호는 만경대 근처의 작은 섬 두루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는 이곳에서도 약 100여 권의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 하에 있던 때였기에 평양 도성은 이 외국 배의 갑작스런 출현에 첨예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평양 감사인 박규수는 셔만호의 평양 진입에 대해 몇 차례의 만류와 경고를 했으나 그 배는 막무가내로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박규수 감사는 셔만호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시켰다.

배가 대동강에 들어온 때는 늦장마가 시작되면서 강 수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만경대까지 올라 올 수 있었다.

 

 

평양 대동강에 부어진 순교의 잔

 

 

불타는 셔만호

 


1866년 9월 4일 그믐이었기에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 셔만호는 물이 빠져나간 강의 진흙 바닥에 좌초되고 말았고, 설상가상으로 쑥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같이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박규수 평양 감사는 다음 날 9월 5일에 유황을 뿌린 잡목을 실은 거룻배에 불을 붙여 셔만호를 향하여 떠내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불붙은 작은 배들이 토마스가 승선해 있는 그 배에 닿자마자 이내 불길이 솟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박규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 군인들로 하여금 화살과 총포를 총동원하여 거대한 외항선을 벌집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너럴 셔만호가 볏집처럼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모든 승무원들은 목숨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된 조선 군인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훨훨 타오르는 극한 상황에도 대동강 변에 나와 있는 평양 백성들을 향하여 힘써 외치고 있었다. “야소!” “야소!”(예수!)… 화마처럼 자신을 향해 타오르는 불길도 조선 백성들을 향한 토마스 선교사의 복음의 열정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권의 성경이라도 조선 백성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배에서 뛰어 내려 자신을 향해 공격하는 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토마스 자신도 그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리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느꼈기에 더이상 주점함이나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한 권의 성경을 가슴에 품고 배에서 뛰어 내렸다. 대동강 쑥섬에 기어 올라온 토마스는 조선 군인에게 잡혔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조선 병사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가슴에 품고 있던 성경 한 권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뿌리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칼로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을 찔렀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피는 모래밭을 적시고 대동강 물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 선교사가 바로 한국 교회사에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였다. 그이 나이 27세. 조선 땅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한 그의 이름은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였다.

 

순교의 가해자 박춘권의 회심과 널다리 교회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셔만호의 격침에 누구보다도 많은 공로를 세우며 토마스 선교사의 가슴에 칼을 꽂은 혈기 등등한 평양의 한 병사가 있었다. 그 이름은 한국교회사 130년에 토마스를 순교시킨 인물이며 또 평양의 최초의 교회이며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안주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 박춘권(朴春權)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조선 말기 평양 중군 이현익 휘하의 관군으로 6척 장신의 기골에 용맹한 군인이었다. 셔만호에 대한 화공에 직접 관여하여 누구보다도 혁혁한 공을 세워 오위장이라는 관직을 얻었으며 구전된 이야기에는 그가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살해했고 토마스가 전해준 그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가 보관했고 훗날 성경을 보면서 회심했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30년이 지난 후에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그를 찾아와 주님을 영접하고 널다리골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사도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의 초대 성도들을 핍박하고 빌립집사가 순교 당할 때에 이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혈기 왕성한 인물이 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가장 열정적인 복음의 사도가 된 사실과 너무도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칠 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테판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7:58~8:1)

 

토마스 기념 교회-조왕리교회

 

 

조왕리교회

 


1918년부터 평양의 총회는 토마스의 전도행전과 순교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을 200여 명을 찾아내어 증언한 자료가 1928년 오문환 장로에 의해 <토마스 목사전>을 출간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황명대는 친히 목격했던 이 광경을 오문환 장로에게 증언하였다. 증언할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평양 부근 장로교회의 신자였다. 이 대동군 대동면 조왕리 교회는 1932년 토마스목사 기념 교회로 선정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할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대동강변에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얻어 집으로 가져왔고, 그때 20세였던 여인 이신행도 성경 한 권을 얻었고 훗날 그녀는 평양에서 최초의 여성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도 교인이 되어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시무했다.

 

1866년 9월 4일 제너럴 셔만호의 사건이 종결된 후 박규수 평양 감사는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 뿌려진 수백권의 성경과 전도 책자의 소지자에 대한 체포령과 회수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버렸다. 이때 버려진 성경을 수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양 대동문 안의 영문 주사의 관직자였던 박영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에 걷어드린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다.

