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설교 < 빛의 은혜가 가득한 인생 >

 

 


제목:빛의 은혜가 가득한 인생

말씀:요8:12-24

 


1.어둠속에 있는 인생

어느 날 해와 별이 서로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해가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머얼리 비추며 봐라, 내 빛이 얼마나 밝으냐 하면서 뽐냈습니다. 그러자 별이 말했습니다. 네 빛이 밝긴 하다마는 어둠속에서는 내가 최고지. 나는 밤이 되면 온 하늘을 영롱한 빛으로 수놓아 사람들에게 꿈과 사랑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가 말했습니다. ‘어둠이 도대체 뭐냐?’ 별은 그것도 모르냐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며 해를 캄캄한 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해가 찾아가자 그만 밤이 사라져 어둠을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별은 다시 해를 커다란 동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동굴안도 역시 해가 들어가자마자 어둠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어둠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태양은 어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태양 앞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별은 자기 빛이 태양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양앞에서 빛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별빛이나 달빛이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은 태양을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왔습니까? 태양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깃드는 것이 어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 빛은 세상에서 유일한 한 절대자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자의 빛을 받지 못할 때 어둠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비춰주는 그 참빛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 빛을 가리면 가릴수록 그 인생은 어둠속에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생도 자기 빛을 자랑하지 말고 진정한 빛가운데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빛을 찾아 빛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인생이 밝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도 진정한 빛이 아닙니다. 인간 자신도,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과학 문명이나 지식도 참빛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참빛이 아니요, 동시에 그 참빛을 받지 못하면 어둠속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길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어둠속에 있는지를 일깨워 주시면 주님 앞에 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소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에는 이런 사람은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처리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여인을 고소하러 왔던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슬 꽁무니를 빼더니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주신 말씀이 12절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것은 사실 거의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 자신이 엄청난 어둠속에 있으면서, 너 자신이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네 어둠의 문제는 덮어 두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우리 모두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이나 진리나 생명의 길도 알지 못하고 죄를 행하며 원망과 불평속에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너 자신이 죄외 무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너 자신이 먼저 생명의 빛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욕하기 전에, 세상의 잘못된 것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세상의 무슨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영광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인 나에게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죄로 말미암아 심각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우선은 물질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달로 마치 우주나 생명에 대하여 정복할 것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인간이 알고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주나 생명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그 신비에 대하여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나마 조금 알고 누릴 수 있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능력이나 지식조차도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여 도리어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식과 문화수준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도리어 더 많은 스트레스와 시기와 질시와 불안과 절망과 거짓과 교만과 욕심과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더욱 심각합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섬기지도 않고 그저 자신과 물질과 헛된 우상을 섬기며 자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헛된 우상과 미신에 빠져 있습니다. 점을 치고 부적을 달고 다니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날짜와 글자에 얽매여 제 자식 이름 하나도 제 맘대로 못 짓고, 이사도 맘대로 못가고, 결혼식도 제 맘대로 못하고 귀신한테 물어봐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영원한 멸망의 장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13:1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저마다 다 똑똑하고 잘났다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무지가운데 있어서 도대체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생명의 길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천국을 보지도 못한 채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이 이와 같이 어둠속에 있고 지혜도 능력도 의지도 지식도 경험도 다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질고를 안고 있으면서도 병든 줄을 모르고, 마음과 눈과 귀와 영혼이 어두워져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결코 자신의 지혜나 경험이나 이성이나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서 지혜를 찾고, 나아갈 방향을 찾고, 옳은 길을 찾고, 그것을 기준점으로 삼아 그 말씀 대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진정 하나님 안에 충만한 그 빛과 같은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인생은 이와 같이 참 빛이 아니라 도리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어서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모든 인류의 참 빛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에서 보았던 12절 말씀 다시 보겠습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유일한 참 빛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빛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에게 빛입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시간적, 공간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모든 존재에게 모든 시간 동안 모든 공간을 완전하게 비춰주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질적으로 양적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만물에게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유일한 빛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와 우무만물을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한 생명의 빛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6:35절에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14: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과를 용서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오직 모든 사망과 마귀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버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인류의 유일한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세상에 다른 어느 누구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해준 사람도 없고, 마귀의 영을 받아 미친 소리를 하는 이단사이비에 외에는 이런 일을 해 주겠다고 약속해 준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선생은 명심보감 천명편에서 “順天 者는 存이요, 逆天 者는 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계선편에서는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즉 공자 선생은 자신을 잘 섬기는 사람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흥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행하면 공자선생 자신이 복이나 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나 화를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석가모니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천사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성인입니까? 아니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나는 깨달은 사람이오.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 붓다 곧 깨달은 자인 것입니다. 즉 석가는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자신도 단지 한 사람의 깨달은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 자신의 등불을 켜고, 너 스스로를 피난처로 삼아라. 다른 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내가 너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너 스스로 열심히 도를 닦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께서 유일한 참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구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죄와 어둠과 무지속에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와 의지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온전히 내려놓고 세상의 유일한 빛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온전히 안겨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모든 어둠의 세력이 쫓겨 갈 것입니다. 모든 약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더럽고 추한 것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빛과 같은 은혜가 여러분 속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정오의 빛같이 밝게 빛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과 육과 혼이 윤택하고 생기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참 빛을 찾았으면 이제는 항상 그 빛에서 결코 멀리 떠나지 말고 그 빛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빛의 따스함과 밝음과 아름다움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그 빛 안에 있어야 합니다. 가까이 머물러야 합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고 온기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쁨을 누리려면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초상집에 가서 기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잔치집에 가야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초상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싸움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평화가 가득한 곳에 가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것도 동일합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온전히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위로를 충만히 누리려면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이서 교제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 나가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살아갈때에 주님이 내 안에 기쁘게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기쁘시게 거하시게 되면 두말할 나위없이 그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 어떻게 살겠습니까? 물고기가 물을 떠나 땅으로 올라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자동차가 도로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면 어떻게 달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오염된 공기가 가득차 있는 곳에 머물러서야 어찌 건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발이 뜨거운 불덩이를 밟고서야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둠속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절대로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내 마음 내 생각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 품에 안겨 주님의 생명의 빛으로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약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써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어둠과 질고와 약한 것들을 다 물리치고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빛과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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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성령의 능력

