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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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

 

언약을 은혜로 이루어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믿음이 연약함에도 예배를 통하여 만나 주시고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자를 기뻐 찾으시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의로 세워주시고 새 생명으로 살려주셔서

아름다운 예배를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의 날 거룩한 자리에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고 찬송의 입술로 드리는

예배를 열납하시어서 우리 형제 자매들의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시옵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심령으로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함으로 피곤한 육신이 치유 받는 예배의 시간이 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불순종을 자각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죄악을 회개하게 하시옵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게 하시어서 정결한 마음으로 겸손과 감사가 넘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찬양을 하게 하시옵소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제 몇일 후에 우리 민족의 명절이 설날이 다가옵니다.

민족의 설날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우리들이 부모 형제들에게

서로 인사하며 우애를 나눌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혼탁하고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설날의 명절을 통해

서로 하나 되는 가족이 되게 하시고 화평한 가족들의 만남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월절 주님의 보혈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주신 것처럼

이 설날에 잘못된 형제 자매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의 만남에서

가정의 평안을 찾게 하시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말씀에 따라 사는 가족이 되게 하시옵서.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나라를 치리하는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게 하시옵고,

이웃 일본은 아직도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문제를 일으키고 있사오니

저들의 만행을 잠재워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이 복잡하고 혼란과 혼돈이 가득한 이시대에

청년들의 생각과 마음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아름다운 심령으로 거듭태어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멘으로 읊조릴 수 있도록

믿음의 귀를 열어주시옵고 물위를 걸으라 명하신

예수님 앞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물 속에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이 아닌 오직 위만 쳐다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시옵소서.

비록 연약한 모습이지만 믿음으로 굳게 세워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 뜻을 깊게 알게 하시고 더욱 큰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일에 크게 쓰임받으시는 아버지의 종이오니

필요한 건강과 지혜와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어서

우리 모든 양들을 이끌고 가시는데 부족함이 없는

목사님으로 세워주시옵소서.

 

오늘 찬양과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심신의 위로와 용기를 얻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고

육신의 병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한 형제 자매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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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누가복음 19장 41∼44절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물을 아는 중보자, 곧 예배자입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 부활 영광의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뀝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을 바라보시며 보좌 위에서 흘리는 하나님의 생명수(눈물)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환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우신 겁니다.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성은 수많은 사람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을 나라를 세울 왕으로 오해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예루살렘성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 때부터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죄를 회개하면 참자유와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십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속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재앙이 되어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교수, 성도들의 모습에서 빛의 자녀로서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살전 5:22).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변화 받지 못한 육의 사람과 변화 받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예수님은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립시다.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구별된 거룩한 성도가 되어 시대를 분별하고 생명을 선포합시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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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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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둘째 주일 예배 설교

 

 

 

제목 : 믿음으로 새해를
말씀 : 히 10:32-39 /계 1:8
 
새해를 기대하는 사람과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잡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확신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염려와 근심, 걱정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3).
 사단이 보는 세상은 믿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속삭이며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게 합니다.
믿음을 떨어트리는 것은 사단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새해를 기대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결심을 하여도 우리는 결심한 대로 전부를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복된 미래를 열어주고 믿음으로 살 때에만 주님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새해를 여는 복된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주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복된 새해를 여는 열쇠는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복된 길이고 능력이며 생명이신 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고백하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내 삶을 살고 계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주님이 내 안에서 주님의 삶을 살기 때문에 염려 근심을 이길 수 있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내 안에 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순간순간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혀 기도와 찬미를 합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쇠사슬이 풀립니다.
주님과 교제하였기에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옥문이 열리자마자 도망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간수의 구원이나 빌립보 선교는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주님을 의존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미래가 열립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갈 때 열려진 길로 가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대인을 위해 왕에게 나가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왕비이지만 함부로 왕에게 나갈 수 없습니다.
법을 어기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를 통해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 4:14)
자신이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순종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주님을 의존하기 위해 금식 한 후 왕에게 나갑니다.
주님을 의존할 때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성도가 믿음의 길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주위의 역경과 환난에 져서 퇴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믿음에 계속적으르 정진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과 인내란 차의 두바퀴,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으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내가 따르지 않는 신앙은 일시적 감정이나 결심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신앙 없는 인내 또한 단순한 억지 태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내란 믿음에 기초하며 믿음 없는 인내는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당하는 인내를 잘 참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로부터 큰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속히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직면한 고난과 담대하게 맞서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내 삶을 대신 사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고백하면서 자리를 내어 드리지 않는다면 주님이 일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 가득 차 있습니다.
새해가 왔다고 소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일들은 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 때문에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해요 방패이십니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길을 알려주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십니다.
그런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힘든 세상이지만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왔다면 먼저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우리가 그 상황을 긍정할 때 오히려 위기는 기회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올지라도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을 긍정하고 신뢰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긍정으로 열어주십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소망을 품고 올 한해는 조금 더 주님과 가까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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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전 예배설교  감사의 축복