 

 


널다리 교회와 최치량

 

 


널다리교회와 최치량,한석진

 


후에 박영식의 집을 토마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갖고 있었던 평양의 최치량이 구입하여 여관으로 사용하므로 이 여관에 머무는 여행객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자신도 모르게 접하게 되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1893년 마팻선교사는 평양에 선교부를 두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바로 이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집주인인 최치량이 기독교인이 되어 그 여관이 나중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최치량은 그 교회의 개척 멤버였다.

 

이는 마치 사도행전이 재현되는 것 같은 일화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이 2차 빌립보성으로 전도 여행시에 루디아의 집에 유하므로 그 집안이 구원받고 그 처소가 빕립보의 가정교회가 되었던 사실과 동일한 역사이기도 하다.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선교본부를 두기 위해 방문한 사실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와 관령이 있으며, 그가 평양을 방문할 당시에 이미 토마스에 의해 뿌려진 성경으로 인해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펫 선교사가 평양 도성 대동문 안에 교회를 개척할 때 토마스 선교사에게 얻은 성경책을 들고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토마스 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뿌려진 성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마음속에 복음의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던 것이며, 마펫 선교사는 그 증거를 확인한 것이었다.

 

이같이 토마스 선교사가 죽는 순간까지 힘써 성경을 뿌린 것이 평양 초대 교회의 태신자들을 탄생시켰으며 평양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 영수가 섬긴 평양 널다리골 교회는 1894년 마펫 선교사가 개척했는데, 그 널다리골 교회는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으로 태동한 그 동네의 29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림으로 개척된 것이다.

 

널다리교회를 장대현교회로 이름을 바꾸다

 

 


장대현교회(1893년)

 


이 널다리 교회는 후에 크게 부흥이 되어 1903년에 72칸짜리 큰 예배당으로 건축하면서 교회 이름을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다. 이 장대현 교회는 평양의 장자교회 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부흥의 전환점을 가져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바로 이 교회였다. 이는 토마스 선교사의 평양에서의 한 알의 밀알이 된 순교가 장대현교회의 탄생과 그 교회를 통해 발원된 부흥 운동을 잉태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장대현교회와 평양 대 부흥 운동

 

전술한 바와 같이 장대현교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진원지였으며 이북 지역의 모교회 역할을 했다. 이 교회는 평양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라는 뜻으로 평양제일교회라고도 했고 평양 중심에 있는 교회라는 뜻으로 평양중앙교회라고도 불렀다.

장대현교회가 태동 된 시점을 다시 정리하면 1866년 9월 토마스 선교사에게 3권의 성경을 얻었던 최치량은 성경으로 도배된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고, 1893년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왔을 때 유숙했던 여관에서 마펫 선교사와 집주인 최치량과 그 동네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그 이후 널다리골로 이전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그 당시 박춘권이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받은 성경을 보면서 회심했고 그가 이 널다리골 교회에 출석했고 후에 그 교회 영수가 된 것이다.

 

그후 지속적인 교회 성장을 거듭하면서 1903년 평양 중앙의 장대현이라는 곳으로 이전하여 73칸짜리 조선 고유의 건축 양식으로 봉헌한 교회가 그 지명을 쫓아 장대현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남문 밖 교회

 


그 해에 평양 남문 밖이라는 곳에 교회를 분립시켜 ‘남문밖교회’를 개척했다. 이 교회를 평양 제2교회라고도 불렀다. 1905년에는 다시 창동교회를 분립하여 개척했고, 이 창동교회는 이어서 1907년에 ‘능라리교회’를 다시 개척시켰다. 1911년 ‘연화동교회’를 또 분립하여 개척하므로 평양에서 장자교회의 역할을 명실공히 감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음란과 강포함으로 가득 찬 이 죄악의 평양 도성을 거룩한 도성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 이 같은 구원의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진행하신 것이었다. 평양에는 기생과 술집이 많았으며 기생학교까지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싸움꾼들도 많아 그 당시 선교사들이 신변의 위험을 늘 경계해야 했다. 이들이 행하는 폭력은 주로 돌팔매질과 박치기였다. 평양에서 사역하던 미국의 선교사들 가운데 이들에게 많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폭력배 김익두, 이기풍

 


김익두, 이기풍은 혈기 왕성한 때에 거리에서 전도하는 선교사들에게 돌팔매 해서 머리와 얼굴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은 미신을 많이 숭배하여 무당 등 무술인들이 특히 많았다.

