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여러 가지 시험

 

 

 

야고보서 1장 2절


  
양을 키우는 목자는 염소를 함께 집어넣습니다. 양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두면 병에 자주 걸립니다. 이런 양들 가운데 염소가 있으면 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닙니다. 이때 양들은 뿔 달린 염소를 피해 도망 다니며 저절로 운동을 해 건강해집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을 강한 믿음으로 키우기 위해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에게 시시각각 찾아오는 여러 시험이 바로 우리 삶 가운데 염소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어느새 우리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는 은혜의 손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

사도 야고보도 같은 권면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2)

하나님의 모든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훈련을 위한 시험입니다. 첫째, 이런 시험이 오면 기쁘게 참고 감당해야 합니다. 믿음의 유익을 위한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도움 받을 사람도 만나게 하십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른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야고보서 1:12)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사탄의 유혹(야고보 1:13)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속지 말고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유혹이 찾아올 때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7)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를 타락시키기 위해 사탄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사탄은 그 사람에게 커다란 금덩이를 보여줬습니다. 그가 눈도 깜빡하지 않자 다음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냈습니다. 역시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그의 질투심을 자극했습니다. “당신의 경쟁자가 방금 자네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네.” 그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고 화를 내면서 자기 믿음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성장시켜 결국에는 큰 상을 주시기 위해 인생길에서 여러 가지 염소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는 은혜로운 기회로 삼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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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인생의 등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불빛이 하나도 없는 캄캄한 길을 걸어본 사람은 한줄기 빛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압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인생길도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성도들이 거짓과 악이 횡행하고, 공의를 분별할 줄 모르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걸음걸음을 인도하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굳은 믿음으로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기로 마음을 확정하였습니다. 사실, 시인이 걸어온 인생길과 신앙의 여정에는 평안하고 즐거운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도, 그 순종에 대한 커다란 보상이 오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주님이 보이신 빛을 쫓아 나갔지만,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원수들의 조롱과 올무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인에게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위한 여정일 뿐이었고, 그랬기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인생의 등이요, 빛입니다. 하지만 그 빛을 통해 너무 먼 곳을 바라보려고 하다가는 곡 넘어지고 맙니다. 캄캄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어두운 밤 등으로 발을 비추며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빛으로 한 걸음 앞을 비추고, 그 비추인 곳에 발을 옮겨놓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어떤 큰일을 할까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오늘 살아갈 이 하루를 온전히 주님께 드리겠다는 결심으로, 하루하루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아주 작은 일들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아져야 우리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인생의 걸음을 옮겨놓는 사람들을 막다른 골목이나 위험한 낭떠러지 앞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며 살기 원했던 인생을 뜻하지 않은 낭패에 부딪히게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말씀의 빛을 따라, 순종함으로 걸어가는 인생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아름다운 삶이 보장됩니다.

 

말씀의 빛이 없는 사람들의 인생은 캄캄한 어둠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련하게 행하고, 이리저리 부딪치며, 옳음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행한 목적지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진리의 빛에 힘입어 하나님의 인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진리의 빛을 쫓아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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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오늘의 큐티 <기다리는 지혜>

 

 

 

읽을 말씀 : 유다서 1:17-23

●유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세 명의 카우보이가 목초지를 향해 소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가무를 때여서 반나절이나 가야 겨우 푸른 풀밭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카우보이들은 소들을 잘 둘러놓고 근처 마을로 향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카우보이 두 명은 말을 타고 가며 지금 얼마나 배가 고픈지, 마을에 가면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을지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한 카우보이는 “나는 그다지 배고프지 않아”라고 말하며 묵묵히 말을 몰아 둘을 앞질러 갔습니다.
배가 고프다며 불평을 하던 두 카우보이도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고, 식당에 가자마자 가장 두꺼운 스테이크부터 시켰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프지 않다던 카우보이가 이미 도착해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두 카우보이가 놀리듯이 물었습니다.
“아니, 이보게 배도 고프지 않다더니 우리보다 음식을 더 많이 먹고 있는 걸?”
“먹을 것이 없을 때 배고파한다고 음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네. 차라리 말을 더 빨리 모는 것이 지혜롭지.”
모든 필요를 때에 맞게 공급하시는 주님이심을 믿는다면 불평보다는 항상 순종이 앞서야 합니다. 만나와 메추리를 공급받고도 불평하는 광야의 백성이 되지 말고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리는 에스더 같은 성도가 되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불만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소서.
요즘 마음에 불만스러운 것이 있으면 감사가 부족함을 깨달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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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 주일오후설교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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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 헌신예배설교( 가난한 여인의 믿음)

 


 


말씀 : 막12:41-44

제목 : 한 가난한 여인의 믿음

1.한 어린 소녀의 감동적인 순교 이야기

저는 오늘 먼저 여러분들에게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이 이미 목사님을 통해서 혹은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에 너무나 어울리는 이야기이기에 말씀드립니다.