 

 

 

말씀 : 잠3:9,10

제목 : 감사의 축복

1.감사가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어떤 기독교인 처녀가 불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는 옛날에 교회를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못다니고 있지만 결혼하면 즉시 교회에 다니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다음에 나가겠다고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결혼 후 얼마 있다가 술을 먹기 시작하는데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밤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아내도 남편에게 짜증을 내고 소리도 지르고 하여 가정이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이가 생겨 부부가 싸울 때마다 아이들은 불안에 떨곤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남편을 위해 늘 기도 했지만 그렇게 몇 년을 지나도 변화가 없자 드디어 이혼을 결심하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한 일년만 더 기다려보자며 그 대신 지금부터는 불평이나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남편에게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성껏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은 그때부터 마음을 바꾸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남편에게도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그나마 나와 아이들이라도 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술주정뱅이일지라도 그나마 생활비라도 벌어다 주니 감사합니다. 그나마 일년열두달 365일 계속 술취해 있지는 않고 가끔은 나와 아이들을 생각해 줄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집과 먹을 것이 있고 이 아이들을 통하여 희망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많은 조건들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선은 아내 자신이 살 것 같았습니다. 남편 때문에 늘 답답하고 화가 나고 속이 부글거리며 화병이 날 것만 같았는데 그 후로는 마음이 한결 평안해졌습니다. 또한 큰 소리가 그칠 날이 없던 집안이 평안해지고 그러자 툭하면 엄마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바람에 불안에 떨던 아이들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웬수같이 여겨지던 남편도 점점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어디 가는 거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가 어디 가는지 잘 아시면서 뭘 새삼스럽게 물으세요?”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나도 교회가면 안될까?” 아내는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 안되다니요? 되고 말구요.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실 거예요.” “정말 그럴까? 이런 술주정뱅이에다가 맨 날 당신 속만 지긋지긋하게 썩이고, 아이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이런 못난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 주실까?”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셔서 심지어는 살인강도도 회개하고 믿기만 하면 다 받아 주세요.”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이 술주정뱅이로 아내의 속을 다 썩게 만들었던 남편이 누구보다도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우선은 자신을 살게 합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자신에게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물론 옆사람에게도 행복 바이러스를 퍼지게 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 복이 오고, 은혜가 임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후4: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감사가 있는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정말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충만한 삶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함으로 정말로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감사는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구원의 기쁨과 능력을 확실하게 누리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시50:23절을 보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진정한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단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같은 것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보내주시고, 예수님은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 같은 것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으로 저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기쁘지 아니하며 어찌 찬양하지 않으며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에 더욱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욕심과 욕망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볼때에 세상의 환경과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무슨 원망 불평 미움 질투 시기 따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기쁨속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누려야할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 그 삶에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돈과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과 시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절망과 한탄 따위는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와 믿음과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으로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감사가 넘쳐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이 땅에서의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그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이미 주신 은혜들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과 육과 혼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은혜를 맛보며 전인적인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하면 더욱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녀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었을 때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그것을 잘 사용해서 자신도 행복하게 남에게도 행복을 주며 산다면 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맨 날 받기는 받는데 감사할 줄도 모르고 자꾸만 더 달라고만 하고 도리어 적게 준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준 것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다면 준 것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누가 그런 사람에게 더 주고 싶겠습니까? 더 주기는커녕 이미 주었던 것마저 확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눅19:24~26절을 보십시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알며 그래서 자신도 남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너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지도 않고 올바르게 활용할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준 것도 아까워 준것도 도로 빼앗아 감사와 기쁨으로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었는데도 감사할 잘도 모르고 자꾸 불평불만이나 한다면 준 것이 아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준 것도 빼앗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 것에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갈 때에 준 사람도 기쁨이 있고 준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더 주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잘돼도 감사, 안돼도 감사. 형통해도 감사 불통해도 감사. 