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설교] 십자가의 사랑

 

 

 

 

제목 : 십자가의 사랑

말씀 : 막15:21-39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절기설교 / 사순절 주일예배설교 설교 :: 용서의 힘

 

 

 

제목 : 용성의 힘
성경 : 눅23:32~38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마지막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형 틀’입니다. 인류 역사 상 인간을 처형하는 갖가지 사형법이 있었습니다. 참수형, 교수형, 단두대형, 총살형 등 ... 하나 같이 비참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다 당한 후 죽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고통도 그에 못지않게 큰 겁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부터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체포되신 후에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불법 재판을 받으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주먹질 당하고, 욕설을 듣고, ...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기다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치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쇠붙이가 살에 박히며 살점을 뜯어내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왕관처럼 만들어 씌운 겁니다. 그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 피범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매달릴 십자가를 몸소 메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장 언덕까지 1km 정도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무게는 대충 60kg 정도로 추산됩니다.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온간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은 계속 가다가 쓰러지고, 채찍에 맞으면 다시 일어나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 순례자들을 위해 기념하는 길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난의 길’ ‘슬픔의 길’)라 부릅니다. 맨몸으로 가도 숨이 가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셨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그 언덕 꼭대기가 바로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입니다. 멀리서 보면 꼭 해골같이 생겨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보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둘 다 같은 말입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이고, 갈보리는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라틴어 Calvaria, 영어 Calvary)
  골고다 언덕에 올라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십니다. 본문은 그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마지막 우리에게 최후의 일곱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놀라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고통의 한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그 자체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메시야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용서’입니다.
[1] 십자가 : 용서의 힘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그렇게 죽어야 했나?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조롱했습니다. 35절~37절 보면 백성들과 관원들(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심지어 로마 군병들까지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남도 구원할 테니 먼저 자신을 구원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능력해서 그랬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그들을 다 처치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사들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왜 묵묵히 참아내셨습니까? 약해서 당한 게 아닙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챔피언입니다. 골목을 지나가는데 그 존재를 몰라보는 꼬마들이 돌을 던지며 놀립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참습니다. 약해서입니까? 한 주먹거리지만 상대가 안 되니까 참는 겁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에게 그들은 전혀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서는 자기 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이 몹시 불쌍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린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말씀은 ‘단순한 기도 이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끌려와서 십자가 달려 죽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겁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값을 치르지 않으면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르고 심판 당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당당하게 아버지께 요구합니다. 죄를 대속했으니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이제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는 예수님이 약함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겁니다. 용서의 힘!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용서의 힘입니다! 
[2] 우리가 받을 용서의 힘 : 용서의 은혜
  십자가의 용서의 힘은 우리에게 먼저 용서의 은혜를 받게 해 줍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 죽을 인생이었지만 이제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① 영적인 자유 획득 :
  인간은 죄로 인해 속박을 받고 삽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양심을 갖고 있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엄청 큽니다. 의식하든 않든 양심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오래 전 신문 기사 내용입니다. 일본 시즈오카 縣 후지 市에서 한 은행원이 칼에 찔려 피살되었습니다. 경찰이 수사력을 집중했지만 은행 강도 잡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년 후 48세 된 남자가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그는 직장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는 상태였고 공소 시효도 지났지만 죽기 전에 정리하고 싶어서 자수했다는  겁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었습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죄값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날 때가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모든 인간이 크든 작든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용서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32:1~4 (다윗의 침회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간혹 어떤 흉악한 사람은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양삼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느끼는 게 아니라 못 느끼는 겁니다. 사람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대번에 “아이고, 무거워!” 합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서 그런 겁니다. 이런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아무 느낌 없이 더 큰 죄를 짓다가 마침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앞에 나와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양심의 자유, 영적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면 평안해 지는 겁니다. 이 영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자녀의 권세 획득 :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으면 이제 의인으로 인정됩니다.(이신칭의 以信稱義)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섰으니” 예수님의 이름은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잘 아시죠. 허랑방탕했던 탕자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 받은 후 그는 어엿한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새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잔치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온갖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 기도하고 응답 받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얻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보장받고 천국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제대로 알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천국 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부디 십자가 은혜로 이런 권세를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나눌 용서의 힘 : 용서의 실천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 은혜를 나눌 것을 요구하십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용서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용서의 실천입니다.