이 사건은 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주의 리틀턴이라는 한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곳에 콜롬바인 하이스쿨이 있었는데 이 학교에서 마피아단원이며 히틀러 신봉자였던 학생 두명이 반친구들이 자기들을 왕따시킨다고 총기를 난사하여 교사 한명을 포함하여 학생 12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고,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끔찍한 사건 속에서도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17살난 캐시라는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그 참극이 벌어지던 그 현장에서 범인 한명이 캐시 앞에 총구를 들이대며 물었습니다. “Do you believe in God?” ‘너는 하나님을 믿니?’ 물론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그 여부를 알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같은 건 없으니 믿는다고 말하면 죽이겠다는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캐시는 침착하게 말합니다. “Yes, I believe in God.” ‘네,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그러자 범인은 총부리를 더 가까이 들이대며 소리를 쳤습니다. “There’s no God.” ‘하나님은 없단 말이야.’ 한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정말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캐시는 말했습니다. “Yes, There is God. And you must follow His path.”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범인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 했고, 결국 17살 소녀 캐시는 그만 피범벅이 되어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그렇게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듣다가 그렇게 용감한 신앙의 고백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녀를 기적적으로 살려주셨는지를 듣고 싶어 했을지 모릅니다. 마치 다니엘의 세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고 살아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의 병정들에게 붙잡히실 때 예수님은 열두 영도 넘는 천군천사들을 불러 그들을 요절 낼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녀린 소녀의 죽음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녀는 그렇게 주님 품으로 갔고, 그래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캐시의 한 친구가 이 아비규환의 현장속에서 가까스로 몸을 숨겨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가까스로 살아나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낱낱이 알렸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그 흉악한 범인의 총구앞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는지, 그러자 그 범인이 어떻게 악마처럼 캐시에게 총을 쏘아댔는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세상속에 알려지자 먼저 미국의 크리스챤 teenage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Yes, I believe in God.’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T셔츠를 입고 거리를 누비며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Yes, There is God.’ ‘Yes I believe in God.’ 한 도시에서는 3,000여명의 teenage들이 모여서 ‘Yes I believe in God.’이라는 주제로 집회를 열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집회는 많은 도시들로 번져 나갔고, 결국 잠들어 있던 미국 크리스챤들의 양심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께 헌신하기 보다는 그저 세상의 풍요로운 물질문명에 젖어 안락을 추구하던 삶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회개하고 헌신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한 어린 소녀의 믿음과 헌신이 잠든 미국 크리스찬들을 깨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나 큰 도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괴한이 총구를 겨누고 말합니다. “Do you believe in God?” 너 정말 하나님을 믿니? 그렇다면 내가 너를 죽이려고 하는 이 순간 네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속지마라. 하나님은 없다. 이 지금 차라리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라. 그러면 살려주마.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말합니다. ‘Yes, There is God. Yes, I believe in God.’ 하나님은 계십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신이 나의 육신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내 믿음은 빼앗지 못합니다. 당신이 총으로 위협해도 내 영혼을 강탈해 갈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주님이 내게 주신 영광의 나라는 빼앗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주님의 사람이라면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영원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만이 진정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평강이 있기에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누군가 우리를 총으로 위협해도, 혹시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이 와도, 혹시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긴다해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는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신앙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릴 때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뜨겁게 역사하셔서 성령의 은총으로 이런 믿음과 능력과 용기로 충만함을 덧입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여인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런 신앙의 고백으로 헌신하여 주님을 감동시킨 한 여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에 힘을 주고 보란 듯이 많은 헌금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라한 행색으로 부끄러운 듯 적은 헌금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주님의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한 특별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관대작의 부인도 아니었고, 유명인사도 아니었고, 절세미인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그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이 여인은 부끄러운 듯 헌금함 앞에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두 렙돈의 헌금을 하고는 성전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여인을 불러 세우고 흩어져 있던 제자들에게 불러 모아서 말씀했습니다. 4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흩어져 있던 제자들을 일부러 불러 모아서 여인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으셨으면 일부러 제자들을 불러모아서 이 여인을 칭찬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두 렙돈이 지금 돈으로 환산하며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것은 많아봐야 1,000원도 안되는 돈입니다. 렙돈은 당시 화폐의 최소 단위로 1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데나리온의 1/128입니다. 그러니까 하루 품삯을 50,000원으로 친다면 약400원정도 되겠죠. 그러니까 두렙돈은 약800원정도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천원도 안되는 헌금을 하는 여인을 보면서 너무나 감동을 받아 제자들을 일부러 불러 모아서 칭찬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그 해답은 44절에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요?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 그것이 이 여인의 전 재산이었다니까요? 그것이 이 여인의 생활비 전부였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주님께 그렸다니까요.

그러니 주님이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순진무구한 믿음의 헌신을 보며 어찌 감동을 받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를 드렸느냐가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몽땅 바쳤다는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인 것입니다. 여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것이 재산의 전부였는데요. 그것이 없으면 내일 굶어야 될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 비록 너무나 적은 돈이지만 이게 내가 가진 것의 전부입니다. 이걸 다 드리면 내일 어떻게 될지 나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런 하나님께서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런 믿음이 없이 어떻게 전재산을,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드리기는커녕 도리어 이렇게 원망 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도 정말 저를 사랑하시나요? 주님 나는 너무 가난합니다. 지금 가진 것이라곤 하루의 생활비밖에 없습니다. 나는 남편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나를 업신여깁니다. 그런데 주님, 왜 나를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내 처지가 너무 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정말 사랑하시기는 사랑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말입니다.