돈이 많아도 감사 없어도 감사, 내 마음 내 뜻대로 되어도 감사 안되어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감사하며 사는 자들에게 채워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가정이 잘 되고, 직장이 잘되고, 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자에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감사하는 자는 세상을 이기고, 마귀사탄을 이기고 대적자들을 이기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대하20:21절을 보겠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 말씀은 여호사밧 왕때에 모압과 암몬과 에돔족속이 연합군을 이루어 침공했을 때의 일로 이때에 여호사밧은 성가대를 앞세워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국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자멸해 버리고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전리품만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까? 찬송하며 감사할 때, 감사하며 찬송할 때...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라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속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해결하지 못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헤와 능력과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임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부족한 것들과 모든 도전과 유혹과 모든 어둠의 권세와 기타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총을 고백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며 더욱 많은 은총을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감사할 때 물질의 복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영혼의 복도 주시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그러면 육신도 더욱 건강해 지고, 더불어 물질의 복까지도 주십니다. 그래서 감사하면 할수록 자꾸만 감사한 일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기뻐하는 하는 사람에게 기쁜 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는 사람에게는 자꾸만 불평불만할 일이 생깁니다. 원망하면 자꾸 원망할 일이 생깁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기고, 투덜거리며 투덜거릴 일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한번 두번 안오면 자꾸 교회에 못 올 일이 생깁니다. 마귀사탄이 자꾸만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가고 하면서 가지 못할 일만 보이게 만듭니다. 교회에 오려고 하면 꼭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 못 올 일이 생긴 게 아니라 얼마든지 교회에 올수 있는 상황인데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할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열심히 오면 자꾸만 교회 갈 일이 생깁니다. 이래서 가야 되고, 저래서 가야 되고 그러면서 교회에 계속 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한번 두번 안하다보면 자꾸만 헌금을 할 수 없는 일만 생깁니다. 이래서 할 수 없고, 저래서 할 수 없고... 그런데 사실은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마귀가 자꾸만 지금은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속삭여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두고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서 똑같은 장소를 보고 왔는데 10명은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못 들어가고 저래서 못 들어가고...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갈 조건만 보았습니다.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가고.....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들에게 동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실컷 고생만하다가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래서 들어가고 저래서 들어간다며 들어갈 조건만 헤아렸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꾸 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자꾸 감사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자꾸 사랑해야 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교회에 올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꾸 헌금할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복을 쌓는 일이요, 그게 은혜를 쌓는 일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10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그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강조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는 것은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우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요? 본래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이니까, 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까? 네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찰 것이다.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칠 것이다. 농사가 잘되고, 곡식이 풍성하고, 장사가 잘되고, 직장에서 인정받게 되고 그래서 물질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릴 줄 아는 인생에게 어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늘 감사하며 사는 인생에게 어찌 복이 찾아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죠. 부모님께 감사하죠. 이웃에게 감사하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대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지난 상반기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아니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동안 모든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감사한다면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영광과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축복거리를 하늘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올림으로 여러분의 삶에 더욱 은혜가 쌓이고 기쁨이 쌓이고 축복이 쌓여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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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어린이 주일의 유래  교사 사명 대학 상담   

 

 

 

주일학교는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주일학교 어린이 주일의 유래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었다. 자라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교육되느냐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직결되기에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최초로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셜리스트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H Leonald)목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한 사람으로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를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어린이 주일"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린이 주일은 교회 절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겐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더 필요했다. 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여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다.

 

어린이 주일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절기는 아니지만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교회의 절기로 보편화되었다. 자라나는 어린이가 어떻게 교육되느냐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직결되기에 몇몇 뜻있는 목회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회의 특별한 봉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최초로 어린이 주일을 제정한 유니버셜리스트 제일교회의 레오날드(G.H Leonald)목사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한 사람으로 1856년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시키고 어른들에게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6월 둘째 주를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의 어린이 주일로 정하고 그날 어린이 주일 행사를 거행했다. 

