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고난 주간 예배 설교       
 
Passion Week Worship preaching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마 26:69-75)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 중 열심있는 수제자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실 때도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통해 우리 성도들이 알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우리는 약한 자입니다(롬 5:6) -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과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승리의 주님, 도우시는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인 것입니다.

  ② 소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넘어집니다(롬 8:24,25) -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핍박과 환난을 받지만 기쁭으로 인내하여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도안 겪게 될 수많은 고난에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③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고후 12:9,10) -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는 크고 작은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우리 자신들보다도 이 사실을 더 절 아십니다.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함으로 실패자가 되었지만, 다시 회개하고 일어나 사도직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주님을 향해 가다 육신의 연약함을 인해 넘어졌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약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승리의 주님이 연약한 당신을 이끌어 승리하는 삶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영원한 실패자 가룟 유다(마 27:3-8)   

 

  가룟 유다는 영광스런 주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아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봄으로 주의 제자로서의 우리의 자세를 바르게 합시다.

 

  ① 육신이 비참하게 주었습니다(5절) -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게 한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스스로 목매달아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 얻은 은 삼십은 그가 죽은 후 그의 묘지를 사는데 쓰여졌습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세상적인 욕심의 결국은 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② 명예가 죽었습니다(6-8절)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된 이름은 그의 명예를 죽일 뿐입니다. 기룟 유다의 이름은 그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2000년이 지난 지금은 물론 영원히 저주의 대명사로 불려질 것입니다.

  ③ 영혼이 죽었습니다(약 1:15) -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는 진정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주님은 그가 돌이켜 주님 앞에 회개했다면 그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돌이키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음을 택했을 뿐입니다. 이에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잠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가다 돌이키지도 못할 인생의 영원한 실패자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을 잘 따라 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따라갑시다. 혹 세상적인 유혹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노선에서 잠시 빗나갔을지라도 즉시 회개하고 돌아옵시다. 승리의 삶을 주시는 주님께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사 53:4-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도리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고난 주간을 맞이해 이땅에 오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① 고난 받은 예수님(4절) - 예수님은 아무 흠도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의 백성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조롱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② 버림 받은 예수님(5절) -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기에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인간들은 오히려 욕하며 배척했습니다. 똫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감으로 처절한 배반을 경험하셨습니다.

  ③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6절) - 죽음은 범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아무 흠도, 죄도 없는 깨끗한 주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은 2000년전에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십자가 죽음의 사역을 믿기만 하면 모든 자들이 다 영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경험한 전화 위복(행 9:4; 고후 12:7; 빌 1:13)   

 

  예수님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사역을 마치신 후에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고 감사했던 바울을 통해 고난을 주시는 깊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① 소경됨을 인해 영적 눈을 떳습니다(행 9:4) -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잠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울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빛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육체의 한 지체를 잃음으로 그는 영혼을 얻었습니다.

  ② 육체의 가시로 겸손을 배웠습니다(고후 12:7) -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체의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셨습니다. 바울은 육신의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과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③ 감옥에 갇힘이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빌 1:13) -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이 옥에 갇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복음이 막히는 듯했으나, 이는 또다른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영혼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난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감추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인내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됩시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21년1월 신년주일예배대표기도문 


할렐루야! 
새로운 한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예배와 찬양과 기도로 한해를 시작하오니 새롭게 하시고, 형통케 하시며 승리하는 한 해가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허물 많은 저희들을 구원하시고, 오늘 주 앞 에 나와 찬양하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올 한 해는 예배에 승리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기도에 응답받는 복된 은혜를 주옵소서. 
   
이웃을 용서하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주와 같이 동행하는 승리를 주옵소서. 
   
허물로 인한 회개기도 보다는 승리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넘치는 복된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사명에 충성하게 하시며, 감사로 열매 맺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축복하시어 복지국가가 되게 하시며, 정의사회가 구현되게 하시되, 하나님을 경외하여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복음의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한국교회를 기억하시고, 민족과 세계를 품고 기도할 때 다시금 이 나라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살아남으로 이웃이 살게 하시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주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직분을 나누어 받았사오니 충성을 다하여 상급 있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성도들을 축복하시어, 직장을 잃은 자들에게는 직업을 주옵소서.
   
가난한 성도들에게는 물질을 주옵소서. 
   
질병이 있어 고통 받는 성도들이 있나이다. 건강을 주옵소서. 
   
