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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아펜셀라의 인천상륙과 의료사업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The Hartgard Inter Seminaryconvention)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처음에는 일본에가려고희망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던 친우인 워드윌쓰(J.S.Wodaswoth)가 모친의중병으로 국내에 남아있을 사정이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한국행을결심하게된 것이다.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 들려 선배 선교사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났으며 3월 5일에는 뜻깊은 선교예배를 올렸다. 이때 매클레이 목사는 시편 121편에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는 구저를 읽고바울이 선교사업을 위해 맡은 일터로 떠나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면서 한국을 향하여 선교사들의 장도를 격려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H.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받을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먼저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주시옵소서] (R.S.Maclay,Comen cementof the Korea MethodistEpiscopal Mission,The Gospelin All Lands for 1885,P,328)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 (Harry A.Rh-odes,TheKorea Mission Field No.4,April 1935,P 78)라고 아펜셀라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F-oulk)가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서울에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청국의 대표 이홍장 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우리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둑으로 건강을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목사의 한국 입국은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인천에 또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한국에 선교하면서는 한국 고대의 전통 의식이나 문화양식을고려하지 않고 거의 독단적인 선교방법으로 강행하다가 오해와 박해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선 매사에 극히조심스럽게 태도를 취하였고 최대한으로 충돌을 회피하면서 한국민의 호감을 사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그러기위하여 우선 의사를 보냈다. 이들은 육신의 병을 고쳐주어 친밀감을 느끼게 하였고 한국인의 신임을 얻으면서 복음을 전달할 기회를 포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도 난관과 애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의사들의 시기와 멸시가있었고 환자들의 오해와 불평이 뒤따랐다. 선교본부로부터의 후원의빈약과때로는 선교의 의사들 사이에서 선교방법과 의견의 불일치로 어 려움을 격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것들이 바야흐로 열린 선교의 문호를 닫지는못하였다. 개척 선교사들의 의료사업은 한국민에게 과학문명의 혜택을 제공하면서 한국선교의 본격적 사업을 위한 시발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선교사에 의한 의료사업은 네가지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로 외국의영사관 직원들과 거류민을 위하여 치료를 베풀었고 다음은 국왕과왕실을포함한 한국민들을 치료대상으로 살아야 했다.

 

셋째로는 정부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 관리해야 했으며 그리고 넷째로는의학 교육을 베풀어 의사를 양성하는 일까지 담당해야 했다.

광헤원은 정부 소속의 병원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선교회와의 합작운영이었던 관계로, 육의 병을 고치면서도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 영장이었다고 보아 당연하다 하겠다.

 

알렌은 원장겸 의사의 책임을 맡고 바쁜 일과를 보냈다. 그는 일반 환자를 위하여 분주하였지만 왕실을 위하여 더 분주했다. 국왕의 시의가 된 그를 위하여 참판이라는 벼슬이 1885년 7월 19일에 내렸다. 알렌은벼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국왕의 시의는 절대로 놀고먹는 직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엄하게책임을 추궁당해야했고 한의사들의 시기를 참아야 했다. 입시 하나는명령은밤 12시가 지나 더 늦게도 있었고, 그런 명령이 올 때에는 요란스럽게 가마를 보내와서 왕명이라는 고함 소리에 모두가 잠을 깨곤하였다. 더욱이 이나라의 관습은 정장하지 않고서는 국왕을 알현하지 못하는 법이 있어 반드시예복을 입고 입궐해야 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H.N.Allen, Things Korean,PP,193-195)

 

병원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알렌 혼자서는 도저히 외래환자를 치료할수없을 정도로 분주하였졌다. 알렌은 불원내한하여 동료가 되어줄 혜론(gohn W.Heron,)의사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스크랜튼(W.B.Sc-ranton)의사가 먼저 들어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혜론 의사도 그뒤에도래하여병원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스크랜튼은 1885년 6월에 병원을사퇴하였고, 알렌은 1887년에 원장을 혜론에게 넘겨주고, 한국정부가 박정양을 미국에 초대 공사로 파견할 때 참찬관의 직을 받고 그를 수행하여 갔다. 그러나 알렌은 1889년에 다시 병원사업의 임무를 맡아 제중원의 원장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복음선교에 앞선 의료사업의 개시와 활동은 한국인들의 육의생명을 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아니라.그 마음을 사게하여 한국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금압정책을 완화케 하는데 결정적 효과를 올렸으며 전도의 길을 널리 개방하는데 크게 도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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