또한 평양 감사 등 관리들의 횡포는 매우 심하여 선교사들이 집을 사는 것도 금지하여 마펫 선교사는 한석진의 이름으로 구입하였으나, 집주인에게 압력을 주어 결국 무산시키기도 했고, 평양에 최초로 병원을 세운 윌리암 제임스 홀(Willam James Hall)은 물을 길어다 주는 하인을 관가에서 불러다 매질을 하여 물도 못 사용하게 할 정도로 매우 강퍅했었다.

평양에서 사역하던 어떤 선교사는 미국 선교본부에 평양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같았다고 보고한 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타락한 도성을 복음으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토마스 선교사를 그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시었고, 선교사들을 돌짝 밭과 같은 그 도성에 집중적으로 보내시어 교회와 평양신학교와 홀병원 등 다양한 선교사역을 통해 그 땅을 새롭게 갈아엎으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1907년에 평양 대 부흥운동을 일으키시고 진행하셨는가?

이 대부흥운동의 불씨는 이미 1903년 원산에서 의사인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통회 자복함으로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확산되면서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후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에서 온 존스톤 박사가 선교사 연합사경회에서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소개하면서 그곳에서 8,500명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주었다. 이때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존스톤으로부터 인도 부흥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가졌던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와 같은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이 땅에도 임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평양으로 돌아온 20여 명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인도에서의 부흥운동이 평양에서도 일어나게 될 것을 믿고 정오기도회를 가졌다.

 

존스톤은 서울 선교사사경회를 마친 후 평양을 방문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주일예배 설교를 인도했다. 이날 그는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인도교회에서 번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말하면서 “조선에서 누가 웨일즈 부흥운동의 주역인 이반로버츠처럼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겠느냐? 이 자리에 있는 사람 가운데 손을 들고 일어나세요!”라고 호소했다.

 

길선주 조사

 

 


길선주 조사

 


그러나 모든 회중은 잠잠했다. 그런데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이자 수석 장로로 장대현교회에서 봉사하던 길선주(吉善宙) 조사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손을 들고 일어섰다. 이것을 본 존스톤 박사는 장차 조선교회에 큰 부흥운동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고, 길선주 조사와 장대현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약 한 시간에 걸친 이 예배로 인해 모든 성도들은 은혜가 넘쳤고 장대현교회를 비롯한 평양에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조짐을 내비치게 되었다.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그러한 기도회를 4개월이나 교파를 초월해서 오직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길선주 조사(전도사)는 존스톤 목사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체험한 후, 1906년 12월 16일부터 22일까지 황해도 재령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다. 이 집회를 통해 김익두 등 수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강한 임재와 역사하심을 통해 심령이 뒤집어지고 통회 자복했다. 하나님께서는 길선주를 뒤이을 사역자인 위대한 부흥사인 김익두를 준비해두시었다.

 

길선주 조사는 교회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이끌림을 받아 평양에서도 계속 사경회를 그해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인도했고 그 성회를 통해 수다한 성도들이 회심하고 자신들이 지은 수치스럽고 말로 할 수 없는 무서운 죄를 회중 앞에서 토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을 잡으려고 그 집회에 잠복하기 위해 참석했던 경찰관이 불덩이를 받은 사람처럼 거꾸러지면서 “선생님!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하자 길선주는 설교를 중단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승려까지도 그 집회에 참여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평양의 오순절 성령 강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2:1~4)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원근각처에서 은혜를 받기 위해 약 1,500명의 성도들이 참여했다. 집회는 13일째 매일 진행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성도들의 반응은 냉냉하기만 했고 아무 역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집회에 참여했던 고포드 선교사는 그때의 분위기를 이같이 기록해놓았다.

“천정은 놋으로 덮인 듯 기도는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날의 역사를 두고 선교사들은 마치 사탄이 회중을 압도하는 것과 같았다고 증언했다.

14일, 집회 종료를 하루 앞둔 날,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가지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대로 사경회가 끝난다면 그들이 그토록 사모했던 영적 부흥 운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끝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날 집회는 처음부터 전날과는 완연히 달랐다.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그날 성령을 한국교회 위에 어마어마하게 쏟아 부어주셨다.

이날 집회에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끝나자 영적인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집회에 성령의 불길을 당긴 것은 그의 수치스러운 사건을 회중 앞에 숨김없이 회개한 기도였다.

그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가 죽기 전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돈을 사취한 바가 있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친구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담대한 고백은 그곳에 모인 회중들의 상한 심령을 주님께로 향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고포드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길선주 장로의 회개가 있은 후 그렇게 무겁게 짓누르던 방해의 장벽은 별안간 무너지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해 주셨습니다.”