소원이 있어 지금껏 부르짖어 기도한 성도들에게 응답받는 한 해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강단에 세우신 당회장 목사님과 함께 협력하는 교역자들과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올해도 입술에 권세를 들려 주셔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심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전달되며, 그 말씀에 회개하고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첫 해 첫 주일, 예배를 기쁘게 흠향하시기를 원하오며, 새 날에 새 힘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20 신년감사예배설교 / 교회가 서야 할 자리(딤전3:14-16)

 


제목 : 교회가 서야 할 자리

말씀 : 딤전 3:14-16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개체이든 집단이든 간에 각각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구분되는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도덕성과 풍부한 감정, 그리고 지적인 능력과 영적인 요소등이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가지고 있는 지정의라고 하는 인격적인 요소들과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영적인 요소들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요소들중에 어떤 한 요소들이 결여된다면 참다운 인간으로서 누려야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누리기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역시 똑같습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올바르게 할 수 있으며, 교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누려야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이란 여러번 말씀드린바 있지만 외적으로 근엄하다거나 단정하고 깨끗하고 장중한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이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물론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었기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사상과 다른 목적과 다른 가치와 다른 사명과 다른 삶의 양식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 존재하는 목적이나 해야할 사명이나 살아가야 할 모습이나 가져야 할 목표가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어떤 공동체들은 영리가 그 목적이자 사명입니다. 또 어떤 공동체들은 친목이 그 목적입니다. 또는 지식의 전달이나 혹은 인격의 수양 혹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집단도 있고,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세워진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영리도 아니고, 친목도 아니고, 자선사업도 아니고, 질서유지도 아니며, 지식의 전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격의 수양도 아닙니다. 교회의 목적은 죄가운데 빠진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인간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영혼이 누려야 할 참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어지면 결국은 세상의 다른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영리라든가 친목이라든가 질서나 자유, 자선사업등등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서 세상의 다른 공동체들과는 다른 인간 구원의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떤 기초위에 서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사실은 그 자신의 존립조차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모양이 그럴듯해도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립니다. 아무리 높이 높이 쌓아 올려도 기초가 분명하지 못하면 곧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작업을 해도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도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초를 제대로 하지 않고 모래위에 지은 집 같이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해 놓으면 쉽사리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비유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기초가 잘 잡혀 있어야 합니다. 공부도 기초가 잘 잡혀 있어야 하고, 인생도 어릴 때부터 기초를 잘 닦아 주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잘 되어 있어야만 어떤 상황이나 조건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참된 가치를 누리며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의 기초는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3장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23절에서는 교회를 가르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으며, 오늘 말씀에서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영과 육과 정신에 있어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완전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위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교회는 무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난 교회는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 공동체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교회는 모래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위에 터 잡지 않은 교회는 앙꼬없는 찐빵이요, 태양없는 지구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요, 단맛을 잃어버린 설탕이요, 구멍난 풍선이요, 김빠진 콜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 선생은 그의 불후의 명저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진정한 교회의 으뜸가는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우리가 비록 무지렁이 같지만, 우리가 비록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벧전2:9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세상속에서 빼내심을 받고 구별된 백성입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비록 정말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때도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거룩한 사람들이요,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똑똑해서, 거룩해서, 선하고 의로워서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나약하지만, 미련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편에 속해 있고, 진리에 속해 있고, 그래서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로 다짐하고 소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큰 영광으로 채워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별된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기초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따를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식속에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하니까, 의롭지도 못하니까, 거룩하지도 못하니까,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주로 아내는 질문을 던지고, 남편은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여보 여보, 오늘 김집사님이 입고 온 그 멋진 새옷 보았어요? 아니. 그럼, 이집사님이 입고 온 그 밍크 코트는요? 아니. 그럼 성가대에 앉아 있던 박집사 얼굴 화장이 이상하던데 그것은 보았지요? 아니. 그럼 목사님의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보았어요? 아니. 오늘 목사님이 찬송 부를 때 음이 엉망이었죠? 몰라. 그러자 아내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당신은 교회가서 그런것도 못보고 도대체 무엇을 보고 왔단 말예요? 나! 목사님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왔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올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새해 첫날 KBS 아홉시 뉴스를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정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경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그리고 한참 있다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가 끝난 다음에는 스포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올해에는 경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국민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하여, 의욕을 주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위하여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뉴스를 들으면서 대단히 서글펐습니다. 좋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다 입니까? 그게 정말 인간을 참다운 인간이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정말 인류에게 온전한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입니까? 그것이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참되고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가운데 참다운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축복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것이 그들이 한계니까요. 그것이 죄가운데 빠진, 무지 가운데 빠진 우리 인생의 어리석은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그런줄 번연히 알면서도 저는 정말 서글펐습니다. 언제나 저 텔레비젼 뉴스에서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언제나 저 공영방송에서 참된 진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언제나 저 아홉시 뉴스에서 인생의 참된 생명의 문제에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정말 아쉬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텔리비젼 너무 많이 보지 마십시오. 보시더라도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보십시오. 그것을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돌아가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분별하며 보셔야 합니다.

