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고난 주간 예배 설교       
 
Passion Week Worship preaching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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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1월 신년주일예배대표기도문 


할렐루야! 
새로운 한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한해를 시작하오니 새롭게 하시고, 형통케 하시며 승리하는 한 해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허물 많은 저희들을 구원하시고, 오늘 주 앞 에 나와 찬양하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올 한 해는 예배에 승리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기도에 응답받는 복된 은혜를 주옵소서. 
   
이웃을 용서하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주와 같이 동행하는 승리를 주옵소서. 
   
허물로 인한 회개기도 보다는 승리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넘치는 복된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사명에 충성하게 하시며, 감사로 열매 맺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축복하시어 복지국가가 되게 하시며, 정의사회가 구현되게 하시되, 하나님을 경외하여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복음의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한국교회를 기억하시고, 민족과 세계를 품고 기도할 때 다시금 이 나라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살아남으로 이웃이 살게 하시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주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직분을 나누어 받았사오니 충성을 다하여 상급 있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성도들을 축복하시어, 직장을 잃은 자들에게는 직업을 주옵소서.
   
가난한 성도들에게는 물질을 주옵소서. 
   
질병이 있어 고통 받는 성도들이 있나이다. 건강을 주옵소서. 
   
소원이 있어 지금껏 부르짖어 기도한 성도들에게 응답받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강단에 세우신 당회장 목사님과 함께 협력하는 교역자들과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올해도 입술에 권세를 들려 주셔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심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전달되며, 그 말씀에 회개하고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첫 해 첫 주일, 예배를 기쁘게 흠향하시기를 원하오며, 새 날에 새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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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천국의 모델 

찬송가 : '날 구속하신' 548장(통 54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18장 1∼10절 

말씀 : 우리 자녀들은 학교를 통해 교육받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은 가정이라는 보금자리에서 보호받고 양육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순수한 사랑이 있는 곳이요, 진실과 정의가 있는 곳이며, 희생적 봉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가정 속에서 자녀들은 가정의 소망이자 교회의 기둥이요,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삶을 소유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린아이는 순진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우리는 아무것도 숨기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분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나약함을 가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보여드려야 합니다. 

둘째, 어린아이는 순종과 복종의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 쉽게 응하고 개선합니다. 순종은 성도로 하여금 무한한 상급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열쇠입니다. 때문에 순종은 축복의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당시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속죄를 얻는 길이요, 응답을 받고 얻는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보다도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어린아이는 온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완악하거나 완고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온유함과 온순함으로 행합니다. 스스로 온유하셨던 주님은 우리 역시 온유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 바로 왕과 맞서서 늠름하게 싸우는 모세에게서 어디 연약한 이미지가 보입니까? 요셉은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창 45장). 그러나 그는 그 힘을 하나님의 뜻대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악인은 곧 사라지고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합니다(시 37:11). 

성도의 가정은 천국의 모델을 품고 양육하는 책임감 있는 곳입니다. 온유한 성품과 삶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숨겨진 비밀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온유하고 낮아지며 겸손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승리와 기쁨의 주인공이요, 가족들이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는 순진한 믿음을,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는 믿음을, 온유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바로 서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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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마태복음 7장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이 있으면 ‘큰 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으면 ‘협소한 길’이 있다. 

인생의 길은 두 길이 있다. 

‘좁은 문’은 믿음의 문을 말하며 그 문에 들어가면 협소한 길이 보인다. 

즉 협소한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쉬운 것같은 길이지만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영적 생명, 주님의 생명은 그리 쉽게 얻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주님의 생명의 길은 핍박과 환난과 어려움을 닥친다해도 

외롭게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에 붙잡혀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져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은 문을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래도 힘써 들어가야만 생명이 산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소한 길로 가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멸망한다. 

넓은 길은 세상 길이다. 

세상길은 걷기가 편하다, 

자신의 뜻과 생각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있는가하면 거짓선지자가 있는 것이고 

지혜로운 건축자가 있는가하면 어리석은 건축자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소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행함으로 

그 모습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이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좁은 문으로 가지 못하고 

넓은 문과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있다. 

성경 말씀을 살지 아니하고 육신의 소욕대로 생활하며 거룩한 척하고 

성결한 척하는 자는 넓은 길로 가는 자이며 말씀 가운데 거하면서 

성령에 붙잡힌 사람은 환란과 고난을 당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이기 때문에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다. 




이 좁은 길로 가는 자는 생명의 역사가 있고, 영혼이 소생하여 자라난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는 자는 천국에는 가게 되는 것이다. 

  

고전 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걸어가는 세상에 휩쌓인 사람이다. 

따라서 생명이란 믿는 사람이 좁은 길로 걸어가면서 말씀을 지킬 때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고 영혼이 날마다 자라나는 것을 뜻한다. 