  ① 용서의 실천 이유 :
i)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원한과 증오에 스스로 속박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용서하는 못하는 일로 인해 마음에 응어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 관한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크리스티 김,『인생의 응어리를 풀어라』, 규장.
  이 책에 보면 저자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 12가지를 열거합니다. 첫째,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둘째, 사탄이 틈을 탑니다. 셋째,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다섯째,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일곱째,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외롭게 삽니다. 열째,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누구보다 자신이 큰 손해를 본다는 겁니다. 마치 용서 못하는 것은 마치 금속에 녹이 스는 것과 같습니다. 녹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되지만 방치하면 금속을 다 부식시키는 것처럼 용서하지 못함으로 품는 원한은 인생을 망쳐버립니다.
  오래 전 미국 조지아 주의 한 도시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는 흑인 캘빈 존슨이었는데, 그는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배심원  전원이 백인이었고, 흑인 피고를 의심했습니다. 알리바이를 대도 무시하고 진범으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캘빈 존슨은 애매하게 복역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오. 나는 결코 진범이 아니요. 누명을 벗도록 날마다 기도할 것이요.” 그 후 16년이 지난 후 계기가 마련되어 유전자(DNA) 검사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진범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재심을 위해 법정에 나온 그의 손에는 신약성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무죄를 선고받은 그에게 기자들이 질문합니다. “존슨 씨, 당신을 16년간이나 감옥에서 썩게 만든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보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분노와 증오를 내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죽입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일자리나 구할 겁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얼마나 현명합니까?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 겁니다.
ii)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용서의 은혜를 입은 능력으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 좋다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18:23~35)를 보면 임금과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대강 환산해보면 수천억원에 달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그 종에 불쌍해서 탕감해 줍니다. 여러분, 그 종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좋아하며 길을 가는데, 중도에 동료를 만납니다. 그 동료는 그 종에게 100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1백만원쯤 된다고 했을 때 그냥 주기는 아까운 돈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진노하였고, 그 종을 잡아들여 투옥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iii) 용서하는 자는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축복을 받을까요?
  첫째, 용서하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 집니까? 행복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소유가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행복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관계가 좋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나빠지기 쉽습니다. 먼 사람은 차라리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원앙 부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원망과 앙심이 많은 부부’랍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가장 가깝고 다정해야할 관계지만 살다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원앙 형제, 원앙 친구도 있습니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요셉의 가정은 행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니까 온 가족이 호의호식해서 그랬나요? 아닙니다. 요셉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후에 그의 형들이 벌벌 떱니다. 혹시라도 복수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한 겁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말합니다. 창50:19~21 “ ...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그 후 온 가문이 화목하고 행복해진 겁니다.
* 용서하는 사람은 건강해집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원한과 증오는 독이 됩니다. 그런데 용서하고 나면 독이 제거되고 마음의 평안이 약이 됩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합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용서하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용서하면 실패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진짜 승리하는 겁니다. 스펄전 목사가 젊은 시절 설교를 했는데, 비판적인 청년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뭘 하고 있었나요?” 순간 그는 당황했습니다.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잠시 후에 하나님이 깨달음 주셔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용서의 힘을 주셨소!” 행7:60~8:1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추호 모습이 나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 ” 스데반은 무능력자가 아닙니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핍박자 사울을 바울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인해 세계가 복음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승리의 배후에는 스데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승리를 낳습니다. 
  ② 용서의 실천 방법 :

i) 성령 충만 - 용서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하나님의 신, 성령)으로 되느니라”
ii) 화해(용납과 사과) - 용서의 첫걸음은 용납하고 사과하는 겁니다. 용납은 남의 잘못을 받아주고 덮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잘했어도 인간관계란 상대적입니다. 한편에서 100% 잘못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화해가 이뤄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배보다 화해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형편 상 도저히 직접 만나서 화해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이미 죽었거나 멀리 있거나 상대방이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거나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iii) 섬김과 축복기도 - 더욱 성숙한 용서는 화해 이상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삶으로 행함으로 옮겨지는 겁니다. 상대방을 섬겨주고, 축복하며 기도하면 더욱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iv) 끝까지 용서 -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한두 번 용서하다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기껏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경우에도 계속 용서할 할 것을 권면합니다. 마18:22 “ ...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 이 말씀은 490번 하라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너무 많지만, 7은 완수로 무한히 용서하라는 겁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일지 모르지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하십시오. 끝까지, 무한히 하라는 것은 ‘한번만 더’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여러 가지 선행을 하고 ...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십자가는 용서의 힘이라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그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힘으로 용서를 실천하십시오! 그래서 누구보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하시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