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이수정의 성서 번역

 

 

 

이수정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버한 사람은 누구 보다도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이었다. 기독교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나라 사 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용감히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외 국선교사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루미스목사는 즉시 이수정을 방문하여 성서를 한글로 번역 해달라고부 탁하였다. 이수정은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성서 번역에 착수하게 되 었으며 세례받은지 겨우 두달만에 한문성서에 토를 달은 소위 [현토한 한신약성서]의 작성을 완료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마가복음부터의 성 서한글 번역을 시작하였으며, 현토한한신약성서는 1884년에 출판되었 고 마가복음도 같은 해에 요꼬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이수정은 상당한 경제적 난관에 봉 착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미국인 선교사나 일본인 목 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 다. 동생은 형에게 일금 만량을 전달하면서 귀국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다. 또 돌아가지 않겠다. 나는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기선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하였으니 까]라는 말로써 성서번역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귀국을 거절하였다. 이수정은 일본을 다녀와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워 준 이동인에게 전도하여 불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케 하였으며 성서번역 사업을 위한 협조자가 되게 하였다.

 

또한 김옥균이가 기독교의 한국 도입을 정부에 진언한 일에 있어서도 이수정이가 배후에서 크게 노력한 사실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Vol, 1,p.336) 이수정이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성서번역과 교회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기간에 국내에서는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은 삼일 천하로 실패하였고 개혁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일본 동 경에는 유학생들이 적지않게 있어 이들은 자연히 망명인사들과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못마땅히 여긴 본국정부에서는 유학생 전원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유학생 20명중 3명은 곧 귀환하였으나 나 머지 사람들은 귀국을 불응하였다. 정부에서는 유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안종수와 박준우를 쇄환사로 하여 일본에 특파하였다. 이수정은 그때 다른 유학생 5명과 함께 1886 년 5월 28일 귀국하였다.

 

귀국할 당시 그가 기독교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관하여는 반론 이 우세하고 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슨 (Ellen C.Parson) 은 자신의 저서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P.7) 에서 이수정 은 귀국을 앞두고 부득이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정은 이미 기독교신자로서 여러해 동안 기독교활동을 한것 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정부로서는 국법을 어긴 위험 인물로 간주할 수 밖에 없었고 또한 개화인사였음이 분명하였는 고로 구는 귀국하자마자 보수파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촌단의 극형으로 생명 을 잃었다. 이수정은 일본에 체재하는 기간에 조국의 기독교 선교를 염원하여 열 렬히 활동하였다. 1884년 3월에 그리고 12월 31일에 [세계 선교 평논]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외국 선교지] (The Foreign Missionary)에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꼭 한국에 보내야 한다고 애끓는 글로 기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는 도중 일본에 들 렸을 때 이수정이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2개월간 동경에 체 류하면서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L.H.Underwood, Underw- ood of Korea,PP,37-38) 그러기에 이수정이야말로 [한국의 마게도니아사람]이라는 말로 불려져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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