저는 가끔 방송을 보다가 또 한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공영방송에 무슨 그렇게 잡다한 연예인들 이야기가 판을 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호화판 쇼나 춤판을 벌리고, 주연상이니 조연상이니 올해의 톱 가수니 하면서 휘황찬란하고 요란맞게 난리를 치는 것을 보면 저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우리 인간의 삶에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불만인 것은 그렇다면 이 사회 각 계층에서 그 만큼 공헌 안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농민들만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에 공헌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 농민들이 그래 그까짓 연예인들에 비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농민들을 위한 행사는 그렇게 호화판으로 화려하게 해주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또 연예인만 못하단 말입니까? 아니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들만 못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올바른 가치와 목적을 알 수 있고, 그래야 온전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롬12:2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세상이 돌아가는대로, 세상 풍조를 따라 휩쓸려 다니다가 보면 결국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둠의 세력들에게,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터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엡6:14에서는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4:24에서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6:7에서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전당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진리의 터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터위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의 터위에 굳게 서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공동체도 이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젼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경찰도 이 진리를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국회에서도 정당에서도 다른 어떤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서만이 거룩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직 거룩한 무리들인 저와 여러분만이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지 않으면 우리는 줏대없이 이리저리 세상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기둥으로 버티어져 있지 않으면 마귀사탄의 공략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지 않으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터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심지어는 아무리 사랑이 넘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없이도, 하나님없이도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없이도 얼마든지 재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없이도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 없이도 화려할 수도 있고, 인격수양도 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랑도 하고, 부귀영화도 누리고,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기도 하고, 인생을 나름대로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 누각입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입니다. 환난과 풍파가 몰아 칠 때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세상 끝날 주님의 심판대앞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것들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거룩한 백성들은,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들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의 기초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 온혜교회는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세워져야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온혜교회의 1999년도 표어는 「진리의 터위에 굳게 서는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는 거룩한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성도인 우리는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함과 동시에 그 권리를 올바르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그럴때만이 이 또한 이 사회가 삽니다.

올 한해는 정말이지 나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진리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의 기둥과 터인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세워지는 우리들 모두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저와 여러분과 우리들의 가정과 우리 온혜교회가 이 지역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참으로 은혜와 기쁨과 참된 생명의 풍성함이 넘치는 축복된 삶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19년 12월 대강절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 절기별 설교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Epiphany),사순절(Lent),오순절(Pentecost),대강절(Advent) 등이 있으며,그 중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절기는 대림절 또는 강림절로도 불리는 대강절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탄절을 4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待降節)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그 '오심'(降)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번째 의미 즉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나신,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현실이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이 그렇게 쓰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천년 동안은 그러한 뜻으로만 지켜 왔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典禮用語)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사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의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의 합성어로서,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실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이러한 점에서는 재림에 더 무게가 실리고,오심의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실에는 해당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신년설교. <새벽을 깨우리로다> | 절기별 설교

 