 믿는 자가 넓은 길로 가면 멸망한다는 것은, 영적 생명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영적 생명의 요소들을 잃어 버려 자라나지 못하고 만들어지지 못하며,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겨우 영혼만 불 가운데서 나온 것과 같은 구원을 받게 된다.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며, 

좁은 길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므로 제재받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야 말로 환난과 역경을 만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신앙생활에서의 직분은 믿음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삶과 가르침대로 

나 스스 그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실천하며 행함을 보여주는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사람이다. 




말씀을 지킨 것만큼 생명의 역사가 있고, 영이 자라나고, 신앙인격이 만들어진다. 

말씀을 많이 붙든 것만큼 길이 좁아지고 그만큼 찾는 사람이 적으나 생명과 인격은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성도는 좁은 문에서 좀 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서 

생명이 날마다 살아 나가고 신앙의 열매가 더욱 많이 맺혀 나가야 

하나님 앞에 가서 상급을 많이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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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성도 

  
찬송가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302장(통 40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이사야 6장 6~13절 

 

말씀 :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해 하나님을 노엽게 했을 때, 밤나무 상수리나무는 베어도 그루터기는 남기는데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아합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모든 백성이 우상 바알 신을 숭배하던 때에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는 칠천 명을 남겨두었으니…"(왕상 19:18) 그들과 함께 민족 구원의 새 역사를 이루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야가 새 역사를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도 거룩한 자가 돼야만 하나님이 보존하시는 그루터기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거룩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거룩합니다. 매일 하나님 말씀으로 동행하는 삶이 돼야 거룩한 삶이 됩니다. 그것이 곧 그루터기 성도가 되는 삶입니다. 교회 안에 한심스러운 사람들로 꽉 차 있어 보여도 거룩한 그루터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새 역사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둘째, 교회 중심의 삶이 거룩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완전히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룩한 것입니다. 교제하면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초대교회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도와 교제할 때 부흥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 1:7) 사탄은 교회 중심의 삶, 하나님과 성도와의 교제하는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자를 귀하게 여길 때 거룩한 그루터기의 신앙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인간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신뢰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그루터기로 구원받은 롯의 가정이 나옵니다. 자기 집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간청해 대접할 때 마을 불량배들이 와서 사자들을 내어 놓으라 했습니다. 그러자 롯은 차라리 내 딸을 내어 줄지언정 하나님의 사자는 다치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진멸되는 가운데 롯의 가정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그루터기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기도 : 말씀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교회 중심의 거룩한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자를 귀히 여기는 신앙의 그루터기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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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추석연휴 제부도에서 가족과 함게 


불과 같은 신앙인이 되자
 
찬송가 :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182장(통 169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12장 49∼53절 



말씀 : 예수님이 하실 일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짐'과 같아서 비진리의 세계는 불안과 소요가 일어나게 됨을 가정의 비유를 들어 본문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불을 던진다는 말은 복음과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비진리의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 능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불이 임했습니다. 아들을 준다는 언약의 믿음에 대한 증거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2절에 기록된 모세에 대한 부르심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38절을 보면 엘리야 제단에 불이 임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진리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불이 임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첫째, 불은 밝힘의 역할을 합니다. 불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 속에서 밝힘으로 진리와 비 진리를 확실하게 구분시킵니다. 신앙이 있을 때는 구원의 확신 속에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혼돈 속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판단에도 실수가 없게 됩니다. 정도를 걸어갈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불은 힘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무한합니다. 이 힘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의욕이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의욕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합니다. 요한복음 6장 68절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합니다. 분명한 신앙 고백을 유지하고 성장시켜 갈 수 있는 힘은 성령의 적극적인 개입과 역사하심에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신앙의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밝혀주고 이끄는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이 있는 신앙이 되어야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진리와 비진리,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고, 능력 있는 십자가의 군병으로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 삶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기도 : 성령에 사로잡힌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혼돈 속에서 헤매지 말고 판단에도 실수가 없게 하소서. 정도를 걸어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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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으로 회복된 가정

본문 : 열왕기상 17장 8∼16절 


말씀 : 본문은 하나님을 떠나 무도한 길을 걸어갔던 북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행적 때문에 3년이라는 긴 세월 지독한 가뭄을 만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시돈 땅에 있는 사르밧의 한 과부 집에서 기적이 일어나 가정이 회복되고 절망에서 새로운 승리를 선언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3년간 가뭄 속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이 현재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가정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지요.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첫째. 절망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엘리야가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신앙이 위기를 반전시키고 기적을 임하게 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기도하며 찬송하지만 막상 위기를 만나면 내 뜻이, 내 자존심이, 내 물질이, 내 명예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적을 맛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2절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출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고 그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위기와 절망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더 찾고 생명을 걸고 순종하십시오. 

둘째. 위기 속에서도 베풀 줄 알 때 삶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아무나 마지막 양식을 타인을 위해 주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만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주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여 주리라"(눅 6:3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행 20:35). 손을 펴는 자,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기가 다가오면 올수록, 위기를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베푸는 삶을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이 회복되는 기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면 가능합니다. 우리는 베풀 수 없는 상황에서도 베푸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삶 속의 가루통과 기름통이 복되게 될 것입니다. 

