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 주일예배 대표기도문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삶의 현장인 세상으로 흩어져서,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을

따라 사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게 하셨다가,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불러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더욱이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 주일로 지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용히 머리 숙여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에, 세상 일에만 온통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고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분주함 속에서도 자신을 돌볼 줄은 알았지만,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힘들어 하는 이웃의 삶을 돌아보고 배려함에 있어서는

차가워져가는 날씨만큼이나 냉담하였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이웃과 주변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나눔을 통하여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이 시간 장기간 계속되는 불황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먼저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과 함께,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빛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민족에게는 교만하고 부패하고 죄악된 모습에서 돌이켜

,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 놓고 회개함으로써, 자

비하신 주님의 은혜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에게 의인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던 주님! 

우리의 주변에서 의인을 찾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

날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떠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수를 경험하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깊어지게 하시옵소서.

​또한 날마다 찬양으로 주님을 높여드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Remodeling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사를 온전히 마무리 짓는 순간까지 계획대로 안전하고 완벽하게 공사가 마쳐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담임 목사님을 축복하셔서, 능력에 능력을 더하시고 영육간에 강건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대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된 교회를 위하여 각 기관과 지체에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주님의 일꾼들에게도,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예루살렘 입성 기념… ‘호산나주일’로 불리기도

 

 

 

 

 

종려주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린 성화. ⓒ위키피디아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승리 등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호산나주일'이라 불리기도 했다.

종려주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385년경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이 나섰다. 반면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6세기경 스페인 의식서를 보면, 5세기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전해졌음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것이 종려주일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성도들은 종려주일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축성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축성이란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구약의 성별 의식(출 40:9-15)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다.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거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도 했다.

군중들은 이렇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지만, 5일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올해는 4월 9일이 종려주일이며, 다음날인 10일부터 부활절 전날인 15일까지는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이다.

'수난주간(受難週間)'으로도 불리는 고난주간은 잘 알려져 있듯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종려주일 다음 날부터 부활 직전까지의 1주간을 말한다.

예로부터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목요일,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이 십자가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낸다.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했으나,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회복됐다. 오늘날에는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특별 새벽기도회나 저녁모임 등을 열어 경건하게 보내고자 노력한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추수감사절 예배 설교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 

 


범사에 감사하는 은혜  (데살로니가전서 5:18)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해 동안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다운 삶은 영위하게 하시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은혜를 돌이켜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주일을 맞이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지 돌이켜보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감사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건강지수와  행복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다. 부디 다른 공부보다도 먼저 감사하는 공부를 배우라." 그만큼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인간의 근성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두발 달린 동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같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부모들은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다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일수록 나중에 부모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가까워 질수록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고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는 삭막한 인간성 중 하나가 감사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50년 전, 100년 전 그 혹독한 가난가운데 힘들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에 비해 훨씬 감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점점 감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범사에 감사할 때, 영과 육이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엔 판티'(en panti)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 영어 성경에서는 크게 3가지로 번역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서든지', '모든 일에',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다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범사에'라는 말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면 3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안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할 뿐 아니라 큰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양지에 있을 때도 감사할 뿐 아니라 음지에 있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하나도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의 참뜻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줍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라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의 내용을 알면 그 고민은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감사는 막연히 느끼는 고마운 감정이 아닙니다.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2-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감사에는 적어도 3가지 요소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나님께서는 이런 간절한 마음이 담긴 감사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을까?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는 것이 감사요.