설령 그렇게 원망까지는 안할지라도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는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정말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 주님도 내 형편이 어떤지 잘 아시잖아요. 제게 있는 것이라곤 고작 800원 정도입니다. 이것은 오늘 내 생활비입니다. 그러니 이걸 드리고 나면 저는 굶어야 해요. 그러니 이걸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잖아요. 다음에 좀 여유가 생기면 드릴께요. 다음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드릴께요.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가난한 과부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다 맡겨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으로 믿고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기왕 믿을 바에야 이런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 상황이 이래요, 환경이 이래요. 전세돈도 마련해야 하고요,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 하고요, 애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요, 그래서요. 지금은 좀 곤란해요. 나중에 좀 안정이 되면 그때 할께요. 그때까지만 참아 주세요.

그러면 이건 뭔가 잘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신다 그랬잖아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나는 새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말씀하셨잖아요? 이런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못할 게 뭐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을 찾습니다.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보세요.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면 나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터치했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순진한 믿음으로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하는 고백을 했을 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며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는데 순진하게 그대로 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그냥 순진하게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은혜와 능력과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진하게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따르는 그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갓난아기처럼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이루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시37:5,6절을 보세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믿음으로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맛보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전적인 신뢰로 헌신한 여인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또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전적인 신뢰에 전적인 헌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에 자신의 것을 몽땅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뭐,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무엇에 정열을 바칩니까? 무엇에 시간과 물질과 힘과 지식과 재능을 투자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곳에 투자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고 가치있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자유와 평화를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완전히 신뢰하고 따라 갈 수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가장 귀한 분에게 어찌 가장 좋은 것들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가장 귀한 일에 어찌 우리의 정열을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바보가 이 귀한 일에 정열을 바치지 않고 별로 귀하지도 가치도 없는 일에 인생을 바치겠습니까? 어찌 이 좋은 일에 몸과 마음과 시간이 가지 않겠습니까?

어떤 작은 시골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날 웬일인지 이분이 교회를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다 마치고 목사님이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 글쎄, 이 분이 오이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이 안타까워서 ‘집사님, 어떻게 된 겁니까? 주일날 이렇게 오이밭에서 일을 하고 계시다니요?’ 그러니까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너무 바빠서요. 오늘은 교회에 가면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이 오이밭에 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려면 차라리 몸은 오이밭에 있고 마음은 예배당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여러분은 어떤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몸은 밭에 있어도 마음은 교회에 있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몸은 교회에 있고 마음은 밭에 있는 것이 낫습니까? 낫기는 뭐가 낫습니까? 둘다 틀린 거지요. 마음이 있으면 몸도 가고, 몸이 가면 마음도 같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제가 지금 바빠서 교회일을 잘 못하는데요 그래도 마음만은 늘 교회에 있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다. 정말 마음이 있으면 몸도 시간도 물질도 정열도 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아니 정말 사랑하는데 몸이 안갑니까? 시간이 안갑니까? 물질이 안갑니까? 예수님께서 마6:21절에서 뭐하고 하셨습니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바꾸어 말하면 네 마음이 있는 곳에는 네 보물도 있느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가난한 여인은 하나님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감사와 가쁨으로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생명이요 나의 기쁨이요 내 인생전체를 책임져 주실 분이기에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완전힌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 헌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 뿐 아니라 이 보화를 발견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전 생애를 주님께 드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은혜를 누리며 살지 않았습니까?