기도 : 절망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위기 속에서 베풀 줄 아는 삶이 되게 하시고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케 하소서, 베풂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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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회적거리두기2.0 10월 가정예배 (불의의 삯을 사랑한 발람 )

본문 : 민수기 22장 21~35절 

말씀 : 본문의 국가 간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아모리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말은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모리의 신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발락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한다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스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발람에 관한 말씀을 통해 영적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유혹을 품고 있는 발람입니다. 발락이 보낸 사람들은 먼저 발람을 칭송하는 말과 복채로 그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음성이 너무도 강했기에 다음날 발람은 발락의 사람들을 돌려보내며 발락의 청을 거절합니다. 발락은 더 높은 관료들을 보내 발람을 유혹합니다. 발람은 점차 마음이 흔들려 생각해볼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유혹을 만납니다. 물질과 명예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은 어떤 사안에 대해 절대 문제없는 듯 유혹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이 유혹이며 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죄의 길에 들어선 발람입니다. 발람은 끝내 모압 고관들과 함께 모압왕 발락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유혹을 바로 떨쳐내지 못하면 결국 죄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모압의 고관들이 찾아왔을 때 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발람에게 "함께 가라"고 하신 것은 모든 책임이 발람에게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기도한다"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도록 기도한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그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과연 평탄한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그를 태우고 가던 나귀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놀라 발을 상하게 됩니다. 영안이 어두운 발람은 나귀가 몸부림쳐 자기를 상하게 한 것에만 분노하였을 뿐 그 원인을 전혀 몰랐습니다. 탐심은 눈을 멀게 합니다. 

욕심이 과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 받은 자'(벧후 2장)로 기억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좋은 것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결말은 공허함과 멸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은혜를 누리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되신 주여, 세상의 유혹과 죄악의 길에서 참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늘 승리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물질과 명예에 마음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며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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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가정예배 (코로나19 비대면예배기간)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인한 용서 
 
찬송가 : '예수 앞에 나오면' 287장(통 205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50장 15~21절 


말씀 : 야곱의 장례를 마친 후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 종으로라도 써달라며 간곡히 부탁하는 것처럼 요셉의 형들도 자신들을 요셉의 종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에게 다가가 위로합니다. 자신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들에게 그 용서가 진심임을 눈물로써 확인시켜 줍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속임수로 시작된 이야기가 화해와 위로, 그리고 축복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죄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들을 애굽 땅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요셉의 형들은 애굽에서 요셉을 만난 후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요셉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야곱은 아들들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고 자신 또한 아버지를 속였던 사건(자신을 에서라고 속이고 장자권을 얻어낸 것)을 기억해 냈을 것입니다. 속고 속이는 인간 사회 속에서 '나만 그러는 것도 아닌데'라며 죄악을 쉽게 넘겨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서받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용서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둘째, 용서는 상호적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용서했지만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용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만 자신들을 용서해 주는 척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신들을 처형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상호적입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 용서를 받아들여야 진정한 용서입니다. 요셉도 과거의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의 두려움을 알고 난 요셉은 함께 울며 그들을 위로합니다.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상호 용서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주변에 나의 용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꺼이 울어 줄 마음을 품으십시오. 

셋째, 용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철저히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물론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고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용서는 잊어버리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통해 축복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기도 :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도 주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용서로 인해 이웃에게 사랑을 나눠주며 용서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사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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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찬송가: '예수는 나의 힘이요' 93장(통 93장) 
신앙고백: 사도신경 
본문: 디모데후서 2장 1~6절 

말씀: 오늘은 3·1절입니다. 돌아보고 싶지 않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있습니다. 민족의 아픈 기억인 36년간의 일제시기에 충성되고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민족 전체에 자유의 혼과 해방의 용기를 불어넣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엔 크리스천이 민족의 2%에 불과했습니다. 성경 본문은 세 종류의 삶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 좋은 군사입니다. 군인의 삶은 명령에 죽고 삽니다. 명령에는 거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는 거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마 16:24). 오직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을 뿐입니다.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군인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혹독한 훈련을 겪어야 하며, 전쟁 시에는 생명을 내놓고 국민을 위해 싸우는 신분입니다. 영적 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를 각오해야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롬 8:18). 

디모데후서 2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디모데도 바울의 순교 후 투옥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악과의 싸움이므로 많은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고난의 극복을 통하여 성숙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둘째, 경기하는 자로서의 충성입니다. 세상은 경주장과 같습니다.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경기에 참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운동경기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전력투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규칙을 지키는 일입니다. 규칙을 어기게 되면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규칙을 지켜야 하는데 그 규칙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죄의 삶을 벗고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롬 13:12). 

셋째, 농부로서의 충성입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농부요, 이 세상은 밭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씨앗을 많이 뿌려야 합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되 눈물을 흘리며 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며,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기 때문(시 126:5∼6)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저를 복음의 농부로 사용해 주옵소서. 세상의 헛된 것에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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