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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선교사 이야기]  한국의 친구 헐버트 선교사

 

 

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무덤에 적힌 그의 유언이다.

이홍직이 펴낸 국사대사전에는 헐버트를 이렇게 소개한다.

"미국은 물론 유럽에 있어서 한국사 연구는 헐버트로부터 시작되었다."

헐버트는 한국의 친구였다.

 

얼마 전 문경새재 1관문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문경새재 아리랑을 최초의 아리랑으로 소개하는 현수막이 걸렸었다. 

중국에서도 아리랑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이 자료는 대단히 중요했다. 

자세히 보니 아리랑의 악보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그려져있었다.

발굴자의 이름은 호머 헐버트,

그는 한국에게 아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리랑을 지킬수 있도록 증거를 남겨놓았다.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었다.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의 목사였고 미들버리대학의 학장이었고 

어머니는 다트마운트 대학 설립자의 후예였다. 

그는 미국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헐버트는 유니온 신학교에 재학 중 조선조정의 초청으로 1886년 우리나라에 왔다.

 

헐버트가 한국에 와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YMCA 창설이었다.

 

YMCA는 기독교청년회이다.

헐버트의 눈에는 조선의 청년들이 걱정스러웠다.

친구집 사랑방에서 허송세월을 하지 아니하면 거리나 유흥가에서 허랑방탕했다. 

매일 수백명의 청년들이 거리를 쏘다니는데 그들이 갈 곳이 없었다. 

공원도 글방도 도서관도 운동장도 없었다. 

헐버트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갈곳을 제공하고 책을 읽게 하고 운동을 할 수 있게 했다. 

헐버트는 YMCA가 조선의 청년들을 교회로 다가오는 통로가 되리라 확신했다. 

1903년 헐버트는 질레트 선교사를 초빙하여 YMCA를 창설했다. 

질레트선교사는 한국 스포츠의 아버지이다. 

축구, 농구, 배구, 야구, 육상, 체조 스케이트 등 서양의 각종 스포츠를  보급했다.

한국야구 100주년 때에는 질레트 선교사의 후손이 잠실야구장에 초청되기도 했다.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표어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청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겠나?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팀의 대단한 인기는 단순한 아마추어 야구팀에 대한 응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대중적이면서 내밀한 독립에 대한 공감대였다.

YMCA 야구팀은 무적이었다. 

야구를 훨씬 전에 받아들인 일본인 야구팀을 이기고 일본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YMCA야구팀은 그렇게 나라 잃은 조선사람의 설움을 풀어주었다.

 

YMCA로 모여든 조선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레 민족의 독립을 고민했고 토론했다. 

그때 함께 한 지도자가 이승만, 윤치호, 이상재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방을 통하여 실제로 무력적인 방법으로 

조선을 강점하긴 하였지만 이에 저항하는 민족세력을 부담스러워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세력이 바로 기독교 세력이었다. 

1908년 3월에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슨 암살 사건과,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피격 사건, 

그리고 1909년 12월에 이재명 의사에 의한 이완용 피격 사건, 

이렇게 연달아 세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모두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들을 한번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105인 사건을 터뜨린다.
 

일제는 1911년 여름에 개성에서 열린 제2회 YMCA 학생 하령회에 모인 기독교인들을 체포한다. 

일제는 갖은 박해 속에서도 해산되지 않은채 버티고 있던 '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선독립운동의 근거지라 파악하고 한국의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아 버리려한다.

이때 체포된 105인의 그리스도인들은 곧 자랑스런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이었다.

YMCA의 독립운동은 8.15해방까지 계속 되었다.

한국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YMCA는 지금도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활동하며 

우리 사회를 기독교적 가치로 건강하게 하고 있다.

 YMCA는 호머 헐버트의 가장 큰 공적이다.

 

한편 헐버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며 우리나라가 주권을 잃어버렸을 때 

고종황제의 밀사가 된다. 고종황제는 일본의 야망을 미국에 고발하여 주권을 지키고자 했다. 

이는 조미수호조약 제1조는 쌍방중 어느 일방이 제 3국에 의하여 침략을 당했을 때는 

다른 일방은 이에 간섭하여 우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조문에 의한 행동이었다. 

고종은 헐버트를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미국 정부에 소개했다. 

그러나 이 보다 먼저 일본이 움직였다. 

‘가츠라태프트' 비밀조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대신 일본의 조선침략을 묵인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1907년 감리교인 이준과 이위종과 이상설을 만국평화공동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한다. 

 
이는 고종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취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때 이미 일본총독부에는 헐버트가 고종의 특사로 참석한다고 알려졌다.  

헐버트는 일제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고 이준 일행을 보호했다. 

헐버트는 유럽으로 이동해서도 특사 활동보다는 

각국의 유수 언론과 접촉하며 일본의 조선국권침탈이 부당함을 알렸다. 

특히 한국 밀사들의 활동에 큰 도움을 준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W.T.스테드와 접촉하여 

그의 협력을 얻는데 성공한다. 스테드는 만국평화회의 전문기자로 

헤이그의 일간지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의 편집인이었다. 

그러나 이준 특사일행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이준열사는 네덜란드의 허름한 여관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한국감리교회에선 2007년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던 이준 열사의 순국을 기념하기 위해

헤이그에 이준열사 기념교회를 세웠다. 

 

결국 헐버트는 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다. 


헐버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했다. 

그가 쓴 ‘한국사’, '대동기년' ‘대한제국망국사’ 는 한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창구가 되었다. 

헐버트를 통해 금속활자와 거북선이 세계최초로 한국에서 발명된 사실이 전해졌고

무엇보다 가장 훌륭한 소리글자로 한글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헐버트선교사의 공적이다.

 

8.15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한다.

그때 헐버트의 나이는 84세 였다. 

고령으로 가족들은 한국여행을 반대했으나 

그는 아무리 여행이 위험하다해도 광복된 한국을 꼭 보고싶어 했다.

그가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녔지만

언제나 마음은 한국에 있었다.

그는 평생토록 사랑한 한국의 독립을 보러 목숨을 걸고 왔다. 

아마도 헐버트는 자기의 운명을 알았던 것 같다.

마지막 남은 기력을 한국을 찾아 오는데 써버린 헐버트는

돌아온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헐버트가 한국의 친구가 되어 열렬히 사랑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복음 15장 12-13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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