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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수난

사도 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의 진정한 뜻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의 정의를 내려 보라. 이것에 대한 정의를 내린 다는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수많은 이단 들의 출현을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그런 이단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에는 율법에다 믿음이 보태어진 다름 복음이 있었고 그 이후에 우후죽순 처럼 교회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믿음에 안식을 보탠 안식교 하나님의 교회라는 집단은 안식일 뿐만 아니라 유월절 까지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구원파는 믿음과 거듭남을 구별해서 믿음에 거듭남을 보태야 온전히 구원된다고 가르치고 다락방에서는 믿음만이 부족하므로 거기에 예수 영접이 보태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박옥수 파에서는 믿음에다 의인됨을 덛 붙이기도 한다. 그 모든 이단들이 예수 믿음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목숨바쳐 피력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 지는거다. 그 불안한 마음에 자꾸 뭔가를 보태고 있는거다. 정통이라고 하는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과연 정의를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옳게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섰는데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 불법을 행하던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렇게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성경은 분명 참 믿음은 무엇이며 잘 못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눅8:28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 소서 하니 , 이거 누가 한 말 이죠? 귀신이 한말 이다. 그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런다. 그 귀신은 하나님을 가르켜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그랬고 여기서 지극히 높다라고 하는 것은 최상급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것도 정확하게 알고있다.

적어도 귀신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 보다 더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야고보서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라고 한다. 귀신들이 적어도 기독교 내에 삼신론자들이나 다신론자들 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하나님을 알고 있다라는 것이다.

귀신들은 이러한 지식적인 믿음에 감정적인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떨었다고 한다. 귀신들이 떤다는 것은 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도 믿고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으며 그것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떨기도 한다는 것인데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믿음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귀신들에게 교회가 세례를 줘도 괜찮습니까?귀신 보다 못한 믿음을 갖고도 전부 세례 받고 직분도 받고 예배도 하지 않습니까? 지적으로나 감정적 으로나 오늘날 교회가 귀신과 크게 다른점이 있나요? 적어도 성도는 그러한 귀신들 보다는 명확하고 명료하게 예수 믿는 믿음에 관하여 정의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그 지식은 기본적으로 전제가 되는거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는 제사를 영 단번에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 내셨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너무 간단하고 쉽죠 ? 그냥 십자가 하나로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었다 라는 것을 믿는 거다. 그러나 그걸 믿는 믿음은 굉장히 많은 것을 함의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믿음에 율법 지킴이나 절기 지킴 거듭남이나 예수 영접 의인됨 등이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 된다는 그런 이단 사설들에 속으면 절대 안된다.

 

그 모든 것들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해결이 된것이다. 십자가는 뭔가 불완전 한 것이고 거기에 뭔가가 보태져야 한다 라고 하는 이들은 전부 가짜이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그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거 아닌가요 우리가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고난까지 받으셨을까요? 왜 수난까지 받아야 되는거죠?

 

어느날 성인으로 뚝 떨어져서 십자가 높이들고 애들아 나 너희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는다 잘봐 나 하나님이거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어 너희들 위해서 내가 죽을꺼야 그냥 확 죽어버리면 되는거 아니예요? 왜 예수님이 아기로 오셔서 태어나는 날 부터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 수난을 당하다 가야 하죠? 십자가 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합니까? 오늘 주제의 키 포인트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하는 대목은 단순히 예수님 십자가 고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 하면 단순히 십자가만 떠 올리는데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하는 대목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포함 하지만 십자가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전 생애는 고난의 생애 였다 라는 것을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어구가 그 의미를 함축하여 설명 하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앞 어구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라아에게 나시고 이다. 그 뒷 어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 중간에는 뭐가 들어가 있어야 되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들어가 있어야 되는데 신앙 고백에서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사망 그 중간에 있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바로 고난이었다 라는 것이고 그 고난은 본디오 빌라도로 상징된 어떤 세력에 의한 고난이었다 라는 것을 함축하여 설명 하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와 고난의 개념은 한 개인이나 그 개인에 의해서 저질러진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죽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에게서 죄가 없다고 세번이나 놓아 줄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이라고 한거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을 고쳐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혹은 온 세상의 고난을 받으사로 고쳐야 되는것 아니냐고 반문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빌라도는 당시 세상을 다스리고 있던 로마 황제의 대리인으로 섰던 사람이다 이 세상 권세 잡은자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 전체를 가리킨다. 나를 포함한 세력 전체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 이름대신에 내 이름이 거기에 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 사도신경이나 영어 사도 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를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under Pontius pilate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under 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을 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수난의 주체가 아니라 그 예수님의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그 중간에 빌라도가 대리인으로 서 있었고 그 아래에서 수난이 주어졌다 라는 뜻이다

 

쉬운말로 본디오 빌라도는 당시의 법정에서의 최종 선고자 판사로서의 자격과 기능을 가진 총독이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유죄를 선고하는 세상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수난에 등장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독립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의 주체자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발견된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빌라도가 이 일로 얼마나 고민 했는지 정확하게 나온다.