 

 

 

 

제목 : 성령의 능력

말씀 : 창3:1-7

1.죄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여러분, 식충식물 아세요? 곤충 잡아먹는 식물 말입니다. 식충식물들은 잎이나 꽃으로 곤충을 잡아먹는데 이들은 먼저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여 곤충을 유인합니다. 곤충이 이 향기를 맡고 꽃으로 접근하여 앉으면 미끄럽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게 있습니다. 그 웅덩이 속에는 곤충을 녹여버리는 강력한 소화액이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은 그것도 모르고 향기에 취해 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들어가면 꽃잎이 닫혀 버리고 곤충은 그 안에서 녹아버려 식물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마귀가 인간을 사냥할 때 쓰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뭔가 향기로운 냄새를 보냅니다. 아름답고 편하고 즐겁고 향기롭고 기쁘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뭔가 맛있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호기심이 발동되어 자꾸 가까이 가게 됩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가다가 그만 풍덩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다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귀의 수작에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에 속습니다. 성과 향락과 쾌락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놀음의 유혹에 속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안일함과 편안함의 달콤함 유혹에 속습니다. 그런 달콤한 유혹의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일날 일하면 그 만큼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행복할거라는 유혹의 덫에 걸려 주일날 교회도 못나오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 안하면 더 부자가 되어 더 행복할 줄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십일조 생활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니나노 먹고 마시자 하면 무슨 기쁨이나 행복이 있는 알고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뭔가 한 방에 될 것 같은 달콤한 유혹에 빠져 노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뭔가 황홀하고 쾌감이 느껴지는 기분의 유혹에 빠져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행복할 줄 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남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세요. 거기는 혹시 죄된 육신과 생각으로 맛있고 재밌고 넉넉한 삶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과 안식과 자유가 없습니다. 참된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존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는 고통과 상처와 죽음뿐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상) 보세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먹어도 괜찮다.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좋아진다.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까 먹어라. 그래서 나무의 실과를 보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에 탐스러웠습니다.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덜커덕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하고 지혜롭고 평안과 기쁨과 가치와 의미와 보람이 넘치는 삶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축복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해야 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질병과 수고속에 살다가 마침내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혹에 속으면 안됩니다. 사기꾼에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가짜에 속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먹이에도 진짜가 있고, 가까가 있습니다. 진짜는 양식이 있고, 가짜는 미끼입니다. 양식은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만 미끼는 똑같이 먹는 것이지만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귀가 던져놓은 아주 맛있게 생긴 미끼가 너무 많습니다. 돈의 미끼, 권력의 미끼, 향락의 미끼, 명예의 미끼, 편안함의 미끼, 자기 중심의 미끼, 지식의 미끼 등 수많은 미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언가 우리 앞에 그럴듯한 것이 있으면 이것이 양식인지 미끼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병들게 하고 고통받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인지 우리를 죽게 만드는 미끼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게 유혹인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음성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아무리 달콤하고 그럴듯하고 보기 좋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달콤한 마귀의 소리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에게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보람과 의미와 가치와 존귀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하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교묘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미끼를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유혹의 장소를 멀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먼저 마귀가 주는 미끼가 널려 있는 곳을 피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지뢰 전문가라도 지뢰가 널려 있는 지뢰밭으로 들어갔다가는 까딱하면 죽습니다. 세상에는 마귀가 묻어놓은 지뢰가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미끼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다니다가는 어느 순간에 낚시 바늘에 코를 꿸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유혹의 마수에 걸려들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지뢰가 터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장소와 시간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유혹을 당합니까?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 봄으로써 욕망이 발동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제 보게 됩니까? 죄의 장소에 가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서 보게 되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죄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꾸 보고 듣게 되면 그게 점점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죄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으면 죄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죄가 성장하고, 생명 양식을 공급하면 생명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죄의 양식이 뭡니까? 왜곡되고 악하고 죄된 것들을 가까이 하며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폭력, 절도, 강도, 간음, 향락, 도박, 술, 담배, 마약, 거짓, 미움, 증오, 원망, 불평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양식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까이하여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죄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의 욕망들이 점점 자라나 마침내 활활 타오르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와가 어떻게 유혹에 빠졌습니까? 그것은 그녀가 선악과나무 근처에 간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였으면 그 근처에도 가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나무 근처에 갔고, 게다가 마귀와 다정하게 대화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습니까?

