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 거듭남의 의미

 

 


말씀 : 요1:9-14

제목 : 거듭남의 의미

오늘부터 오후예배 시간에는 어떤 주제를 택하여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주일오후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의 말씀들은 수요밤예배로 옮겨 계속 강해를 실시할 것이다. 왜 이런 결정을 하였느냐하면 우리가 전도에 대하여 살펴보며, 또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하여 늘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은 거듭남에 대한 체험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전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거듭남을 체험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지만 그러나 몇분의 초신자들도 계시고, 교회생활 오래하였지만 아직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신 것 같아 거듭남에 대하여 몇시간 동안 말씀드릴 때 아직 체험하지 못한 분들을 이번 계기를 통하여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기를 바라고, 이미 체험하신 분들은 더욱 확실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논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그 중에서 어떤 곳에 보니까 개신교인들은 그래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천주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얼마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답변은 자신들이 선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천국에 간다고 장담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보내고 안보내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들은 그저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신교를 비판하기를 개신교인들은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쉽게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행동은 하지않고 자기 나름대로 믿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여 구원얻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교만이라고 반박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 천주교인들이 말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반박이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자기가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 오히려 천주교의 주장이 교만이고 불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겸손인 것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이요, 동시에 불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확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100% 완벽하게 그대로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신이고, 교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거듭남이란 물론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론 육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났다고하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에 대하여 보다 확실한 의미를 살펴보려면 요3:3절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a[nwqen(아노덴)은「위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새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말은 위로부터 났다. 처음부터 새로 났다. 새롭게 태어났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라는 것은 물론 하늘을 가르키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므로 결국은 위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듭이라는 말속에 이미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났다는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사람의 지혜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도덕적 삶이나 종교적 철학적 사색이나 탐구나 수양이나 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 기여나 혈통적 계승에 의해서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필요없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은 너무나 많다.

요1:12,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보라!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혈통으로 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적 혈통적 관계에 의하여 거듭남이 계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말은 이성에 대한 것이든 물질에 대한 것이든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든 여하튼 어떤 것이라도 세상적인 욕망에 의하여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사람의 뜻으로나 나지 않는다는 말은 말그대로 종교적이든 아니면 철학적이든 아니면 윤리적이든 그 어떤 것이라해도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하여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거듭나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물질적, 학문적, 지식적, 도덕적, 윤리적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엡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거듭남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의 역사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것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철학적, 종교적 수양으로 되어질 수도 없고 되어져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보면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해석할만한 구절들이 몇구절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야고보서 2장이다. 예를 들면, 약2: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마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은 일견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행위구원 혹은 공로구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야고보 2장에 대해서 보자. 야고보서 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배경을 보아야 한다. 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1:1절에 있는 바와같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외적으로 많은 핍박에 직면해 있었고, 내적으로는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저 형식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믿는다고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유대교의 형식주의, 율법주의, 외식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런 형식적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다면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거기서 말하는 행위가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100% 완벽하게 선하게 옳게 바르게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씀은 진실로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다운 행위를 위해 힘써야 하고 또 그 결과로써 어느정동의 믿음의 행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씀이 100% 완벽한 행위가 없다면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면 이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태초부터 세말까지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기에 심각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더 심각한 것은 만약 그런 의미로 씌였다면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100% 완전한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완전히 성화가 되어 완전한 행동을 행해야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천국 갈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믿으며 구원받는다는 말씀들도 공수표가 되고 말지 않는가?

그러니까 오해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에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하였다하여 이것이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정말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가능한 최대한 실천하며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때에 어느정도의 믿음의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마7:21-23절의 말씀도 잘 읽어보라. 이것이 정말 100%행함이 없는 자들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주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마7:15절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주신 말씀이다. 거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시면서 겉으로는 믿는 자인체하고 더 나아가 선지자 노릇까지 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뒤로는 불법을 자행하며 다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2절에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기서 말하는 것도 역시 거짓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불법이란 우리가 나름대로 잘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주님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그래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진실로 살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잘못하고 또 때로는 죄를 짓기도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행하는 불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설령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도 실제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그 주님의 뜻을 따를 의사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진정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으니 설령 겉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니 결국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고해서 이 말씀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100%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석한다면 역시 천국에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번복하는 것이 되게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무효하게 만드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라. 예수님께서는 분명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는가? 더구나 100%믿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물론 진짜 믿음에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100%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얻는 믿음은 100%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대속의 죽음, 그분의 부활을 통한 구속의 은총, 그리고 그분의 다시오심, 그로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가운데서 하나님앞에 엎드리며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듭남의 의미와 그 방법을 되새겨보며 진정 구원의 확신가운데 살자. 우리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나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믿고,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그래서 그를 믿는 자엑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주어졌음을 믿고, 그래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 혹은 우리가 그분앞에 갈때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을 믿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든 믿음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온전히 믿으며, 믿는 자은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더욱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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