둘째로 궁극적인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론 고마운 사람에게 감사할 수 도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그 앞에 경배하는 것을 일컬어서 감사라고 합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는 도중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9명은 "우와! 내 병이 나았네. 아이고, 고마워라." 하며 고맙다는 느낌을 가졌지만 그 이상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명, 바로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낫자,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다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감사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예물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소원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응답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가 서원한 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던 중 정말로 아들을 얻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평생 기도한 것을 다 받고 나니 너무나 감사해서 말년에는 자신이 쌓아 놓았던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데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할 때 그 감사에는 마음이 담겨야 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감사의 예물을 들고 나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맙다고 느끼는 것으로 머물면 안되고, 감사하다는 말로 끝나서도 안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로 드려지는 감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처럼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첫째는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악해도 좋은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무더운 여름에 소낙비를 주시듯 가끔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엄청난 수고요, 희생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좋은 일을 자주 맛보곤 합니다. 평생 부부로서 사는 것이 굉장한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좋은 일을 주십니다. 한 생을 살면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각자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경험하게 된 좋은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감사헌금을 잘하시는 것에 늘 하나님 앞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헌금을 보면 감사에 대한 성도들의 정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몇 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입니다. 그런데 몇 백 명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감사헌금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사할만한 좋은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 하나하나마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뜨거운 심정으로 손에 헌금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땅히 감사해야 될 좋은 일을 감사 없이 넘겨버릴 때가 많이 있음을 인정하고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는 나쁜 일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살전3:4) 바울은 전도하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 믿고 나니 엄청난 환란과 핍박이 그들에게 덮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핍박이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삼자 교회는 버젓하게 교회 문을 열어놓고 예배를 드리지만,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들고 투쟁한 지하교회들은 지금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공 셍리앙(Gong Shengliang) 목사님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종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신도만 해도 2, 3만 명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구원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면서 집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자 중국 정부에서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핍박의 구실을 만들고자 그 교회에서 예수 잘 믿고 인물이 있는 여 집사 몇 명을 끌고 가, 공 목사가 성폭행한 사실을 인정하도록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공 목사를 잡아 들여 재판을 치루고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세계인권위원회는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핍박이란 예수 한번 바로 믿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핍박 받는 것도 감사하고, 매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가족들이 끌려가서 죽는 것도 감사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것도 감사하고, 굶는 것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일을 많이 보고 마음에 원치 않는 일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핍박을 받는 사람에 비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핍박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언짢은 일에도, 손해 보는 일에도, 내 몸이 망가지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가 일찍 죽는 것을 보고도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숨쉬고 있는 공기로부터 시작해서 마시는 물,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내 몸의 모든 기능, 하나님이 주신 내 자녀, 일용할 양식,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하게 주시니까 우리가 소중한 것을 받고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쉽습니다. 당연하게 여길 때는 감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빚진 감정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1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에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빚진 의식 또는 의존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서구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들이 이제는 빚진 감정 대신 권리 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존 의식보다도 자율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인기 있는 만화 작가 바트 심슨(Bart Simpson)이 한번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 기도를 부탁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가 이 모든 음식을 위해서 친히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얼마나 방자하고, 거만하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내가 누리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내 능력으로 얻었는데, 무슨 감사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았기 때문에 일일이 감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이다." 입니다. 그 어느 것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풍족한 세상을 살아서 많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진 의식보다 권리 의식에 은근히 더 오염된 것 같습니다. 70년 전만해도 우리는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6·25전쟁이라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불과 반세기도 되기 전에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보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냉랭한 마음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를 보면 60억 인구 가운데서 1/10에 해당하는 6억 인구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기가 없는 사람들의 수가 20억이 넘습니다. 식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아무데서나 퍼 마시는 사람들의 수는 10억이 넘습니다. 인간다운 삶은커녕 이렇게 끔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우리가 이만큼 먹고 마시며 여유를 가지고 살수 있다는 것은 결코 당연히 여겨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한번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과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 의사가 다루고 있는 병이 몇 가지나 되는지 살펴 보십시오. 병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정범진이라는 사람은 교통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되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 끝에 미국 브루클린 검찰청의 부장검사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 것이다."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는데 2시간동안 사투를 벌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대로 당연시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이라는 사람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주된 인생관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연습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좋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지만 나쁜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누리는 당연한 것들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허황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런 근거 없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인 줄 뻔히 아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까지 준비하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은혜의 산물이지,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일을 앞에 놓고 "할렐루야" 할 수 있는 은혜가 내 안에서 치밀어 오를 때 가능한 것이지, 내가 노력하고 결심하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바로 구원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난후 이렇게 변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말하니."(살전1:9-10)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과거에 우상숭배하던 것을 다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배후에는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힘입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동안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 내가 동행해주마.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내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너를 안위하리라. 원수들 앞에서 너희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높여주리라.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마. 그리고 너희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에게 기도하여라. 그러면 내가 언제든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마. 환란 중에 내가 너희를 건져주리라. 악한 자가 와서 만지지도 못하도록 내가 너희를 보호해주리라."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셔서 나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기만을 간절히 고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핍박을 받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황홀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눈 앞에 그려보면서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이런 일 저런 일이 땅에서는 중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나라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잠깐 지나가는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 3월에 6가족을 포함한 25명의 탈북자들이 북경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몰려들어가 한국행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들은 엄청난 절망에 빠져있었고, 처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사관 안에서 기다리면서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서 죽을지, 아니면 한국으로 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한국행이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제일 먼저 찾아온 감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살았다. 이제는 한국으로 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동안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추위에 떨면서 자던 것도 감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사관 직원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과거의 모든 일도 다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행기가 늦어져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도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가게 되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한국이 아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으며 살기에 세상에서 좋은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나쁜 일에도 감사할 수 있고, 하찮은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샘 솟을 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구원의 은혜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은혜에 취해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구원을 얻었는가를 알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흥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이런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세상에서 겪는 어려운 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일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흠뻑 젖어 있을 때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나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이 큰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값없이 얻었기 때문에 이 은혜 안에서는 좋은 일도 감사하고 나쁜 일도 감사하고, 큰 일도 감사하고 작은 일도 감사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구원 받은 자의 행복과 기쁨을 다시 한번 회복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절기예배 설교 / 부활절 설교 :: 부활은 우리의 믿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요 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아멘.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부활주일설교] 나같은 사람도 부활을 전하는데요