6절 상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러니까 하와는 마귀가 유혹할 때 벌써 그 나무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 나무 아래 있으니까 마귀가 작전을 개시한 것입니다. 정말 저 열매를 먹으면 죽느냐고 했느냐? 그러자 하와는 친절하게 답변해 줍니다. 먹는 것은 물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무슨 말이냐,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 같이 된다. 그러니까 마음놓고 먹어라. 그럽니다. 이 말에 솔깃해진 하와가 나무를 보자 정말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너무나 탐스러운 열매여서 그만 덜커덕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나무아래 간 것도 잘못이고 게다가 마귀의 유혹에 친절하게 대답한 것도 잘못입니다. 아니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위험한 장소에 가기는 왜가며, 게다가 그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마귀의 말장난에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뭡니까?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다윗도 보세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삼하11:2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러분, 이 때는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 중이어서 온 군대가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여 여유가 있었던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며 낮잠을 즐기다가 한가롭게 지붕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만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만치 하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권한으로 그를 데리고 오라 하여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은 있지 말아야 곳에 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고, 결국 크나큰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긴 그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까? 일부터 유혹이라도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하긴 세상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다윗은 그곳에 있지 말아야 했습니다. 설령 눈에 보여도 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게 보이면 빨리 집안으로 도망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큰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근처에 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눈에 띄어도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공연히 근처에 얼씬 거리다가 못 볼 꼴 보고 영혼을 도둑질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잠23:31에서는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포도주는 아름답습니다. 달콤합니다.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듭니다. 찰랑찰랑대면서 사람을 유혹합니다. 더구나 오색불이 휘황찬란하게 번쩍번쩍 거리며 빛나는 불빛 아래서 보면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며 유혹합니다. 그러면 침이 꼴꺽 넘어가고 그러면 결국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에 가까지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시고 싫어하시는 곳에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마십시오.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싸우고 죽이고 하는 그런 장소나 시간에는 근처에도 기웃거리지 마세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마세요. 향락과 오락과 도박과 음주가무가 있는 그런 곳에는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가면 자칫하면 그 유혹의 웅덩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맨날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유혹에 빠지는 판에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집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상황이 문제입니다. 죄의 장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의 장소에서 죄와 무지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속에서 죄와 무지와 교제하고 그런 것들을 들으며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인생인양, 그것이 행복인양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식어집니까? 왜 강단에서 선포하는 말씀들이 오래가지 못합니까? 왜 천국과 지옥이 자꾸 의심이 갑니까? 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까? 세상에 발을 딛고 세상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 나라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리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들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을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이 말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그러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살라는 것입니다. 빨리 천국으로 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들에 물들고 끌려다니지 않도록 주님을 가까이 하고, 거룩한 장소를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은 절대로 세상의 죄되고 악하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유혹의 장소를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전에서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수고하며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진리의 길, 생명의 길,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는 곳, 주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 성실하게 진실하고 열심히 그런 곳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유혹의 장소를 피한다해도 그래도 유혹은 다가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몸담고 살고 있는 한 죄된 세상과의 접촉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있는 장소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안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는 해야 합니다. 적이 공격해 오는데 변변한 무기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서만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 공화정시대의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혀를 가진 웅변가였고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최고의 장수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절세미인이었다고 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먼저 안토니우스와 함께 가장 유능한 장수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저를 유혹하여 결혼하여 케사리온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저가 암살 당하게 되고 그러자 어떻게든지 케사리온을 유리한 위치에 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결혼을 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도 더 이상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이어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당대 최고의 장수도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능력과 용기와 의지와 지성 이런 것들 결코 유혹 앞에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오직 한가지 우리가 믿을만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여 말씀의 칼날로 물리쳐 버리는 길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더럽고 추하고 죄된 장소와 시간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곳을 혐오하여 멀리하게 됩니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엡6:13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경의 검 이런 것들로 무장하고 있어야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도전을 깨트려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유혹의 장소를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장소에 서성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은혜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섬김이 있는 곳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죄되고 추한 곳에는 가지도 말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들을 바르게 분별하여 물리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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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영광의 면류관   