 

레오날드 목사의 어린이 주일 시행이후 교회들은 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고, 그 결과 1868년에는 미국 감리교에서 6월 둘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정식으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다른 교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1883년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교파들도 "어린이 주일"안을 결의안으로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린이 주일은 교회 절기의 일부분으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은 물론 어린이라는 호칭조차 없던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우리에겐 어린이 주일의 제정보다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대한 바른 인식이 더 필요했다.

 

 이러한 때에 방정환, 마해송 등의 어린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선각자들이 1922년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하여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어린이 인격보호와 바른 성장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어린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초창기 5월 1일이었던 어린이날이 1927년부터는 5월 첫째주일로, 그리고 1946년에 오늘날과 같은 5월 5일로 변경되었고, 1957년에는 어린이 헌장이 제정, 공포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교회들도 초창기에는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켜오다가 1956년부터 5월 첫째 주를 어린이 주일로 변경하여 보다 활발하게 지켜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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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저녁 찬양 예배 설교 (Sunday afternoon Sermon)


 


 
제목 :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말씀 : 시43:1~5

1.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한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누리는 복은 물론 많다. 우선은 구원의 복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하는 복이다. 그 다음에 현재의 복이다. 현재의 복에는 물질의 복이나 건강의 복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아무리 물질과 건강이 있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헛일이다. 그러나 비록 물질과 육신이 좀 부족해도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된다. 요14:27절을 보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다. 우리는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버리고 평안을 누려야 한다. 근심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의욕을 상실하게 만든다.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일들을 올바르게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염려와 불안과 근심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과 평화와 감사와 기쁨의 영이다. 마귀는 죽음과 싸움과 원망과 불평과 저주의 영이다. 그러므로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러면 분명 우리는 그 능력과 은혜로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평안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늘 평안을 누릴까?

2.주님께 호소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고라자손이 시온을 그리워하여 지은 찬송시이다. 오늘1,2절에 보면 그들이 얼마나 큰 고난 가운데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슬프게 다니나이까? 이 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 시에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로 여겨지고 있지만 확실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적 자들에 의하여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기도하고 호소했다. 하나님, 저희들이 불의한 자에게 고난 받고 있습니다. 원수로부터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원망하고 불평하며 따지는 것이 아니다. 긍휼히 여겨달라는 애원이며, 죄를 용서해달라는 탄원인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혹시 어려울 때, 고난당할 때, 억울할 때 원망 불평 불만 낙심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호소하라.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탄원하라.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라. 그리하면 분명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힘을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3.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한 다음에 시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간구한다. 시43:3절이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 주소서. 나를 인도하소서. 주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주님만이 희망입니다. 소망입니다. 빛이십니다. 진리이십니다. 그 주님의 빛과 같은 은혜로 충만하게 하소서. 진리의 빛 가득 채워 주소서.

곤고할 때 해결책이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주의 밝은 빛 가운데로 들어가라. 주의 진리의 빛을 충만하게 받는 것이다. 주님 앞에 세우고 말씀의 빛, 성령의 빛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어둔 심령이 밝아진다. 캄캄했던 앞길이 환히 밝아온다. 약하고 부족한 심령이 강하고 온전해 진다. 능력을 덧입게 된다. 돈이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이 해결책이 아니다. 그것도 물론 도움은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이 아니다. 은혜를 사모하라. 빛을 사모하라. 진리를 사모하라.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생명력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4.주님의 은혜를 믿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시인은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주의 제단 앞에 나아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될 수 있을 것임을 고백한다. 4절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시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큰 기쁨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이를 것이요, 그곳에서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하게 될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주께서 은혜를 베풀면 성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 가면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주께서 은혜를 베풀면 우리는 주님 앞에 설수 있다. 혹시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 앞에 호소하고 은혜를 간구하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주님 앞에 서게 된다. 주님 앞에 서면 분명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전을 사모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때 주님의 은혜를 받아 주님 앞에 서서 주의 은혜와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마음껏 누리자.