시편 46:1~7, 57:8

요즘에 우리 기독교 교회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하게 듣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Again 1907"입니다. 이 말의 뜻은 1907년에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한국 교회의 첫 번째 부흥 역사가 있은 지 금년이 1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그러한 부흥 운동이 100년 만에 또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도록 하자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100년 동안에 꾸준한 성장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었고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 성장 보다 많은 신자의 수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선교 국가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가장 위험했던 때는 핍박의 때가 아니고 교회가 부흥되었던 때였습니다. 부흥된 교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교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이 핍박의 시기에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교회를 다니려는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었지만 권력의 보호 밑에 있을 때는 오히려 신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던 역사를 기억합니다. 또 교인들이 가난했을 때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GNP 1만 불에서부터 교회 부흥이 멈추기 시작하더니 GNP가 2만 불이 되면서부터 서구의 교회들은 급격하게 교인들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은 관광용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예배당들은 교인들이 가난했을 때 헌금해서 건축한 교회들로서 교회 건축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한지 유럽 여행하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럽 여행의 대부분이 예배당 건축물 역사를 보러 가는 관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성전을 건축할 때보다도 비교가 안 되는 부유한 생활들을 하면서도 선조들이 가난했을 때 건축한 교회에 다니지도 아니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텅텅 비어있는 그 장엄한 예배당은 관광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허다합니다. 대한민국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절대 없기 때문에 "Again 1907"을 외치면서 이 나라에 영적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구약 성경 가운데 있는 40명 왕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던 왕, 다윗 왕과 히스기야 왕 때에 쓰였습니다. 시편 46편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기간 중에 생긴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던 것을 노래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의 도움은 새벽에 나타날 것을 조명했습니다. 또 57편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아굴람 동굴 속에 숨어있을 때 고백한 시입니다. 사울이 3천명의 정예 부대를 풀고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그를 찾아다닐 때 아굴람 동굴 속에서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나님의 구원이 새벽에 나타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Again 1907"을 외치는 우리는 어떻게 1907년에 그러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음의 시작은 지역적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복음을 들고 최초로 찾아온 것도 대동강이며 교회들이 처음 세워진 곳도 평양이고 최초의 신학교도 평양에 세워졌습니다. 1907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 전 1906년 평양에서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영적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새벽 기도 운동인데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영적 사역입니다.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박치록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합시다래." "그러지요. 나오시오." 그래서 둘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본 다른 집사님들, 교인들이 "아니, 두 분이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시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도 나가자." 그래서 장대현 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거룩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웃 교회가 무엇을 잘하면 샘이 나서 못 견딥니다. "우리도 하자."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경쟁적 새벽기도가 1906년에 이루어지더니 일 년 후인 1907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고 대한민국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gain 1907"을 원하는 영적 운동은 바로 새벽 기도의 회복이라고 판단이 되었기에 금년 갈보리교회의 표어를 "새벽을 깨우리로다." 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객관성 있는 이유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종교성! 우리 한국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쉬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그 당시 조선은 주변국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환경이 서구 사회에게 어떤 구원의 기대감을 갖는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 땅을 찾아온 서구의 선교사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고 하는 사회적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과거 종교로부터의 실망감입니다. 당시 불교와 유교의 나쁜 형향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어려움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한 암흑기에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자기의 모든 소원이나 억울한 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오게 되었다는 객관적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외부적인 조건으로 분명히 도움은 되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한국 교회 부흥의 첫째 이유를 저 같은 목회자에게 묻는다면 세계 어떤 나라 어떤 교회도 하지 않은 영적 운동인 새벽 기도 운동이 한국 교회 성장에 가장 기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고 답변합니다. 대한민국 교회와 같이 이렇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를 다녀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세계 교회의 역사의 성장 기록에 유래 없는 기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성경에서 밝힘으로 2007년 이 해가 "Again 1907"이 되도록 방향을 잡아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간 구원 사역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마태복음 4장 17절에 보면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비로소" 라고 하는 이 말은 그 전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였다."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말로서 '비로소' 하시기 전에 하시던 일을 살펴보면 됩니다. 바로 40일 금식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금식하고 기도하신 후에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라는 순서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무장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복음 전파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보면 제일 먼저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는 법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찬양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지혜는 기도문까지 작성해서 가르쳐 주셔서 지금까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정의할 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내 아버지께 기도하라."라고 기도의 방법론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왜 안 됩니까?" 물었을 때 "기도 외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수 없느니라. 기도 많이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이렇게 기도는 끝이 없이 예수님의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또 기도하는 방법에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 많이 안 해도 괜찮다." 누가복음 6장에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산기도 가셨습니다. 또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철야기도 하신 겁니다. 고민하면서 기도하신 것이 겟세마네 동산이십니다. 얼마나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는지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어 떨어지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이 누가복음 22장에 나타났고, 안수기도하신 것이 마태복음 19장에 나타나있고,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산 기도를 마치시고 그 다음에 제자 선택을 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도 기도로 끝을 내십니다. 누가복음 23장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금년에 이 기도에 가장 간절한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여기 현수막에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예수님이 바위에 엎드리셔서 애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기도생활을 하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새벽 기도의 어려움을 체험합니다. 하나는 현대 문화권입니다. 현대 문화권에서는 특징적으로 밤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농경 문화권에서는 해만 떨어지면 잠을 잤는데 지금은 일찍 자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당합니다. 12시가 넘어서 잔다고 할 때 문화인같이 취급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좀 늦게 일어나야 합니다. 밤에 하는 TV프로그램들이 심야 토론회 등 볼 것이 많게 만들어지고 있고, 지금은 24시간 영업도 얼마나 많아졌는지 모릅니다. 낮이나 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찍 잘 수가 없는 문화에서 자니까 새벽에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한 겁니다. 시간 관리는 누가 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우선순위에 놓고 생각해서 잠을 조금 일찍 자는 습관을 가진다든지, '열아홉 순정' 끝나면 바로 잔다든지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할 것 다하고 볼 것 다하고 언제 잠을 잡니까? 또 한 가지의 어려움은 바로 신체적 조건입니다. 사람이 잠이 든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잠을 자게 되어 있는데 내일에 대한 걱정과 미래 불안, 오늘 해결하지 못한 고민도 있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으니까 단순 생활이 안 됩니다.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머릿속에 해결해야 되는 문제도 많고, 그래서 몸은 누웠는데도 잠이 일찍 오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들로 끙끙거리다가 깜박 잠이 드는 시간이 새벽인 것입니다. 그 짧은 몇 시간 잠을 잘 자야만 이튿날 에너지가 생겨서 다시 활동할 수가 있는데 그 깜박 잠이 든 그 시간을 깨워서 나오려니 신체적 조건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도 밤늦게까지 심방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저도 여러분들보다 결코 일찍 잘 수 있는 문화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텍사스 휴스턴에서 미국 교회를 빌려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할 때 새벽기도를 하려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를 하는데 새벽 5시에 이 교회 건물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 큰 교회를 당신들은 아무도 안 쓰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실 하나만 주면 우리가 잘 쓰고 잘 정리하고 갈 테니 새벽 5시에 쓰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저를 쳐다보고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지금 새벽 5시라고 말했습니까, 오후 5시라고 말했습니까?" "새벽 5시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새벽 5시에 나오셔서 설교하실 겁니까?" "그렇습니다." "매일 나올 겁니까?" "매일 하겠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시려고 그럽니까?" "안 죽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미국 사람들은 꼭 서류를 해서 오거든요? 