 

 

그레함 리(이길함) 선교사

 


사회를 보던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그레함 리(Graham Lee) 선교사(한국명은 이길함으로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 이어 두 번째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였다.)는 다음과 같이 회중에게 당부하였다.

“여러분 기도하기를 원하시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요”라고 통성 기도를 요청했다. 이 기도가 한국교회의 통성기도의 출발이 되었다. 온 회중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으면서 통회의 기도를 저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같이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집회에 참석한 어느 선교사는 조선인들의 기도 소리가 마치 하늘 보좌를 향해 포효하는 것 같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래함 리 목사는 집회의 모든 순서를 마친 후 기도를 더 원하는 사람들은 남아 계속 기도하도록 광고했다. 1,500명 중 약 6백 명이 남아 밤이 맞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통회의 기도가 평양 도성의 밤을 진동시켰다. 그중에 약 20여 명의 남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이러한 죄의 고백이 모두의 고백이기에 함께 울면서 기도했다. 이러한 기도를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조지 메쿤 선교사는 이 기도의 모습을 보고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내어 이날의 집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전했다.

“우리는 매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다.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지난밤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인도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인 1월 15일 화요일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주셨다. 이날 집회는 전날과 같았지만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훨씬 강력했다.

이날의 역사에 대해 그 현장에 있었던 스왈론 선교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그날 장로들 그리고 선교사들 사이에 큰 죄악들이 드러났는데, 모두가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제까지 자신이 범한 그 극악한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힘에 압도된 것처럼 건장하고, 교양있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통회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마지막 심판을 보는 것처럼, 너무도 무시무시했습니다. 다만 나는 그날 밤의 장면을 설명하기에 더이상 어떤 단어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경회 마지막 날 성령의 역사가 전날보다 더 강하게 임하였다. 이날 역시 그 포문을 연 사람은 길선주 장로였다. 그날 길선주 장로가 설교할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장로는 설교하는 길선주 장로의 얼굴이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다음 날 길선주는 외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그것은 길선주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 때 장님이었다가 아직도 장님인 길선주 그러나 여기서 그의 얼굴은 대단한 위엄과 능력의 얼굴,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고백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날 밤늦도록 행해진 회개 기도에서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했다.

어느 여인은 자신의 아기를 청일전쟁 때 죽였다고 고백했다.

선교사들의 돈을 사취한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돈을 돌려주었다.

매켄지 선교사를 돕는 한 소년은 4달러를 속인 것을 고백하고 60리 길을 달려가 용서를 구하고 돌려주었다.

남편과 아내 몰래 음행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외 온갖 죄악의 찌꺼기들을 다 쏟아냈다.

 

그 집회는 죄악을 씻어내고 성결함을 얻는 거룩한 성회였다. 거듭남의 시간이었다. 블레어 선교사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내가 결코 전에 보지 못했던, 또 하나님께서 만약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은 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와 같은 집회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이 공개적으로 그날 밤 고백 되었다. 감정으로 인해 창백해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심신이 괴로운 가운데 백 보좌 앞에서 서 있는 죄악된 심령들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있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듭난 도성 동방의 예루살렘

 

1907년 1월 14일, 15일 양 이틀간에 놀랍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네 곳에 분산되어 예배를 드렸던 여자 성도들의 1월 19일 토요일 집회 때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21일 22일에는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그 일 후 장대현교회는 날마다 연이어 신도들이 모여들었으며 정결케 하시는 영이 언제나 그 성전에 계셔서 그곳에 모인 심령들을 깨끗게 하셨다.

 

그 성령의 불길은 이윽고 평양 시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평양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였던 남산현교회 담임목사가 변화를 받은 것이다.

처음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그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후 시각이 완전히 바뀌어 부흥운동의 적극적인 옹호자로 변화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그 교회에도 동일하게 재현된 것이다. 그 부흥의 불길이 교파를 초월하여 평양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학생들의 회개

 


교회뿐만 아니라 미션스쿨 교육계에도 그 영향을 주었다. 평양 시내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여 체플 시간에 학생들이 성경을 읽은 후 기도를 시작하자 한 여학생이 일어나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보고 스눅 여선교사가 놀랬다.

이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다른 학생들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비하게도 오전 전체를 기도와 죄의 고백으로 시간을 보냈다.