저는 구약성경 중에서 정말 하나님을 갓난아기처럼 신뢰하고 믿고 따른 두사람을 찾는다면 물론 많은 위대한 신앙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노아와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노아 할아버지를 보십시오. 그는 천하를 다 덮어버릴 비를 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20년이나 그 날을 기다리며 배를 만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순진한 믿음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헌신입니까? 여러분, 그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아니 전세계를 쓸어버릴 홍수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니 처음에는 믿었다해도 어떻게 비는 올 생각도 안하는데 120년동안이나 그 말씀을 믿고 배를 지어요? 1년, 2년, 10년, 20년, 50년, 100년을 지나면서 얼마나 많은 시험이 있었겠으며, 얼마나 조롱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끝까지 갓난아기와 같은 순진한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헌신했습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비웃고 조롱하거나 말거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냥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거기에 걸었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정열과 물질과 청춘을 거기에 다 바쳤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멸망당하는데 그 가족만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입니까? 아니, 다 죽고 노아의 여덟식구만 살았다니까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이 그를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결국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지시를 내리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 아닙니까?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놓고 25년이나 지나서 겨우 이삭하나 주시더니 그나마 그 자식을 동물을 잡듯이 잡아서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리라니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없이 드립니다. 그건 정말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누가 자녀의 생명을 달라고 할 때 차라리 나를 드리겠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겠지. 하나님이 나를 해롭게야 하실라고, 하나님께서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분명 무슨 다른 뜻이 계시겠지 하면서 그냥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오히려 ‘아니 재가 정말 제 자식을 번제로 드리려는 거야.’ 하면서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도 살고 자손이 하늘의 별과같이 번성하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어땠습니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자신의 전생애를 완전히 바쳤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에 비하면 세상의 것들은 배설물과 같이 여겨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자신의 전생애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하고, 순진한 믿음을 가졌으면 당연히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라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천하보다 소중한 것이라면 생명이라도 내 놓으라면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분명히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있을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제 간증을 잠깐 해도 되겠습니까? 저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입니다. 그러나 군에서 전역하고 곧바로 포스코에 입사하여 1979년에 이곳에 내려왔으니까 벌써 경상도 사람된 지가 32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게 포스코에서 12년을 근무하다가 그만 두고 목사가 되었는데요, 저는 결혼을 하고 아내를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하면 한번 나가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저에게 큰 시련이 왔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시련이 있었지만 더 큰 시련은 아들을 통해서 왔습니다. 큰 아들이 5살 때 큰 질병에 걸려 포항성모병원에서 한 달여 동안 치료를 했지만 도무지 차도가 없어 결국 서울대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만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 이 아이만 고쳐주십시오. 그러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내 놓으라면 내 놓겠습니다. 제게 주신 모든 것 송두리째 바치라면 바치겠습니다. 아골골짜기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도 가겠습니다.’하면서 새벽마다 울며불며 기도했습니다. 한 밤중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회사에서 퇴근해서 오는 길에 교회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아이는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라도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하면서 눈물 흘려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간절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뜨거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던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내 남은 생애를 다 주님께 드리기로 하고 저는 사표를 내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약하고 간사하고 부족한 게 인간이더라고요. 그렇게 기도하고 결단을 하였지만 저는 몇 달 동안 갈등을 겪었습니다. 막상 사표를 내려고 하니까 정말 막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내의 반대도 심했고, 솔직히 저도 가장으로서 걱정과 염려가 몰려 왔습니다. 저는 솔직히 유산이라고는 땅 한평, 단 돈 몇 십만원도 받지 못했습니다. 신혼생활을 월급타서 모은 돈 50만원으로 연탄 온돌 단칸방 전세부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자다가 한번은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도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일 큰 걱정은 아이들 교육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새벽마다, 밤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더욱 온전한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케 해주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그리하여 결국 1992년, 우리 큰 아이가 초등학교3학년 때 사표를 내고 몇 년간의 신학수업을 거쳐 목사가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정말 갓난아기처럼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맡아주십니다. 저는 그것을 진실로 경험했습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 이 길을 왔을 때 주님께서는 제가 했던 염려와 걱정들을 말끔히 씻어주셨습니다.

가장 큰 염려였던 아이들 교육문제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셨습니다. 저는 늦게 목회를 시작하여 신학공부도 많이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시골목회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열명도 안되는 깡촌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한 학년에 대여섯명 밖에 안되는 깡촌학교에 다녔습니다. 물론 과외는 꿈도 못 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돈 별로 안들이고 교육을 모두 마쳤습니다. 큰 아들은 여기서 가까운 일류대학에서 무료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지금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모회사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얘는 초등학교때부터 석사과정까지 등록금은 한 푼도 안내고 공부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때까지는 등록금 안내고 다녔고 지방 국립대학을 다녀 그렇게 많은 돈 안들이고 작년에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하여 성실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큰 녀석은 지난 7월에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랑하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후회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둘만 낳을 게 아니라 야곱처럼 한 열두명은 낳는 건데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경주시민 교회 성도여려분,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1,2여전도회원 여러분,

주님을 믿으십니까? 네,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기왕 믿으실바에야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탁 맡겨버리고 그저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부분들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 용기있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위에 놀라운 생명의 역사,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과 우리 경주시민교회위에 이런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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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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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말씀 : 성령강림절설교] 성령 받으라

 

 

 


제목 :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 : 행7:54~60

 