   

 

 

 

제목 : 영광의 면류관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러면 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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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성숙한 그리스도인

 

 

 


말씀 : 고전2:14-3:3

제목 : 성숙한 그리스도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곤충입니다. 그러므로 거미같은 인생이란 덫을 놓고 남의 등이나 쳐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미같은 인생이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남에게는 줄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모아 들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 같은 인생입니다. 꿀벌은 물론 꿀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모아서 남에게 다 줍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는 자기 생명을 받쳐 벌침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줍니다. 그래서 꿀벌 같은 인생이란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그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때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향하여 좀더 달려감으로 주의 생명의 은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1.육에 속한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이란 yucikov"(프쉬키코스)인데 이는 육적인, 천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혼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죄와 무지를 그대로 가지고 죄된 육신의 소욕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음으로 육과 혼도 죄와 어둠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것을 회복시켜야 영혼을 살려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거부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믿는 일을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전의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지요.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련하고 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도리어 생명에 속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하고 해요. 당연하지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진리를 알고, 성령의 일을 아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니 다만 미련할 뿐이요, 어리석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고, 주님을 알고, 생명의 길을 아는데 성령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거지요. 영이 죽어 있어서 성령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죄된 육과 혼의 요구대로 삽니다. 육과 혼의 본능을 따라,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거 뿐이예요. 비록 정신적으로 나름대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그러나 육은 육이고, 혼은 혼일 뿐이예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다가 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인생은 결코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좀 고상하고 선하고 가치있는 삶을 산다해도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육과 정신이 최상의 가치를 드러내며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도 절대로 이 편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편에 서 있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천만다행으로 단순히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과 유사해서 좀 혼돈이 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3:1절의 말씀의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특별히 후반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 말씀이요. 고린도 교인중에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밖에 있다는 거예요?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안에 있긴 있는데 어린아이같은 자들, 성숙하지 못해서 어린아이 같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은 육체적인 삶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 영보다 육의 지배를 더 많이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남자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군인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직 군인 노릇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사람입니다.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오래 기간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주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처럼 대하며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2절이지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아서 차마 밥을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면 체 할 것 같아서, 단단한 밥을 먹이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못 먹이고 계속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곁의 성도들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뭐 솔직히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성숙했으면 얼마나 성숙했겠어요. 내가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싸주고 덮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젖은 무엇이고, 밥은 무엇입니까? 젖은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영양가가 많은 음식입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단단합니다. 그냥 안 넘어 갑니다. 씹어야 합니다. 자기가 침으로 삭혀서 넘겨야 합니다. 거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맵고 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젖과 밥이 있습니다. 젖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 소화가 잘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등의 주로 은혜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밥은 단단하고 넘기기 힘들고 소화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로 책망이나 헌신의 요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은 씁니다.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목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까? 어떤 양식을 먹일까? 어떤 분에게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술술 넘어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단단하고 거칠고 맵고 쓴 말씀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어떤 분은 한참 일할 나이이고, 어떤 분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어떤 분에게는 고단백 영양분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들에게 매일 젖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또 단단한 음식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달콤한 말씀만 바라지 말고 혹 쓴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혹은 너무 초보적인 말씀을 한다고 그거 다 아는 건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아직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해도 주님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것 때문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주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된 모습이 많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삶은 물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위치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여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15절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육과 혼의 지배보다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라고 100%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과 혼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100% 신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육 보다는 영에 더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지배를 받긴 받지만 아직은 영보다는 육과 혼의 원리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아직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15, 16절을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먼저 15절 보면 아주 신나는 말씀이 있어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남을 마음대로 판단하지만 남에게는 절대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힘써 달려가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받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16절절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잘못하면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또 아직도 미성숙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란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에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으면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임은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쫄병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밥을 먹여줄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그 자신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먼저 정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을 배제한 채 그저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아직도 그저 육신의 본능만을 따라 살고 있다면 속히 영에 속한 사람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 즉 믿음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 속했다해도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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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기독교의 황금율