 

평양의 교회마다 1월이 다 가기 전에 영적 대각성운동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 시작했다.

이길함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도 마찬가지로 은혜와 축복을 공유했고, 평양 기독교인들은 조선 전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교사, 한국인, 장로교인, 감리교인, 남학생, 여학생, 선생, 교회 직분자들, 모든 계층과 신분의 남녀노소 불문하고 합심하여 한 사람같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 완전히 조직되어 그들이 평양 시내와 조선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평양의 감리교 선교사인 노불 선교사도 이러한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을 보고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조선교회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매 집회에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도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거꾸러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사함이나 아직 회심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탄식하며 자신들의 집에서도 온밤을 지새웠습니다. …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도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많은 악기에서 나는 화음보다 더 조화를 이루는 수 백명의 기도 소리의 중얼거림으로 가득찼습니다.”

 

장대현교회에 임했던 회개의 영이 미션스쿨인 숭실대학에도 임했다. 수업 중에 가진 기도회에서 성령님이 임재하시어 그 교실은 통회의 외침과 흐느낌으로 가득 차 학생들은 자신들의 죄의식으로 가득 차 전율을 느꼈다. 먼저 육체적으로 비통해하며 손과 머리로 바닥을 치며 통회하였고, 마치 군대마귀가 그를 찢듯이 울부짖었고, 정결치 못한 삶에 대한 뉘우침으로 흐느끼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다.

이러한 영적 각성이 있은 후 학생들의 생활에 변화가 나타났고 수업 태도가 달라지고 경건의 생활로 이어졌다. 그들은 중보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복음 전도에 뛰어들었다. 전 학생들의 3분지 2의 학생들이 방과 후 매일 교실과 기도실에서 기도했다.

 

평양신학교에도 강한 성령의 역사가 반복되어 일어났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4월 6일부터 9일까지 다시 성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의 산실 역활을 했던 평양신학교에도 성령의 운행이 강하게 나타나 모든 신학생들이 다시금 성령의 도가니에 변화되었다.

 

 

이처럼 1907년 겨울에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평양 대부흥운동의 역사는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어 평양 시내 남녀노소 모두가 은혜를 체험했다. 조선 땅에서 가장 희망 없고 장망성 같았던 평양 도성이 이같이 끊임없는 기도와 찬송과 말씀 선포로 거룩한 도성으로, 정결한 백성으로 변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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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구교회사 '신사참배' 앞장선 친일목사들

 

 

 

신사참배 강요는 일제가 일어 상용, 창씨개명 등에 이어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다. 일본의 전래 민간신앙인 신도(神道)는 자연이나 조상, 영웅, 역대 천황 등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多神) 종교인데, 메이지시대 이후로 천황제와 함께 군국주의 침략정책의 이데올로기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군사·경제·문화적 침략이 시작되면서 신도(神道)도 함께 한반도에 상륙했다. 한일병탄 이전에는 주로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에게 국한됐으나 이후 총독부가 신사(神社)를 세워 보급에 박차를 가하면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25년 총독부는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사립학교 학생들을 시작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나 기독교계의 반발로 일단 물러섰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다. 그러나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들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총독부가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부 학교는 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었으며 학교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만 했다. 총독부는 어용 기독교 지도자들을 앞세워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조상숭배의 미덕’이라고 강변하면서 반대자들을 핍박하였다.

 