1.왜곡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러디어드 키플링이라는 사람의 작품 중에 정글북(The Jungle Book, 1894)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만화영화로 제작(1967년)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인도의 정글을 탐사하던 한 부부가 아기를 잃어버려 정글 속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는데 흑표범 바기라에게 구출되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늑대들은 이 아이에게 모글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며 양육하여 모글리는 늑대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모글리가 소년이 되었을 때 평화롭던 정글에 인간을 극도로 싫어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호랑이 쉬어칸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늑대들은 모글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이미 동물과 같은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글리는 정글에서 살고 싶어서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자 쉬어칸이 모글리를 해치려고 찾아다니는데 다행히 회색곰 발루의 도움으로 모글리는 위험에서 벗어나 결국 인간 마을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 한동안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정글에서는 폭군 쉬어 칸이 횡포가 점점 심해져 동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마을까지 내려와 가축과 사람을 물어가는 만행을 저지르자 모글리는 다시 정글로 돌아가 쉬어칸을 해치우고 정글의 영웅이 되어 평화로운 정글을 만듭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다시 인간마을로 돌아와 인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서로 속이고 빼앗고 싸우고 죽이는 등 힘 있는 자들의 탐욕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있는 사회악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협력하는 곳에 행복이 있음을 보여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이러한 일반적인 교훈 말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글리는 왜 늑대인간으로 살아야 했는가 하는 것과 왜 인간들은 그렇게 끊임없는 탐욕 속에서 서로 속이고 빼앗고 죽이고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환경 때문입니다. 모글리는 늑대와 함께 늑대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에 늑대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싸우고 빼앗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무지 속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기쁨과 행복이 있는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왜곡된 세상에서 그러한 어둡고 왜곡된 세상을 보고 듣고 배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물질만능주의적인 왜곡된 인생관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있기 때문에 온갖 부조리와 불의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자칫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옳은 것인 양 착각하며 그 쪽으로 끌려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롬12: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이 너무나 왜곡되고 부패되고 혼동 속에 빠져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오직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하고도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성령충만하면 모든 것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야 죄와 무지가운데 육신의 욕망을 끌려 살아가지 않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축복의 길을 바르게 알고 그 길로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능력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으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바르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 길로 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생명의 길로 갔던 스데반집사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러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하나님 우편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굉장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때가 언제입니까? 행7:58절을 보겠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러니까 이때는 스데반집사가 복음을 전한다고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붙잡아다가 공회에 세우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모함하여 이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이 변론을 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며 죽이려고 덤벼들어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맙니다. 이와같이 복음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이 때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돌로 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순교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6:15절을 보면 이 변론이 있기 전에 그가 공회에 앉아 있을 때에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데반 집사님은 공회에 붙잡혀 와서 자기를 죽이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얼굴이 천사처럼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국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리어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으로 가득 차니 근심이나 걱정이나 불안도 사라졌습니다. 눈 앞에 다가온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사라지고 도리어 그들이 불쌍하고 가련해져 그들을 향해 저주나 욕설을 퍼붓지 안하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유혹도 미움도 원망도 증오도 불평도 다 이기게 됩니다. 환경도 상황도 마귀사탄도 핍박도 다 이기게 됩니다. 자신의 약하고 부족한 것도 이기게 됩니다. 세상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이 덤벼들지도 못하고 설령 덤벼들어도 성령의 능력으로 단번에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행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숨고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목숨을 바쳐 주의 복음을 전하는 능력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묵상하며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과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고 승리하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충만하면 밝게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능력있는 삶이 될 뿐 아니라 그 인생이 밝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행6:15절을 보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성령충만한 스데반은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이 어떻습니까? 아름답고 밝게 빛나고 깨끗하고 순진하고 선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당시 스데반집사님은 만사형통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도리어 공회에 잡혀 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평강의 영, 능력의 영,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그를 사로잡음으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그 심령속에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도 얼굴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밝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얼굴에 웃음이 있고, 말도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찬송도 기왕이면 밝고 힘차게 하고, 여하튼 모든 영역에서 밝게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속으로 ‘아이구 목사님 뭐 좋은 일이 있어야 기쁘게 살지요. 촌에서 무슨 그렇게 좋은 일다고 기쁘게 즐겁게 삽니까? 형편도 상황도 조건도 뭘 그렇게 좋다고 항상 웃으며 삽니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만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사도바울만 하겠습니까? 스데반 집사님과 바울 사도나 우리들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매를 맞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와 강에서 고난을 당하고 강도를 만나고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질병까지 있었지만 항상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2:17절에서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살전5: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성령님이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이 얼마나 흡족해 하시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탄식하고 원망하고 슬퍼하고 뭔가 그늘진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축 쳐져서 감사와 기쁨도 모르고 탄식하고 원망하고 무언가 한이 맺힌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런 자녀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성령안에서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가 행복합니다. 내 가족이 행복합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교회를 밝게 만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면서, 불평 불만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져서,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얼굴이 사나와져서 전도를 한다면 누가 그 전도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 자기 자신이 기쁨이 없는데 무슨 천국을 말하겠어요. 원망과 불평 탄식 비판하면서 무슨 하나님 나라를 말하겠습니까? 평안과 기쁨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천국이 있다고 전도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먼저 내가 기쁘게 밝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면 입으로 전도하지 않아도 전도가 됩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는 삶은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삽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고 환경이 좋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으로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여러분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만드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성령충만하면 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5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가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 어디를 보았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셨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빛나는 모습이었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겠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무슨 미운 감정이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이를 갈며 덤벼들었지만 스데반은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곧 이 죄많고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저 영광스러운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죄와 무지와 미움 속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 동족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기뻐하면서 영광스러운 주님 품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위를 바라보면 문제는 끝납니다. 문제는 아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정말 별거 아닌 땅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고, 땅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엣 것은 본래 문제가 많습니다.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나도 너도 상황도 환경도 조건도 인간도 동물로 식물도 자연도 다 온전치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습니다.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점점 우리를 옭아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키고 서로 속이고 빼앗게 만듭니다. 그래서 행복은커녕 점점 더 갈등과 고통과 아픔과 불평을 야기 시킬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과 목적과 위안거리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망과 낙심과 불평 밖에 남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 영광의 나라에 우리의 진짜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상황이 꼬이는 것처럼 여겨질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좀 미운 마음이 생기려고 할 때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절망감이 찾아오려고 할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세상이 원망스럽고 불평 불만이 찾아오려고 할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위로와 평강과 기쁨과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금 힘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면 영광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 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인생, 썩어 없어질 것들이 있는 땅엣 것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소망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여건을 이기고, 모든 부정적이고 칙칙하고 어두운 세력들과 모든 미움과 원망과 불평도 이기고 주님 안에 있는 빛과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진정으로 생기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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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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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 새롭게 태어나는 것 


 


 


말씀 : 딤후3:15-17

제목 : 거듭남의 방법(1)

