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시 축도(benediction, 祝禱)의 바른 이해 

 

 


오늘날 예배 때 행해지는 축도는 예배라는 틀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될 제의적 요소로 되어 있다.

축도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행한다.
기록에 따르면 1958년부터 일반 예배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축복하는 기도로 사용하였다.

축도는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의 바울의 축도와 민수기 6장 23절- 26절 아론의 축도를 사용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민 6: 23-2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후 13:13

그러나 원문의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교통이 아니고)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아멘.” 여기까지이다.

고린도후서의 헬라 원문에는 ‘있을찌어다’가 없다.  그리고 교통하심이 아니라 교제하심이다.

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기원적 의미인 “있을지어다”를  “있으라”의 명령적 의미로 받아들여서 축도자를 하나님의 대리인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축도할 때에 축도자가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는 대리인인양  양 손을 펴고 양 팔을 들어서
강단 아래 교인들을 향하는 것이다.

본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여 주심으로 지체 간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서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실 것을 기원한 것이다.

‘축도’의 의미를  기독교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 한다.

"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

그리고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하여 사제는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한다."

문자적으로는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고 한다. 의미는 좋게(bene), 말하다(dicere)의
라틴어 합성어로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서신서 말에 있는 축원을 축도로 오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편지의
끝인사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편지나 말로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후서 13: 13절의 말씀이나 유다서 1:23-24절의 말씀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구체적인 편지문 가운데 그 마감어로 사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은“축원”을 “축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막 8:6) “축사하시고”를 “축복”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한글성경이 안고 있는 기본적 문제 중의 하나이다.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역사 속에서도 “원(願)합니다. 사(謝)합니다”의 앞에 축(祝)자를 붙이는 중국인들의 어휘 구성에서
온 오해인 것이다.

“축원”이라는 어휘는 성경에 없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기를 간구합니다!
기도합니다! 기원합니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축원”이라는 어휘는 불교 혹은 토속종교에서 쓰이는 어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한국교회는 목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토속종교에서 가져온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축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 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8)는 말씀은 목사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일반적인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약엔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다.
(레 9:22, 민 6:22-27).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오늘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축복기도는 중보의 기도로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기 때문에 행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대제사장(히 3:1, 히 4:14)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딤전 2:5).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히 6: 19-20),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딤전 2:5),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신 것이다(요일 2:1).

오히려 우리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형제이다(히 2:11, 마 23:8).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한다면 누구도 축도를 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회나 성공회나 루터란 교회의 모든 전례 의식서에서 두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임마누엘)" (The Lord be with you!) 하는 기원의 표시이고,
이윽고 회중들이 "목사님(신부님)에게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 (And also be with you)하고 응답할 때는
신부(목사)는 자기의 두 손을 자기 가슴 위에 모아 합장하는 것이 전형적 방법이다.

 


바울보다 좀 앞선 시기에 살았던 유대인의 축도는 에쎈파 사람들의 쿰란문서, 그들의 공동체와
관련된 규칙들을 모은 "Serek ha-Yahad"라는 문서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내용은 축도와 저주가
한 쌍을 이루고 있고, 그에 따라서 두 무리의 사람들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든 길을 온전히 거닐고 있는 하나님의 운명의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쎈파 사람들이 자신을 지칭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축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에센파에 가입하지 아니한 사람들 모두를 가리켜서는 "벨리알의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 부르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 대신에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다.

죄인 된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공로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이로써 "성령에 참여함"이 허락되었다는 바울의 축도 이해와 차이가 나는


것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축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손을 들고 기도하던 관습(시 63:4, 119:4)에 따라 말한 것 뿐이고 다투기보다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권면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경건한 풍습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회당이나 교회가 모이는 장소에서 바울의 서신서 등을 거의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그 성경을 읽어주는 자가 듣는 자들을 상대로 간단한 해설을 곁들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보통 서신의 맨 나중에 나오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부어 주시는 복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언약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이 어떤 것인지를 기록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너희 (교회) 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고후 13:13)
하고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축도는 오로지 교회로 모인 성도들의 예배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상속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표징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우 상 축도를 하도록 배려하는 식의
관행은 크게 잘못 된 것이다. 축도는 말씀을 낭독하거나 강설하는 것의 연장이며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인 양 본질적으로 크게 오해되고 있기 때문에 축도를 장황하게 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도록 축원하노라.'든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지어다.'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 축도하는 목사 자신이 그럴 만한 권한을 위임받은 것으로 오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축도를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봉사’로 이해하였다.
즉 축도를 기도가 아니라 설교의 한 형태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축도는 설교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가 아니고 설교자라고 한 이유는 설교한 사람이 축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들은 말씀을 듣고 ~~하기를 진심으로 결심하는 자들에게"라는 구절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은 언약적인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데, 축도는 바로 그러한 언약 공동체를 이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결심이나 결단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축도는 결코 축복기도가 아니며, 교인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백성으로서 무리를 이룬 성도들 (교회) 가운데 확인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와 수용이다.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에 '축복기도' 란 특정 사람이나 특정한 일을 위해 복을 빌어 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 후에 말씀을 맡은 자가 하는 축도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축도의 시간은, 설교자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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