 

예수 죽인 것은 빌라도는 아주 크게 회개를 했다. 어떤 면에 있어서의 빌라도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괜히 그 당시에 총독으로 있는 바람에 그의 이름이 2000년이 넘게 전 세계 기독교 인들에게 오명으로 불리고 있는것이다. 사도신경 고백할때 마다 그 사람이 이름이 나온다. 그 때 총독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울러 그 대목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의 역할은 그 실재 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가 고난을 받았다 라는 사실에 기인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에 역사성 그 실재성을 확증하는 용도로 신앙 고백이 그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의 이름이 사도 신경에 들어 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를 생각할 때 예수를 죽인 천인공로할 나쁜 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유죄인으로 선고해 버린 이 세상 권세의 총 대표로 보아야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라는 존재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결단하고 살아가던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 보아야 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염요일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내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 있었던 자라는 것이다. 오히려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할 죄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정말 행복할 수 있다라고 복음을 전해 주러 오신 예수님에게 유죄선고를 내려 버렸다. 이것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짧게 축약을 하여 표현을 한 것 뿐이다.

유죄 선고를 받아야 마땅할 죄인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유죄 선고를 받아 버리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구원의 대하 드라마를 아주 작은 그림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인것이다. 하이델 베르그 소요리 문답에 보면 심판자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렇게 나온다 본디오 빌라도 그가 심판자 이기 때문에 그에게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그에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심판자 아래에서 저주를 받게된 것은 우리에게 선고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인데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 권세 잡은 자에게 심판을 받는거다.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이 서 있는 거다. 그래서 그 때 최종 선고자로서의 자격과 신분을 가지고 있던 로마의 총독이 예수님을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린것이다. 빌라도는 최종 선고자의 자격으로 예수님 앞에 서서 내려질 유죄 선고를 예수님에게 내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그 그림을 통하여 마귀의 참소를 받아 유죄 선고를 받아 영원한 지옥에서 이를 갈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어야 된다. 아무튼 예수님은 나면서 부터 빌라도로 대표 되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까지 그 세상 권세 잡은자의 권세에 의해 공격을 당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그 분의 생애가 단 한 줄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기록이 되고 있다.

예수님의 전체 생애는 세상 권세 잡은자의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 인 것이다. 왜 주님은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데 나면서 죽는 순간 까지 고난을 받다 가셔야 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 까지 그 분이 세상 권세 잡은 자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라는 것을 굳이 넣어서 고백을 해야 됩니까? 그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로 이어져도 별 무리가 없을것 같은데 왜 그 짧은 신앙 고백 속에 그 분의 고난의 삶이 꼭 들어 가야 되는 것인가 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고백을할 때 그 고백이 염불 외우듯이 하는 주문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 해답과 더불어 왜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 하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도 하며,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인가에 대한 것도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장면이 어떻게 나에게 영적 현실이 되어야 하는가 까지 가셔야 한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데 그런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사실 확인만을 위한 것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정말 가치 없는 가르침이 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내용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그 고난을 우리 에게로 까지 연결을 시켜 적용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수시로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이리처럼 공격할 것이다.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을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할때 그 속에 예수의 본을 쫒아 함께 그 분의 고난에 참여 해야하는 우리 성도의 필연성 까지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고난의 삶이 었다라는 것이 확실한 사실인 만큼 우리에게 약속된 고난 또한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라는 그 고백을 할 때 나도 그렇게 고난을 받게 될꺼야를 함께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 속에 나의 고난의 필연성이 들어가 있다. 당혹 스럽지 않으세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내가 이야기 할 때 나도 반드시 그런 고난을 통과 할꺼야 라는 믿음을 고백 하는 것이다 내가 신앙 고백을 할 때 마다 나의 고난을 확인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재수 없는 말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신앙고백 할때에 그 고백이 분명히 들어가 있다. 어떻게 우리의 예수 믿는 믿음 안에 우리의 고난이 그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알아 봐야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어요 왜 꼭 십자가여야 하는가 당시 십자가 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가 받는 참수형이라는 율법에 근거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자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죽음을 확증하고 확인시켜 주기 위해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이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다 라는 것을 교회와 당시의 유대인 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거기에 빌라도가 참고용으로 세상 권세잡은 자의 대리인으로 잠깐 등장하는 것이다. [신명기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율법에 적힌 요 부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물론 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모든 고난의 절정이요 결정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의 삶은 십자가와 채찍에서만 나타 나는게 아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 이시다. 그 분이 제한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 성육신 사건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이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자들 심지어 타락까지 해버린 벌레 만도 못한 자들과 함께 33년을 지내셨다.