지난 시간에 우리는 거듭남의 의미에 대하여 보았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이 온전히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 죄인인 인간이 죄인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어불성설이다. 오직 생명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오직 온전한 권능과 지혜와 사랑과 은총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과 권한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따르라. 그분의 전권을 믿으라. 그분의 구원의 은총을 믿으라. 부족하여도, 어리석어도, 미련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의심하지 말라. 물론 부족하고 연약할 때 심지어 죄 가운데 빠질 때 우리는 철저히 회개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런 가운데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더욱 구원의 확신과 기쁨과 은총가운데 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이 구원의 은총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되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물론 이미 수차례에 걸쳐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였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1.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믿어야 한다.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먼저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무엇으로부터 믿음이 출발된다고 보는가? 왜냐하면 만약 성경에 대한 믿음 즉 성경이 정확무오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만약 성경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고 믿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식대로 믿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직 성경 안에서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랑과 은총과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오직 성경에서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믿음의 기초이고, 믿음의 출발점이며, 믿음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러하기 때문에 그 말씀만이 진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경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공해주는 책으로 믿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말씀들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순종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속에는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지, 성경의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먼저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하는 것은 오늘 16절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가감없이 오류없이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직접 쓴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같은 인간이 쓴 것이라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인간의 말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령님께 붙들린바 되어서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글씨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불러 주는대로 아들에게 기록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유언장에 있는 내용은 누구의 말인가? 비록 쓰기는 아들이 썼지만 불러주기는 아버지가 불러 주었으니 그 말은 아들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인간을 선택하여 성령으로 사로잡아 당신의 뜻을 전해주어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완전히 질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다른 개념이라서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천국과 지옥 등등의 영적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2:13에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 즉 하나님께 관한 일, 구원에 관한 일은 세상의 이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에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인류에게 유일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으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진리이며, 책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서 감히 내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과학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순진무구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더욱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창조와 주권을 믿어야 한다.

그 다음에 믿어야 할 것은 물론 하나님이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쉽게 말하며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과학과 정신세계를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그릇에는 도무지 담겨질 수 없는 그야말로 무한히 크고 영원하고 지혜롭고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과학이라는 그릇에 담겨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도구로 그 분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면 천날만날 애써봤자 절대로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 우리 눈을 보자. 인간의 눈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눈이 아무리 밝은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세균들은 인간의 눈을 아무리 부릅뜨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음식을 썩게 만드는 세균을 눈으로 확인하고 잡아죽이겠다고 천난만날 썩은 음식물을 들여다보아도 냄새만 나지 세균을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인간의 눈은 적당한 광도가 있어야 물체를 식별한다. 너무 어두우면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보지 못한다. 그런데 밝다고 다 잘보이는 것은 아니다. 밝아도 적당히 밝아야 한다. 여려분, 태양을 직접 볼 수 있는가? 한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가서 한번 보라. 몇분만 지나면 시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태양은 인간의 눈의 한계를 벗어난 밝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의 눈을 너무 어두워도 보지 못하고 반대로 너무 밝아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이나 지성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과학과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그릇에도 담을 수 없을만큼 너무 크고 너무 밝고 너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날만날 연구해봐야 보이는가? 들리는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없다고 말할 수 밖에....... 그러나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은 마치 두눈을 부릅뜨고 썩은 음식을 쳐다보면서 내가 아무리 봐도 병균이 없으니 이곳에는 틀림없이 병균이 없다고 우겨대는 것과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항상 이점을 생각하라. 우리의 이성과 과학과 지성과 경험과 정신세계로 보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절대로 못본다. 영성으로 보라. 영성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오직 성경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라. 세균을 보려면 현미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보려면 성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보라. 그러면 분명 보인다. 들린다. 영광의 나라가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덮어놓고 그냥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는 성경책이외는 다른 증명할 방법이 없는가? 아니다.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우주만물이 곧 하나님 존재의 증거이다. 우주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는 모든 물질세계나 모든 생명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드리면 과학에서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면 어떤 폐쇄된 공간속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불변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물질이나 에너지도 자연적으로 없어지거나 생겨날 수 없고, 자연적으로 감소되거나 증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형태와 모양은 변할 수 있고, 그래서 한쪽의 에너지가 감소되거나 증가하면 반대로 그 만큼의 다른 에너지가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는 있어도 그 총 에너지의 양은 항상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처음에 없었던 것이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있었던 것이 저절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가? 그런데 우주는 존재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저절로 사라져 버릴 수도 없는데 분명 우주는 존재한단 말이다. 분명 어떤 물질이나 생명이나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저절로 사라질 수도 없는데 이 신비한 우주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신비한 생명체는 엄연히 우리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냥은 있을 수가 없는데 있단 말이다. 분명히 그냥 생명체가 생겨날 수 없는데 이 신비한 생명체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이외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과학에서도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폭발설을 주장하고, 생명체에 대해서는 진화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과학에서는 우주는 처음에 무언가 초고밀도의 특이점이 있어서 이것이 대폭발을 일으켜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말도 안된다. 그렇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데 그 초고밀도의 특이점은 처음에 도대체 어떻게 해서 존재했단 말인가?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저절로 사라질 수도 없고 자기들 스스로 말해놓고 그럼 어떻게 그 특이점은 존재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또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이 우주의 신비한 질서가 어떻게 저절로 형성 되었단 말인가?