미국 사람들 서류 보관하는 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안 버립니다. 무슨 서류가 들어왔든지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때가 되면 탁 내밀면 꼼짝 못합니다. 미국 사람들과 동업, 거래 관계 하는 거 한국 사람들이 지는 게 뭔지 아십니까? 서류, 메모 한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가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 내밀면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집니다. 나중에 가서 의논해서 당회에서 내가 요청한 것을 저는 말로 했던 것을 "서류로 하라."고 해서 서류로 만들어 사인해서 보냈습니다. "네가 요청했다. 그래서 주겠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는 네가 책임져라." 그런 것입니다. "책임지겠다." 그래서 당회에 서기가 가져왔습니다. 장로입니다. 나한테 허락한다는 서류를 주면서 한 말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Paster Lee! 새벽 5시에는 하나님도 주무십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간이 제일 잠 잘 시간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이 새벽에 무슨 일을 하셨는가 보면 됩니다. 우선 오늘 성경 말씀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여기에 왜 이 "새벽" 단어를 썼습니까? 대낮도 있고, 정오도 있고, 저녁도 있고 얼마든지 24시간 시간이 있는데 왜 새벽이라고 했습니까?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왜 그랬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홍해 사건이 나옵니다. 애굽의 군대가 무섭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이기 때문에 갈 수가 없게 되자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아니,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물에 빠져 죽게 할 것이냐?" 며 원망을 할 때 말씀에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기둥,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다시 회복된 것도 새벽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다 새벽 시간에 멸망을 당하고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모두 새벽에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민족은 여리고성을 함락시켜야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지방은 식량 생산이 가능한 땅으로서 그곳에서 식량을 생산해서 먹고 살아야 만나가 끊어지고 가나안 땅 정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쟁을 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그 좋은 땅을 뺏기겠습니까? 그래서 성을 쌓고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시간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새벽입니다. "제 7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나라 이름은 야곱 개인의 이름입니다. 개인 이름이 영원한 국호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는데 천사와 씨름합니다. 야곱이 이겼습니다. 먼동 트기 전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고 떠납니다.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영원히 되어버린 겁니다. 새벽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새벽별"이라고 했습니다. 왜 저녁별이 아닌 새벽별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내가 새벽별을 주리라." 모두다 새벽 단어를 썼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다가 새벽 닭 소리를 듣는 순간 소스라쳐 놀라 영혼이 깨어나 통곡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무덤을 보려고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을 차지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부활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설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재림 주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새벽에 재림 주가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모두가 새벽을 초점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도 무엇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새벽을 잘 처리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 역사를 보면 "신라 전성기 때 새벽마다 불국사 종소리를 일찍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박정희 대통령도 혁명 일으킬 때 대낮에 일으켰다면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2시에 한강 다리 넘어오는 바람에 성공했습니다. 다 잠자고 있는 시간 아닙니까? 새벽을 이용해야 성공한다는 것은 마귀들도 알고 있습니다. 6 25 동란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미국 전쟁 역사상 최고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하와이 진주만 공격!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새벽 6시 그것도 일요일에 그 시간에 공격해야만 승리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확히 그 시각에 공격하여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진주만에 가보면 전쟁의 폐허상태 그대로를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재판하고 죽이고자 모의한 것도 새벽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절에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니" 마귀의 역사도 새벽을 이용할 줄 압니다. 오늘 성경 말씀 시편 46편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찬송가를 지어 독일 국민들에게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부르게 한 말씀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를 새롭게 한 사람이요 영국의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한 사람들인데 무슨 힘으로 했는가? 그들이 고백하는 말이 "나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하루에 새벽마다 2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 역사에 최초의 새벽기도 교인은 백홍준이라는 사람입니다.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고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처음에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의 역사가 중국 심양의 로스 목사 사택에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거기 가서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백홍준 전도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조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한국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공동 새벽기도 시작은 1906년 장대현 교회의 교인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은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는가 하면 그 기도의 영적인 힘이 그대로 전승되어서 오늘날까지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아니한 새벽기도를 대한민국 교회가 열심히 함으로서 세계교회 역사의 보기 드문 부흥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뇌의 기능이 최고의 역할을 할 때가 새벽 시간입니다. 또, 새벽에 죄 짓고 돌아다니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맑은 영혼을 가지고 가장 좋은 뇌의 역할을 가지고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께 나와서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서 국가, 민족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은 기도한 것은 절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다가 가장 필요한 시간에 나에게 응답하십니다. 성경에 보세요. "네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되었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님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있단 말입니다. 젊어서 기도 많이 드린 사람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게 되어있고 자손들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과 맞붙어서 괜히 시비 붙지 않기를 권합니다. 합당하지 않으면 그 화가 내게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모르니까 그러는 겁니다. 청년들이 왜 새벽기도에 많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거룩한 투자다. 네 생애를 가장 빛이 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자신 있다." 저는 강조합니다. 어쩌다가 청년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며 울고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실연당한 청년들이 많이 나오고 그럽니다. 어쩌다 교인들이 새벽기도 나오면 무서운 꿈을 꾸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새벽기도 강조하는 이유는 제 자신의 체험 때문입니다. 제가 계산해 보니까 50년 새벽 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가를 해보면 제 욕심으로 기도한 것은 안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 그것은 내 욕심의 기도였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은 내가 기도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모두 다 성취되었습니다. 제가 소명을 받았을 때 새벽기도하면서 제일 많이 쓴 단어가 "세계 선교"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제가 사춘기 때 그 단어를 가장 많이 쓰면서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그렇게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제가 11번 외국에 나가서 세미나와 부흥회를 했고, 금년에도 제가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고 내일 또 인도와 스리랑카에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때는 좀 힘들고 또 외국 나가면 음식 맞지 않아서 고생도 많이 합니다. 그럴 때는 속으로 '에이, 이번에는 좀 쉬면 어떨까?' 이런 생각하다가도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 "야! 네 입으로 말해놓고 왜 야단이야?" 하나님이 막 책망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최대한 제가 선교에 열심을 다합니다. 사실 만나보고 이야기해 보면 세계 선교의 열정에 대해서 저만큼 열심히 이렇게 하는 목사도 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나는 하나님과 약속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에서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저는 아주 답답한 게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보화, 보물 덩어리, 보따리를 하나님이 이렇게 딱 갖다놓고 우리들보고 "네 손으로 풀어서 가져가라." 그러십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새벽 기도가 더합니다. 그런데 왜 그걸 풀지 않는가? 어휴! 답답해 죽겠습니다. 왜 안하시는 겁니까? 새벽 기도 열심히 드리십시오. 기도는 너무나 소중해서 내 기도를 천사들이 금 대접에 담아 하나님께로 가져다 상달시킨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Again 1907" 뭐가 "Again"이냐? 평양에서 일어난 새벽기도 운동이 대한민국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지 않았느냐? "Again 1907"은 바로 새벽기도 운동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금년을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정했으니 여러분 일 년 동안은 시간을 잘 관리하셔서 2007년 에는 "Again 1907"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모두가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우리가 게을리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역사에서 보아왔습니다. 새벽기도 운동이 세계 교회보다 앞서가는 교회를 만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저희들이 기억하면서 "Again 1907"은 다른 것이 아닌 새벽기도로 이루어가는 한국 교회, 그리고 나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고난주간 주일예배설교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19년 신년 축하 감사 예배 기도문 ( 주일예배대표기도문)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또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감격을 맛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둡고 암울한 세상에 살지만