그런데 그 벌레들이 자기를 알아 보지도 못하고 걸핏하면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죽이려 하고 걸핏하면 모함을 하며 밥 먹듯 배신을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은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 나셨다.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갔는데 변변한 여관하나 구하지 못해서 짐승이 사는 헛간에서 잠을 자는 정도였다. 그리고 인생의 시작은 구유에서 시작 하셨다. 심지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1년된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고 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릴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 어린 반구 둘로 정결 예식을 감당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분은 공생에 기간에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평생 자기 소유의 재산이나 집을 한번도 가져 본적이 없다. 그 분은 가족들에게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3년간 동거 동락을 했던 제자에 의해 팔렸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당신을 끝까지 쫒겠다던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배신을 하고 도망을 갔으며 아무죄도 없이 매를 맞으셨고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벌거 벗기고 홍포를 입힌 상태에서 빛을 받으면 금관의 색을 낸다는 가시관을 씌웠다.

손에다가는 황제의 호를 빗대는 갈대를 쥐어 줬구요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밷었고 그분의 눈을 가린 후에 뺨을 때린 후에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춰 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엉터리 절을 하게도 했다. 그리고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짊어 지실 우리 죄를 대신 죄에 대한 죄인들의 중보적 죄의식 또한 평생 가지고 사셨다.

성육신에서 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겨우 끝이 난다. 죽을 때 끝이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 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아브라함 카이포가 말한대로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고난이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시간적으로도 총체적인 고난이었음과 동시에 그가 취하신 인간성 전체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 총체적 고난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의 최대의 수난은 그런 육신적인 고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최대의 고난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영적인 수난이었다. 영원 속에서 단 한번도 끊어짐이 없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끊어짐을 경험 한겁니다. 성경도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대해서는 그리 세밀하게 묘사를 하지 않는다. 영화중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 까지 모진 고문과 채찍으로 맞는 태형에 처해 진 장면을 본다.피가 튀고 살이 튄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훌쩍 그리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고 운다. 그 장면들을 오래 오래 기억에 새겨 놓고 두고 두고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고난을 단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 채찍으로 치고 십자가에 못박게 넘겨 주니라 단 한줄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성경의 장수를 많이 할애 하여 맞고 맞았고 맞은대 또 맞았고 살이 튀었고 창자가 튀어 나왔으며 피가 튀었다 얼마든지 세밀하게 묘사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성경이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별 관심이 없다라는 것의 반증이다.

그런데 굳이 그 부분만을 극화를 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맞으셨는지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아프셨는지를 밝혀서 그것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 정도의 고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고난의 하나님과의 끊어짐에 집중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들은 설교보다 감동적인 것이었다 라고 평을 쓰신 분이 있다. 도데체 평생 어떤 설교를 들었길래 그래요

그건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오해 되고 있는가를 처절하게 증명되고 있다 라는 사실이다. 그런 고난은 사람들도 너끈히 참아 낼 수 있던 고난이었다. 채찍에 맞는 것과 기름에 튀기는 것 어떤게 더 고난스러웠을 까요?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독사굴에 넣어서 수 많은 뱀들에게 물어 뜯겨 서서히 공포 속에서 죽어 가는것 중에 어떤것이 더 힘듭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면 하루 안에 죽는다. 독사굴에 넣으면 몇일을 그 독사들과 함께 살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된다.

예수님 이후에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한 육체적 고통을 잘 견뎌내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지키다 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무 톱에 켜 죽으면서도 죽는 순간 까지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사람들이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한 건가요 더 아프고 처참하게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집중이 되어 있다. 엠 고고힐이나 로버트 스타인은 그들의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두려워 하신 것이 총체적인 죽음이나 고통이었다 라는 것이 전혀 없다 아무턴 예수님은 평생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난과 수난의 삶을 살다 가셨다. 그 예수님의 수난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헤르만 바빙크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소극적 수난이다. 다른말로 수동적 수난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인들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지우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대속의 수난을 이야기 한다.

두번째 의미의 수난은 적극적 수난 능동적 수난이라 부른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지고한 사랑으로 우리가 마땅히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종의 삶을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드림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해 주시려고 수난을 당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의해서 격발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을 크게 둘로 나누면 십자가와 순종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십자가가 수동적 수난이라면 사랑에 의한 순종이 능동적 수난이다. 십자가와 순종에서 비롯된 고난이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기여 하는 것이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하나님의 순종에 의해서 격발 된 것이다. 하나님이 시켰더니 목숨을 걸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수난의 삶은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해도 틀림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수난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의 삶으로 표출이 된다라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 주는 삶이기도 하다. 순종의 삶은 반드시 고난으로 드러 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삶이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대단한 의미를 지닌게 아니다. 십자가는 당시의 율법에 나오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의 형벌이었기 때문에 선택된 소품이지 만일 율법에 단두대에 목이 짤린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 하고 기록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은 단두대에서 죽었을 겁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를 상징하는 소품이다. 예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어디에서 격발된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난으로 드러다더라 이것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요약이 된 예수님 전체의 생애에 대한 우리에게 주는 유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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