또 생명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진화론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말도 안된다. 처음에 어떤 생명체가 저절로 생겼다고 하는데 과학의 법칙에 의해서 어떤 유기물로 저절로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해도 그것이 자꾸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말도 안된다. 과학의 유전의 법칙에서도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만이 유전된다. 그러니까 부모대에 가지고 있지 못한 유전자는 저절로 생길 수가 없다. 그렇다며 처음에 생겨난 그 어떤 원시적인 생명체에 지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십억개의 유전자가 있었단 말인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인간이었어야지 어떻게 원시생명체로 남아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이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존재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이는 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없이는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우주와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물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해와 달과 별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그리고 땅위의 식물들을 그 종류대로, 새들을 그 종류대로, 물고기를 그 종류대로,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고 그리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함으로 창조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가 동시에 증명된 것이다. 즉 우주의 존재, 이 신비한 생명체의 존재, 그리고 거기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증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두가지를 분명히 기억하라. 우리는 성경을 바로 믿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믿으라. 그대로 순종하라.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지 말라. 오직 그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의 길을 찾으라. 믿고 따르라.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라.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라.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라. 그래서 우주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또한 그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성경의 말씀들을 온전히 따라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온전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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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주일낮예배설교 언제나 소망은 있습니다

 

 

 

제목 : 언제나 소망은 있습니다

말씀 : 애3:19~26

 

1.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근간에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농어촌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인데 농촌사회가 초고령화, 동공화되다보니 교회도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천국으로 가시는 분은 많고 들어오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지난 1월 말에는 정병호 장로님이 소천하시고, 지난 주에는 최윤익 집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 8년 좀 넘었는데 제가 직접 장례예식을 치러드린 분이 15분이고, 그밖에 우리교회 다니시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 소천하신 분이 너댓분이 계셔서 약 20명 정도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큰 교회라면 20명이 적은 숫자인지 모르겠지만 전체성도라야 50여명 정도인 교회에서 20여명은 40%에 해당되는 수치이므로 큰 수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성도님들 중에도 연로하시거나 육신의 질고 또는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도 많습니다. 이재성도는 지난해 10월에 쓰러져 지금까지 넉 달 이상은 누워계시고, 지난 주에는 김춘옥성도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깨관절을 크게 다쳐 인공뼈를 넣는 대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고상진집사님도 건강이 좋지 못한 가운데 있고, 김병철집사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이 약하여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김춘옥 성도님과 이재 성도님 문병을 다녀왔는데 김춘옥 성도님은 적어도 몇 개월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고, 이재성도님은 의식은 회복한 것 같은데 본래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분이라서 사람이 가면 그저 힘없이 손을 겨우 잡고 아는 것 같은 반응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 날 중환자실에서 면회를 하고 나오려하는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저를 계속 응시하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 기도 시간에는 얼마나 울면서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셨는데 이 불쌍한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 하십니까? 하나님, 이 불쌍한 사람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노라면 정말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 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애3:49,50절에 보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를 기다리며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지금은 고난속에서 그저 기도하며 눈물 흘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날이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낙심하며 눈물 흘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머잖아 절망의 그림자는 물러가고 마음껏 감사와 기쁨과 은혜의 찬양을 할 수 있는 날이 곧 다가옵니다. 혹시 조금 시간이 걸린다해도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고, 그날이 오면 모든 아픔과 고통과 절망의 탄식소리는 사라지고 기쁨의 찬가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35: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과 고통이 그들을 짓누르고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해방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맹인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리며, 저는 자들이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떤 사나운 짐승이나 근심 걱정 염려 불평 탄식거리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춤추며 찬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은 광야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가기까지는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탄식이 변하여 기쁨의 함성이 되며,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어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그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혹 힘든 순간이 있더라도 그저 겸손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제들을 반드시 이기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현실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자연도 온전한 상태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갖 거짓과 폭력과 질병과 전쟁이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도 상당히 왜곡되어 온갖 자연재해와 질병과 기근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만든 온전치 못한 문명의 이기들이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온전치 못함으로 사람과 자연과 문명의 이기들을 통하여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받을 때가 너무나 많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 현실을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러분, 보십시오. 21절에 보니까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소망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마음에 담아 둔 것이 뭡니까? 내 고초와 재난입니다. 그래서 울며 탄식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소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소망이 생겼습니까? 22절, 24절에 있습니다.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즉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전히 진멸 된 것은 아니어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살려주셨고, 그 자비와 긍휼로 이후로도 우리를 살려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고난의 현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작에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그런 은혜로 우리가 진멸당하지 않고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천배만배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고난을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욥의 고난과 억울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엄청나게 받아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천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는 거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열명의 예쁜 자녀를 둔 다복하기 한량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졸지에 폭삭 망했습니다. 세상에 망해도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고, 원통하고 절통해도 이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재산은 몽땅 빼앗겼습니다. 열 명의 자녀가 하루 아침에 모두 죽었습니다.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며 죽으라면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온 몸에는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몸을 긁고 있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도 한때는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죽어서 나왔더라면, 내가 낳던 날이 없었더라면, 내가 낳던 날에 빛이 없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게 생명을 주셔서 이 험한 꼴을 보게 하셨는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참담하고 캄캄하여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면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그렇게 끝내 무너져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의인이 아니지요. 욥23: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눈도 귀도 마음도 어두워 하나님을 보이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정금같이 나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고, 마침내 시련의 기간이 끝나자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이라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만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현실이 어렵고 낙심이 될 때에라도 그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저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소망 중에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길이 보입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24~26절을 보겠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비록 고난의 현실이 쑥과 담즙처럼 쓰고 아프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으로 나는 여호와를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선하시기에, 여호와께서는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므로 분명히 긍휼히 여기사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잠자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그 작은 생각과 이성과 판단으로 함부로 떠들어대지도 않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원망과 불평과 좌절 속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구원과 섭리를 믿고 조용히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꽤 오래전에 미국에서 15살 난 한 소녀가 심한 구타를 당하여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목격자가 나타나 래리 밀러라는 사람을 지목하며 이 사람이 사건 현장에서 그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래리 밀러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시간에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뚜렷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아 이 목격자의 증언으로 래리는 3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질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한 목사님의 편지 중 한 귀절에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은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위로를 받은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성실하게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교도소에서 실시하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러자 몇 년 후에 그의 신실한 믿음과 열정이 인정되어 성경공부반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도소 내에서 실시하는 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죄수들도 열심히 가르쳐 많은 사람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과 중등과정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며 사는 동안의 그 자신도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2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진범이 체포되어 래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무려 12년 동안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정말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출옥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만 알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타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안에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 나갔을 때 결국 그는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심히 왜곡되고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현실 속에는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분통이 터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의 순간에도, 아무리 절망감이 짓누르는 순간에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분명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겸손히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주님의 뜻을 물으며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하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주의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된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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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십자가 신앙과 부활