소망중에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새힘 주시고 격려해 주심으로

저희들은 위로를 얻으며

희망을 안고 새출발을 다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이제로부터 올해를 마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까지

우리의 이 다짐과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저희 교회를 복되게 하셔서

지난 해에도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게 하신

하나님!

수고하고 충성한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옵소서.

 

올 한해는 더욱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맡겨진 직분과 사명을

아름답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모든 기관과 부서들이

주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소서.

 

목사님을 더욱 강건하게 하셔서

교회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기에 부족함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마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이 민족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하시고

더 많은 사람이 주님의 도에 복종하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세계 열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높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이

귀하게 쓰임받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18년 고난주간 성례식예배 대표기도  (세례와 성례식)

 

 

저희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아버지, 오늘 고난주간을 맞아 거룩한 주님제단에 나와 고난당하신 그 모습과 의미를 묵상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영광과 찬양을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자 고난당하시어 저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참 생명과 자비와 평화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들 주님의 고난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를 외면한 채 인간의 욕심으로 방황하며 살아 왔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아버지, 이 시간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성례식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일평생 믿음의 길을 걸으며 형통의 복을 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성례식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성령으로 회복되며 게으르고 나태하였던 저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님과 동행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부르짖는 기도마다 응답받는 역사가 일어나며 영혼 구원과 오류동지역에서 주님의 사명 감당하는 모델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새 성전을 세우며 더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부흥하고 발전하는 축복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선우교회의 모든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합하여 선을 이루며 주님께 영광돌리는 교회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주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세례와 성례식을 집례하시는 서윤심 목사님께 성령이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마음 밭에 떨어져서 귀한 결실을 맺으며 은혜의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사정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님 있습니다. 어디에 있던지 주님께서 기억하여주시고 몸이 불편한 분, 주님의 피로 안수하여 치유하여주시고 다음에는 함께 은혜 받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드리는 예배를 온전히 받아주시고 주님께서 주장하셔서 마치는 시간까지 인도해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삶을 변화시켜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원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19년 신년감사예배설교 -믿음으로 승리하는 새해

 

 

 


제목 : 믿음으로 승리하는 새해

말씀 : 롬8:31~39

1.언제나 희망은 있습니다.