5.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찬양해야 한다

시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러분, 잘 보라. 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마침내 나타나실 것이다. 나타나셔서 도우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전히 찬송할 것이다. 지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주께 소망을 두고, 주께서 마침내 나타나셔서 도우시사 구원해 주실 것을 믿으며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평안을 누리며 승리하는 비결이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호소할 때에 하나님께서 마침내 움직이신다. 역사하신다. 도우신다. 이기게 하신다. 그래서 더욱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은 비록 힘들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기에, 분명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기에,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기에 지금도 여전히 찬송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절대적인 믿음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할 때에 더욱 믿음은 강화된다. 성령의 은총을 덧입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개입하심으로 승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보자. 주님께 호소하자.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자. 주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으심을 인정하자. 주님의 구원의 때가 되면 확실히 구원받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을 믿자. 그리하여 더욱 기도하며 찬양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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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네째 주일 오전 예배 대표기도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 주간의 힘든 삶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 나아온 우리를 용납하시고 안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을 통해 당신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신 여호와께서


모든 찬송과 영광을 받아주옵소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얼룩진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양심을 정결케 씻으셔서 저희를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 주소서.


이 땅의 권세자들을 세우신 하나님, 이들을 통해 이 민족이 하나님의 듯을 받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는 정치를 하게 하소서.


자신들의 사리사역에 눈멀지 않고, 자기 정당의 이익 때문에 백성들의 안위를 헤치는 일을 하지 않게 하소서.


다니엘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통치 하고,


다윗처럼 넓은 마음으로 관용하고 포용할 수 있는 정치인이 되게 하옵소서.


모든 정치인들에게 깨끗한 양심과 정직한 마음을 주시고, 벡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게 하소서.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참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의연한 기개를 가지고 정치하며, 소신이 있으되 백성들의 민의에 귀 기울이고 존종하는 위정자들 되게 하옵소서.


선거 때만 백성을 찾고 두려워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평소에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치인이되게 하시고,

 

그들이 펼치는 정치들이 백성들을 위한 것이 되게 하옵소서. 안정된 정치적 풍토를 주시고,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신뢰를 받게 하옵소서.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젼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 곳곳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게 하소서.


저희들이 교회 안에 갇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전염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빛과 소금이 영향력을 잃어갈 때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할 수밖에 없사오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있는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무기력한 영성을 가지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사오니 세상에 정복되지 않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주님의 지상 명령을


잘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나약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없사오니 저희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강한 군대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시간도 주의 사자를 통해서 말씀을 들려 주시고 우리의 영적 무기력을


깨뜨리시며 강한 그리스도인의 군대로 거듭나게 하소서.

이 땅의 권세자들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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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낮설교 < 빛의 은혜가 가득한 인생 >

 

 


제목:빛의 은혜가 가득한 인생

말씀:요8:12-24

 


