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오후 설교  은혜받은 자의 고백


제목 : 은혜받은 자의 고백

말씀 : 요9:26~34

1970년대 아프리카의 우간다는 이디아민 이라는 독재자 밑에서 온갖 압제를 당하며 숨을 죽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간다 최대의 교회 목회자인 케파 셈판기 목사님은 이런 독재자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고 설교함으로써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항상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부활절에 목사님이 주일 설교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괴한 5명이 뒤따라 들어오며 목사님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들은 비밀경찰로 반정부 인사들을 암살하는 무서운 살인자들이었습니다. 이때 셈판기 목사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나는 죽음은 두렵지 않소. 그러나 죽기 전에 당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으니 2분만 시간을 주시오.” 그러자 암살자들은 그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며 “주님, 저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이제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오니 주여 받아 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괴한들이 권총을 품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부에서 목사님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각별히 몸조심을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담대함과 능력과 지혜를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절망과 낙심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성령께서 힘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심으로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얼마든지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눈을 뜨게 된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하며 이 사실에 대하여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맹이었습가 보게 된 사람을 불러 묻습니다. 네가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그러자 그는 예수님이 진흙을 바르고 씻으라해서 그대로 했더니 보게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 중 몇몇은 그런 일을 하였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죄인이라고 하며 그것이 확실한지 알기 위하여 그 부모를 불러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었던 그 아들 맞느냐? 그의 부모는 이 사람이 소경이었던 내 아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모른다고 하며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재차 소경되었던 사람을 불러 ‘그는 죄인이다. 그러니 너는 그 사람을 두둔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소경되었던 사람은 ‘난 그런 건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소경되었던 내가 지금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그가 무엇을 하였으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은 ‘왜 다시 물어봅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를 욕하며 너는 그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이 다시 말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당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를 알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하는 사람을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셨는데 왜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를 모르십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모릅니까?’

이에 바리새인들은 화를 내며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면서 소경되었던 사람을 내 쫓아버리게 됩니다. 즉 출교를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우리는 여기서 세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소경되었던 사람의 부모와 소경이었습니다가 보게 된 사람입니다. 이 세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는 어떤 쪽에 속하여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으므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물론 일부의 바리새인들은 죄인으로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혹 인정했다해도 안식일을 범했으므로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예수님을 이단자이거나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나름대로 열심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일조, 기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형식주의 혹은 외식주의에 빠졌습니다. 우월감과 자만감에 빠졌습니다.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즉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규정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자로 여겨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에게 바리새인들처럼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배치될 만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율법주의, 외식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없겠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자기 유리하게 해석하려 들지는 않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진정 말씀을 따라 사는 삶보다는 종교적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작은 부분이라도 그런 모습이 있다면 빨리 벗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정말 순수하게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진정 풍성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

이 사람들은 현실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여 즉 출교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모른다고 잡아 떼었습니다. 즉 이들은 현실적 필요에 의해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자초지종을 물을 때에 그가 우리 아들이고 소경이었는데 눈을 뜨게 된 것은 맞다. 그러나 어떻게 떴는지는 모른다고 잡아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그러니까 알고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출교가 무서워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모른다고 잡아뗀 것입니다.

물론 출교는 거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유대공동체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교제도 할 수 없고, 모든 상거래도 금지되며 함께 일 할 수도 없고, 예배도 함께 드릴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고향을 떠나 어디 이방 땅으로 가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두려운 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것이 예수님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 물질적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정말 예수님 편을 택할 각오가 되어 있을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일에 일하러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정말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앞세우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아갈때에 더욱 큰 은혜의 충만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3.맹인이었다가 고침 받은 사람

이 사람은 앞서 보았던 바리새인과 그의 부모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교 당함을 각오하고 시종일관 예수님을 시인했던 것입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 고백합니다. 요9:17을 봅시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요9:33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예수님이 선지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분명히 밝힙니다. 먼저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며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듣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들으시고 그를 통하여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 분이 어떻게 죄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면 하나님이 물리치시고 듣지 않으실텐데 그러면 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이 분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났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일은 창세 이후로 한번도 없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분명 날 때부터 소경이었고, 이분이 시키는 대로 하니 눈이 떠졌는데 이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기본적인 법인 안식일을 마음대로 무시하는 죄인이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더구나 이 고백은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시인하고 따르는 자들은 출교가 결정된 상황에서 있었던 고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도 어떤 불이익도 그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주님의 능력으로 분명히 고침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소경되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통하여 너무나 귀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 순종하고 고침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났다. 순종했다. 치유받았다. 증거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가 누릴 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이 사람은 그야말로 순교를 각오한 증거입니다. 물론 당연한 증거이었지만 사람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무언가 현실적으로 손해가 올 것 같을 때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기에 결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바르게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과 혼과 육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경우라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