할렐루야! 또다시 새해가 시작되어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2019년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충만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승리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옆의 분들과도 새해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둡고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복된 말은 될수록 많으면 좋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말하는 사람 하기 좋아 좋고, 듣는 사람 기분 좋아 좋고, 또 자꾸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복된 말을 하면 마음이 그렇게 변화되어 그러한 삶이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주의 은혜가 가득한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데도 먹고 살기 힘들다. 취업난이 심각하다, 정치가 실종되었다, 농촌 상황이 너무 열악하다고 하고 또 서로 시기하고 비난하고 헐뜯는 등 너무 부정적이 어두운 말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암만 어려워도 옛날 전쟁 통에도 살았고, 독재정권아래서도 살았고, 배를 쫄쫄 곯을 때도 살았는데 지금이 그 때만 하겠습니까? 그때도 견디고 살았는데 이까짓 것 못 견디겠습니까?

더군다나 여러분, 아무리 상황이 힘들고 어렵고, 교회가 도전을 받고, 농촌의 실정이 점점 더 열악해져 간다해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를 가지고 계시고 언제든지 은혜를 베풀어 주실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모든 자에게 결국은 승리를 안겨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언제나 희망과 소망가운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슥4:7절 말씀을 보십시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무리 큰 산 즉 장애물과 방해꾼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앞에서는 산산이 무너져 평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얼마든지 밝고 일어서서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면 모든 어둠과 절망적인 것들과 근심걱정과 두려움과 추함과 약함과 마귀 사탄과 죽음의 권세도 다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 세상의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밝아온 이 새해에는 더욱 희망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구원과 반석과 요새와 빛이 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약함과 어둠과 추함과 악함과 유혹과 도전과 상황을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밝고 아름답고 복된 새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까?

3.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승리 할 수 있는 분명한 하나의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인 이상 우리는 결코 패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이면 하나님께 지키시고 인도하시는데 패배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사43:1절 보겠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상실하였었는데 우리를 끝내 버리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의 보혈로 구속하심으로 주님의 자녀된 지위를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시므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데 어찌 승리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부족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한번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 38,39절 보세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무슨 능력이나 권세나 무기나 협박이나 어떤 것도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한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감히 누가 주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빼앗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확실하게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주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약함과 어려움과 부족함과 죄와 유혹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주님의 자녀라는 것, 그래서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와 근심과 걱정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손잡고 나아갈 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31절 말씀 보세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감히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대통령이 내 편이 되고, 억만장자가 내편이 되고, 힘이 센 장수가 내편이 되어도 힘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든든한 백 하나 얻으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뇌물을 갖다 바치고 온갖 편의를 제공하며 어떻게든지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까? 또 높은 사람 하나 알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자랑으로 여깁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내편이시면 어떻겠습니까? 높은 사람 하나 알고 있는 것도 영광으로 여기고 자랑거리로 여긴다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영광이고 자랑이고 든든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시118:6절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이것도 다윗의 시편인데 여러분, 놀라운 고백 아닙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므로 누구도 나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인생길이 아무 어렵고 힘든 일 없이 그저 만사형통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도 있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살아남기 위하여 침을 질질 흘리며 벽에다 되지도 않는 아무 말이나 끄적이며 미친 사람 행세를 하는 굴욕적인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한 점은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시고 도우셔서 마침내 위대한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물론 힘든 순간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주저앉고 싶을 때로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끝내 주저앉힐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7절도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모든 일이 뭡니까? 앞의 35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즉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도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칼의 위험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런 것들이 결코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셔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말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힘주시고 은혜주시고 능력주시는데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빌4:13절을 보세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십시오.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과 환경과 상황에 얽매어 희망도 기쁨도 없는 것처럼 살지 말고 의욕적으로 긍정적으로 힘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좀 힘들다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기나 한 것처럼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직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힘차게 당당하게 생기 있게 살아가며 승리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하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심지어 죄 가운데 빠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뭐냐? 바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의 그러한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된 모습을 인정하고 그래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덧입어야 우리 죄를 가림 받고 그래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주님과 동행하면 그 작은 믿음 하나 보시고 우리를 끝까지 주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고, 그래서 천국백성의 지위를 유지하며 승리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35절,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또 37절도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즉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우리를 그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도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고,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도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님을 믿으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이니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겠으며 감히 누가 우리를 빼앗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실수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한탄하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죄 가운데 빠질 때가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주저 앉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계속해서 그 길로 가면서도 그게 마치 정상으로 착각하고 무감각하게 그 가운데 살면 안 되지요. 분명히 죄를 미워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향하여 힘써 나아가야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때때로 실수도 하고, 허물된 모습도 보이고, 심지어 죄 가운데 빠질 때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럴 때 낙심하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천국에나 가겠나, 이래 가지고 무슨 주님의 일을 한다고, 나도 똑바로 못하는 주제에 봉사는 무슨 봉사, 전도는 무슨 전도하면서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못한다고 여러분의 자녀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맨 날 속만 썩이고 다닌다고 버릴 수 있습니까? 잘 나도 내 새끼, 못나도 내 새끼, 잘해도 내 새끼, 잘못해도 내 새끼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근거를 여러분 자신에게 찾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또 끝까지 자녀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내가 똑똑하고 잘나고 깨끗하고 의롭고 아름다워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영광스러워서, 주님의 은혜에 백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어서 하는 것 뿐이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감사와 기쁨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심지어 죄악가운데 빠질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주님의 사랑으로 녹여 버려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놀라운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놀라운 특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셨고, 지금도 여전히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든든한 백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어둠과 약함과 죄와 유혹과 도전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세상의 안목으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도리어 십자가를 통하여 위대한 승리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혹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라도 그것은 단지 승리를 향한 하나의 작은 과정일 뿐 주님 안에는 승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새롭게 밝아온 이 한해도 아니 저 영원한 천국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유일한 구원과 소망과 능력과 반석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2018년 송구영신예배설교 - 복된 새해를 준비하며