 

 


제목 : 기독교의 황금율

말씀 : 마7:12

1.기독교의 황금율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일컬어지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라는 사람이 이 말씀에 감동을 받고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늘 음미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 말씀을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교도 곧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황금판에 새겨서 걸어놓고 늘 묵상하며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나 재판을 할 때 이 말씀을 종종 인용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상숭배자가 이 말씀을 황금율로 여겼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할까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주님의 말씀이 다 황금보다 귀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얼마나 지당하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서로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이 선지자가 말씀하고 율법에 기록된 말씀의 근간이요, 핵심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도 당연하지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래로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면서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게 말씀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2:37-40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사실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나 대접하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죠, 사랑하면 대접하고, 진실로 대접하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도 서로 대접하라는 말씀과 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안다며 위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합니까?

2.우리 모두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없이 해야 되지요. 안 그래요? 우주만물의 주권자시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명령인데 이유고 뭐고 따질 일이 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요.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을 때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물론 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 제일 앞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앞에서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유로 어떻게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학생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야한다. 나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와 같이 앞에 있는 내용이 이유가 되어 뒤에 있는 행동을 꼭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 남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그 앞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앞의 말씀 1~11절 전체 말씀인데 특별히 2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즉 네가 남을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 남도 너를 대접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대접을 받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대접이란 먹을 것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귀히 여김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무시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겠습니까? 내가 욕하는데 상대방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내가 남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데 누가 나를 높여 주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높여주면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서로 대접하되 내가 먼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11절에 보면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안다면 선한 나는 너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너희가 먹고 입고 잠자며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저 주었고, 나아가 독생자까지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귀하게 대접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터전을 삶고 있는 땅, 세상에 빛을 주고 따뜻하게 하여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태양, 물, 공기, 각종 동물이며 식물들, 지혜와 능력과 이성,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해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뭐 잘나고 똑똑하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아들 대접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 공로없이 귀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높여주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른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한편으로는 서로 대접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3.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마22:37,38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러분, 보십시오. 첫째 계명이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그냥 대충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이고 의무이며,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우이며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거룩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적으로 제법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정말 한없이 작은 자입니다.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셔서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높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몸과 마음과 정성과 심지어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말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섬겨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당연한 태도요, 이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올바른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사람을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 능력 지혜 경험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완전한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시며 생명과 진리와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며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이웃을 사랑하며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르게 귀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만 열심히 섬기는 것만이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한 삶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알면 당연히 받은 은혜를 삶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의롭고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아래로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경건이요, 거룩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마22:39,40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보십시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두 번째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레19:18절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있는 레19장의 말씀은 한마디로 성도의 거룩한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레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즉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다. 그러므로 너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면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데 거기에 보면 ‘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헛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라. 곡물을 거둘 때에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 불의를 행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등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거짓과 도적질과 불의를 버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깨끗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마땅한 태도이고 서로가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하는데 특별히 여러분,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면 먼 이웃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면 가족은 얼마나 더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함으로 서로에게 정말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족 못지않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해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물론 성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형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똑같은 아버지를 섬기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엡2:19절에서는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권속이요, 형제이면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주님의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져가겠습니까?

그런데 근간에 보면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높여주고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싸우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일이므로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을 비추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귀하게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을 정말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성도들간에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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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생명의 풍성한 은총 ( April Sunday Sermon )

 

 

 

말씀 : 마13:3-9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총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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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영광의 면류관


 

 

 
제목 :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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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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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성령의 충만함

 

 

 

 


제목 : 성령의 충만함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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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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