 

 


제목 :  십자가 신앙과 부활
성경 : 누가복음 24장 25∼35절

무언가를 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위해선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눈을 감고 움직이면 여기저기 부딪치게 돼 생활하기가 매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영적인 안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본문엔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가 나옵니다. 둘의 차이는 큽니다. 닫힌 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죽음, 실의와 좌절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이 열린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천국, 생명, 기쁨,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안으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닫힌 영안은 세상적인, 자기중심적인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눈엔 십자가형을 받은 나사렛 목수가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열린 영안에는 부활한 예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메시아 예수가 보입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 곁에서 대화하는 것은 영안이 열릴 때나 닫힐 때나 똑같습니다만, 예수님이 보이고 깨달아지는 건 닫힌 영안이 열릴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깨달음이 있길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 바로 예수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은 “빈 무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생명과 부활과 대속의 신앙이 됩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가 부활했습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고치시다가, 끝내 주님 스스로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피터슨 스미스는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다만 불신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사복음서 안에 쉰여덟 번, 사도행전에 스물두 번, 바울 서신서 안에 육십 번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로마 시대의 정치가, 역사가들도 예수님의 사심을 문헌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다투어 예수님의 사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체험했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쁘게 순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기원으로 합니다. 부활의 믿음과 그 신앙으로 우리는 생의 갖가지 좌절과 낙심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과 그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패배치 않게, 낙담치 않게, 실망치 않게, 분노치 않게, 격동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으며 전진하는 우리들은 사건 앞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슬픔을 찬송으로 바꿉니다. 그것을 우리는 욥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바울에게서, 요한에게서, 빌립에게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느 곳에 있던지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건이 2000여년 전 오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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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율법은 거룩합니다 

 

 

 

율법은 거룩합니다
(로마서 7장 7-12절)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 율법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시기에 선하시고, 좋은것 주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일깨움을 주는 귀한 것이다.

   율법은 죄가 아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있다.

 

 2. 율법이 있기에 유익한 이유, 목적은 무엇인가?

   율법은 우리 죄의 척도로 주셨다. 죄의 잣대로 주셨다.

   율법은 죄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마음 속에 좋지 못한 욕구를 재촉한다.

   율법은 죄인을 죄인 되게 한다.

 


 3.율법은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고 세상 사람들은 죄로 여기지 못하는 것을 죄로 깨닫게 된다.

 

 4. 마음으로 탐하는 것 자체도 죄이다.

    마음과 생각으로 욕심을 품었던 것도 죄이다.

    영적인 교만을 깨트려야 한다.

 
 5.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심은 우리에게 죄의 기준을 알려주심이다.

 

 6. 율법을 악으로 이용하는 것은 죄의 문제이지 율법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율법을 가지고 왜곡하여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이 문제다.

    율법으로 죄의 유혹을 부축이는 사단의 모습에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7. 죄가 기회를 타서 내속에서 바르게 서지 못하여서 죄가 활개치게 되고, 내마음의 선을 빼앗아가고 죄의 길로 걸어가게 한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8. 내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언제나 죄의 유혹은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을 예수님으로 가득해야 한다.

 

 9. '아이 나 같은게 믿어 뭐해'라고 생각하며 죄인을 정망가운데 이르게 한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율법앞에 서면 깊은 절망가운데 이르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10.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인생의 참 빛으로 깨달음으로

    내 안에서 말슴이 살아나야 한다.

 

 11.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모든 것을 내어 보여야 한다.

     은혜 없는 자는 내가 스스로 된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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