 

 

 

제목 : 행복한 새해를 위하여

본문 : 시50:23

1.감사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에도 정말 믿음안에서 기도하며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인도하심과 축복하심과 보호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넘치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서로 한번 축복의 말씀을 합시다. 마음껏 서로를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과 기쁨으로 동행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이지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2019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1900년대가 익숙해서 구십 몇 년이라는 연도가 익숙한 것 같은데 벌써 2000대 즉 21세기가 19년이 지나 2019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빠르게 지나는 세월속에서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뭐 세월이 허무하다느니, 인생 뭐 별거 있나 그런대로 한 세상 살면 되지 하고 말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은 비록 빠르게 지날지라도 인생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또 때로는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마음적으로나 힘들 때도 많고, 또 이렇게 이렇게 했었더라며 하면서 아쉬운 것도 많지만 사실은 따지고 보면 감사할 것이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설령 지난 한해가 좀 힘든 일이 많았다 해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커서 그 모든 것들을 덮어 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요? 솔직히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한점 부끄럼없이 사는 인생이 누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나 혹은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아무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살아가는 인생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완전한 나라가 어디 있겠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온전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우리가 다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기도 하고 고달픈 인생길이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적으로도 이 정도면 살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귀한 자유와 평화와 질서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입니까? 전쟁이나 기근이나 테러가 없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영광드리며 살 수 있는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복받은 나라입니까? 물론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 때로는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낙심이 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것입니다. 아니 천문학을 훨씬 뛰어 넘는 것입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돈으로 수량으로 그 어떤 것으로 계수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지구나 태양에 값을 메긴다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 늘 들이마시는 산소나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물을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게다가 천국은 어떻습니까? 그걸 돈으로 환산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숫자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그대로 무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공짜로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 곁에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 곁에 있는 분들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독신으로 혼자서 편히 살겠다고 하는데 미련한 소리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보세요. 자기 혼자 가능한 게 몇가지나 있습니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혼자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 미련한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보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곁에 부모형제나 교우도 이웃이 있다는 것에도 정말 감사하고 서로 귀히 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국가나 교회나 학교나 직장이나 병원이나 무슨 문화시설이나 체육시설이나 상점이나 마을 공동체나 나라나 하여튼 모든 개인에게나 공동체나 기관에 대해서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것들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교회도 없고 학교도 없고 직장도 없고 병원도 없고 마을도 기관도 없고 상점도 없고 문화시설도 없고 나라도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누릴 수가 있겠어요?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보장받겠어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런데 서로 감사하지 못하고 그저 어떻게든지 서로 속이고 빼앗고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예요.

여러분, 오늘 말씀보세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무슨 뜻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냥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무감각하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감격하며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감사 자체가 제사라는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감사는 곧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주님 뜻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자신에게도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는 게 아니라 감사하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삶이 빛과 같은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밝아온 2013년도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귀한 자유와 평화와 질서와 은혜가운데 새해를 맞게 하신 하나님, 우리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로 채워주신 하나님,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신 하나님, 우리 주변에 많은 이웃들을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며 살아가실때에 주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주면서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시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가 두 번째로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는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1:7절을 보겠습니다. “수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는 역사의 전환점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시점에 정신적, 영적 지주로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인도해왔던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지도가가 되긴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행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홍해바다를 갈라 애굽의 군대에서 건져주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먹여주고, 메추라기 떼를 모아 고기를 먹여주던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만 이 모든 일들을 모세를 통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모세의 수종자로서 심부름 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여호수아에 대하여 신뢰를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가 강하고 강한 가나안 족속들과 일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본다면 정말 힘든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여호수아에게 힘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두려움없이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 가나안은 내가 너희에게 준땅이니 너희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들어가라. 너희들은 그저 나를 믿고 내 말을 따라서 들어가라. 오직 내 말을 의지하고 내 말을 신뢰하고 그 말씀만을 따라 살라. 그러면 너희들의 하는 일이 분명코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가는 길에 비록어려움도 있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의 어두운 세력들이 우리에게 덤벼들고 장난치고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다해도 그래도 우리는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사망 권세, 마귀 사탄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안에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느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따라 주님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스스로 따라 갈 수도 없지만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주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빛과 같은 은혜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 그 기쁨, 그 은혜, 그 평강, 그 위로와 소망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먼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돈이나 사람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주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인생의 발걸음을 한발자국 한발자국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모든 어둠과 유혹과 도전자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혜가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