1.어둠속에 있는 인생

어느 날 해와 별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해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머얼리 비추며 봐라, 내 빛이 얼마나 밝으냐 하면서 뽐냈습니다. 그러자 별이 말했습니다. 네 빛이 밝긴 하다마는 어둠속에서는 내가 최고지. 나는 밤이 되면 온 하늘을 영롱한 빛으로 수놓아 사람들에게 꿈과 사랑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가 말했습니다. ‘어둠이 도대체 뭐냐?’ 별은 그것도 모르냐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며 해를 캄캄한 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찾아가자 그만 밤이 사라져 어둠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별은 다시 해를 커다란 동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굴안도 역시 해가 들어가자마자 어둠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어둠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태양은 어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태양 앞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별은 자기 빛이 태양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양앞에서 빛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별빛이나 달빛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태양을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왔습니까? 태양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깃드는 것이 어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빛은 세상에서 유일한 한 절대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빛을 받지 못할 때 어둠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비춰주는 그 참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빛을 가리면 가릴수록 그 인생은 어둠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생도 자기 빛을 자랑하지 말고 진정한 빛가운데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찾아 빛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밝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도 진정한 빛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도,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과학 문명이나 지식도 참빛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빛이 아니요, 동시에 그 참빛을 받지 못하면 어둠속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길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어둠속에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면 주님 앞에 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소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에는 이런 사람은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여인을 고소하러 왔던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슬 꽁무니를 빼더니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주신 말씀이 12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것은 사실 거의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 자신이 엄청난 어둠속에 있으면서, 너 자신이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네 어둠의 문제는 덮어 두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이나 진리나 생명의 길도 알지 못하고 죄를 행하며 원망과 불평속에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너 자신이 죄외 무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너 자신이 먼저 생명의 빛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욕하기 전에,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세상의 무슨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영광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인 나에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죄로 말미암아 심각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우선은 물질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로 마치 우주나 생명에 대하여 정복할 것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인간이 알고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주나 생명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그 신비에 대하여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나마 조금 알고 누릴 수 있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지식조차도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여 도리어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식과 문화수준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도리어 더 많은 스트레스와 시기와 질시와 불안과 절망과 거짓과 교만과 욕심과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더욱 심각합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섬기지도 않고 그저 자신과 물질과 헛된 우상을 섬기며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헛된 우상과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점을 치고 부적을 달고 다니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날짜와 글자에 얽매여 제 자식 이름 하나도 제 맘대로 못 짓고, 이사도 맘대로 못가고, 결혼식도 제 맘대로 못하고 귀신한테 물어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영원한 멸망의 장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13: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저마다 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무지가운데 있어서 도대체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생명의 길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천국을 보지도 못한 채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이 어둠속에 있고 지혜도 능력도 의지도 지식도 경험도 다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질고를 안고 있으면서도 병든 줄을 모르고, 마음과 눈과 귀와 영혼이 어두워져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결코 자신의 지혜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서 지혜를 찾고, 나아갈 방향을 찾고, 옳은 길을 찾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삼아 그 말씀 대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진정 하나님 안에 충만한 그 빛과 같은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인생은 이와 같이 참 빛이 아니라 도리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어서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모든 인류의 참 빛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에서 보았던 12절 말씀 다시 보겠습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유일한 참 빛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빛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에게 빛입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시간적, 공간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모든 존재에게 모든 시간 동안 모든 공간을 완전하게 비춰주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질적으로 양적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만물에게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유일한 빛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와 우무만물을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한 생명의 빛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6:35절에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14: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용서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모든 사망과 마귀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버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인류의 유일한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세상에 다른 어느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해준 사람도 없고, 마귀의 영을 받아 미친 소리를 하는 이단사이비에 외에는 이런 일을 해 주겠다고 약속해 준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선생은 명심보감 천명편에서 “順天 者는 存이요, 逆天 者는 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계선편에서는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즉 공자 선생은 자신을 잘 섬기는 사람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흥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면 공자선생 자신이 복이나 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나 화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석가모니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천사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성인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나는 깨달은 사람이오.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 붓다 곧 깨달은 자인 것입니다. 즉 석가는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자신도 단지 한 사람의 깨달은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 자신의 등불을 켜고, 너 스스로를 피난처로 삼아라. 다른 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너 스스로 열심히 도를 닦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 유일한 참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구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죄와 어둠과 무지속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와 의지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온전히 내려놓고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온전히 안겨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모든 어둠의 세력이 쫓겨 갈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더럽고 추한 것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빛과 같은 은혜가 여러분 속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정오의 빛같이 밝게 빛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과 육과 혼이 윤택하고 생기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참 빛을 찾았으면 이제는 항상 그 빛에서 결코 멀리 떠나지 말고 그 빛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빛의 따스함과 밝음과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그 빛 안에 있어야 합니다. 가까이 머물러야 합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온기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쁨을 누리려면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초상집에 가서 기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잔치집에 가야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초상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평화가 가득한 곳에 가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것도 동일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위로를 충만히 누리려면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서 교제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 나가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살아갈때에 주님이 내 안에 기쁘게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기쁘시게 거하시게 되면 두말할 나위없이 그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 어떻게 살겠습니까? 물고기가 물을 떠나 땅으로 올라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자동차가 도로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달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오염된 공기가 가득차 있는 곳에 머물러서야 어찌 건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발이 뜨거운 불덩이를 밟고서야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둠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절대로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내 마음 내 생각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 품에 안겨 주님의 생명의 빛으로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약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써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어둠과 질고와 약한 것들을 다 물리치고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빛과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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