이런 강압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기독교계는 결국 총독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1935년 12월 안식교단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뒤이어 성결교단도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또 천주교는 1936년 5월 교황청의 훈령을 받고 신사참배를 시행하였다. 참고로 교황청 포교성은 1936년 5월 25일 “신사는 황실 존경과 애국용사 존경을 나타내는 애국심의 발로이며 자발저인 것”이라는 성명을 통해 신사참배를 용인했다.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임을 자처해온 장로교는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했다. 이날 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감옥에 가두어 총회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반대는 묻지도 않고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아래와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가하여 시국 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날 부총회장 김길창(金吉昌) 목사는 23명의 노회장들을 데리고 평양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였다. 또 같은 달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이로써 조선내 모든 기독교 교단과 교파가 신사참배에 동참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신사참배 인식 운동'과 '신사참배 권유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38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주삼·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식, 장로교의 홍택기·김길창 등 지도급 교역자 5명으로 구성된 ‘신궁참배단’은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등을 참배하였으며, 일부 목사들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또 장로교는 이듬해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전쟁 전승 기도운동과 시국강연회·모금운동을 벌였으며, 헌금을 모아 '조선장로호'라는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1936년 조선 전역에 ‘1면(面) 1신사(神社)’ 정책을 시행하면서 총독부는 신사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1945년 6월 현재 조선 내 신궁(神宮)은 2개소, 신사는 77개소, 면 단위에 건립된 소규모의 신사는 무려 1,062개소에 달했다. 이밖에도 각급학교에는 호안덴(奉安殿)을, 또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를 보급해 모든 조선인들이 집 안팎에서 아침저녁으로 참배토록 강제하였다. 이로써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에 약 215만 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한편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모든 교역자들이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더러는 총독부 당국자를 찾아가 청원운동’을 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굴복한 교회를 비판하면서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펴기도 했다. 주요인물로는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함남의 이계실 등이며, 만주 지역에서는 박의흠·김형락·김윤섭 등이 활약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치안유지법·보안법·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죄인으로 다뤘는데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했고, 주기철 목사 등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달했다. 이밖에 교회 2백여 곳이 폐쇄되기도 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기독교 신앙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민족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신사참배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천도교 등 다른 종교에도 적용됐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반면 기독교는 교계 전체가 동참했던 만큼 갈등과 후유증이 컸다.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일부 교계 지도자들은 해방 후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동참한 사실에 대해 한동안 침묵하다가 한경직 목사의 참회 이후 몇몇 교단에서 뒤늦게 참회를 발표했다.

영락교회 한경직(1902~2000)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템플턴상 수상 축하행사 때 인사말을 통해 "반세기 전에 지은 신사참배의 죄를 참회한다"고 회개한 바 있다. 또 2006년에는 소장파 목회자들이 결성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의 반성문을 발표한 바 있다.

교단 차원에서는 2006년 1월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교단 중 처음으로 교단의 친일 행적을 사죄했다. 이어 2007년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가 3·1절을 기념해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같은 해 9월 총회 때 신사참배 행위를 사과했다. 또 2009년 예장 합동과 통합, 기장, 합신 등 4개 장로교단은 교단 분열 60년 만에 처음 제주 연합예배로 모여 신사참배 참회기도를 드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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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복음 전도자 개혁주의목회자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 - 1887)

 

 


스코틀랜드 복음 전도자요 찬송가 작사자인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무려 364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많은 목사를 탄생시킨 경건한 집안에서 1808년 열한 명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형제들, 그 중에서도 형 제임스의 다뜻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형 제임스(John James), 동생 앤드류(Andrew)와 더불어 목사가 되었다. 그는 에딘버러 대학(Edinburgh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토마스 찰머스 밑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833년 설교할 자격을 획득하였다. 그의 첫 번째 사역은 리스(Leith)에 있는 성 요한 교구에서 전도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사년 동안 전도 사역을 감당한 후에 그는 켈소(Kelso)에 있는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다.

 

소위 ‘스코틀랜드 교회 분열’(Great Disruption)이 일어날 당시에 보나르는 복음적인 목사들과 장로들의 편에 굳게 서 있었고, 1843년 5월 그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탈퇴하여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1830년대와 40년대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영적 운동에 크게 쓰임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찬송시를 작시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찬송시들은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것으로, 거의 600편에 달하는 등, 그는 스코틀랜드 찬송가 작시가 중 제 1인자로 꼽히고 있다. 한국 찬송가 공회에서 발행된 찬송가에도 보나르의 찬송시가 일곱편이나 실려 있다. 신학적인 진리들을 참으로 경건하게 표현한 그의 찬송시는 가사만 읽어 보아도 은혜가 될 만큼 참으로 뛰어나다. 특별히 보나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인간의 교만함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사역과 찬송 작시와 저술에 있어서 오직 한가지 목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일이었다.

 

호라티우스의 펜을 통하여 흘러 나온 것은 찬송시만이 아니었다. ‘눈물의 밤’(The Night of Weeping), '진리와 오류‘(Truth and Error), '인간 - 그의 신앙과 세계’(Man : His Religion and His World)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그는 교회를 위협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대해서 계속 경고했다. 그는 거짓과 오류에 저항해서 용기있게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도 결연한 자세를 초지일관 유지하였다. 경건서적을 저술하고, 잊혀진 고전들을 발굴하여 재출판하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경 지방 켈소에서의 사역은 거의 이십년 동안 계속되었고, 1866년에 그는 에딘버러로 돌아가 찰머스 기념 채플(Chalmers Memorial Chapel)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887년에 이르러서 그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그해 5월 31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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