 

 

 

 

나같은 사람도 부활을 전하는데요

마가복음16;9-11


단체로 삭발한 교회

미국 미주리(Missour)주에 있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미용실에,

그날따라 많은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마다 하나같이 삭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은 50여 명 정도가 출석하는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미용사는 삭발을 요청하는 손님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상한 광신도들이 아니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골교회에 사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성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던 여중생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어린 나이에 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까지 마친 소녀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몇몇 성도님들이 병문안을 갔습니다.

소녀는 항암치료 중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 때문에 창피해서 외출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성도들은 모두 머리를 깎고 삭발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이 사연을 듣고 감동한 미용사는 지역 방송국에 연락했습니다.

이 여중생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주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드디어 부활주일날, 엄마는 자기 딸을 간곡히 설득하여 모자를 씌워 교회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교회 문을 연 순간, 모든 성도들의 빡빡머리를 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모자를 벗었습니다.

그 상황을 중계하던 방송국 기자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 교회를 나가게 된다면 이런 교회를 나가고 싶습니다.”

그 방송을 보던 많은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금요일 오후 3시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오후5시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빈 바위무덤에 장례를 치르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일등공신인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병사들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할 수 없도록 바위무덤에 커다란 돌로 닫아놓고 병사들을 시켜서 지키도록 한다.

아무리 커다란 돌로 무덤 문을 닫고,

병사들이 겹겹이 무덤 주변을 지킨다고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길은 없다.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다.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일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캄캄한 밤 시간을 지나고 이른 새벽시간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홀연히 다시 살아나신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부활하신 시간에는 유월절을 지나고 무교절 절기 기간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아침 번제와 초실절이라고 부르는 맥추절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물의 제사를 드리고 있고,

성전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당당하게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자가 누가 있을까?

사탄, 마귀가 가로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강한 권세, 공중권세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권세는 없다.

대제사장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는 있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두 눈 부릅뜨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로마제국이라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전 세계를 로마로’라고 하면서 전 세계를 정복한 권세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는 권세는 없다.

무덤이라고, 시신이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무덤이라 해도, 이미 죽은 시신이라 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어떤 권세도, 어떤 세력들도, 어떤 환경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로막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이미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으니까 부활하시고,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 부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믿거나 믿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은 역사적인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나타나신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서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셨다고 전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할 수 없다.

 

왜냐하면

① 나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고 제자들이 믿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들 남자들이고, 나는 연약한 여자 아닌가?

그것도 일곱 귀신에 걸려서 제대로 사람이라고 인정도 받지 못하던 여인이 아니던가?

지금이야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내쫓아주셔서 귀신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귀한 딸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하게 살지만 내 전력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② 여자인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가장 먼저 만나주셨다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수치를 안기는 결과가 되지 않나?

유대인들은 명예와 수치를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여자인 내가 먼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자들에게 명예롭지 않고 수치를 안겨다 주는 꼴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명예롭게 살아야 앞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되는 것이지 않나?

그러니 내가 여자인 내가, 그것도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경력이 있는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③ 남녀구별이 엄연하던 시대 아닌가?

여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나같은 여자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다고 증언하면 누가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서 자신이 부활하였노라고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시는 예수님.

빨리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

사탄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하였다고 증언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낙심하고 좌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들,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부활하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증언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찾아와서

“왜 믿음이 없느냐?”고 하시면서 책망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것은 다 보여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하고 염려할 때 예수님은 책망하시고 꾸짖으신다.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의 다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세워나가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를 비롯하여 11명의 제자들, 70명의 제자들,

120명의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전할 때

이들은 마리아가 전하는 부활의 소식을 믿을 수 없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나타나 주시고 책망하고 꾸짖으면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사도들로 세워 가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축복의 여인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최초의 여인이 된다.

 

하나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여인이 되어진다.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인이 되어진다.

예수님에 대하여 더욱 더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고 성숙해지면서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로 교회의 훌륭한 여성 지도자로 세워진다.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가 되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목격하는 여인이 되어진다.

수치의 상징이라는 여인이라고, 일곱 귀신에 걸렸던 여인이라는 과거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여인이 되어지고,

교회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인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위하여 훌륭하게 세움을 받는 여인이 되어진다.

초대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로서 강한 리더쉽을 가지고 교회의 여성들을 잘 이끌면서

사도들을 도와서 예루살렘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는 축복을 받는다,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핍박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서

흔들리는 약한 성도들을 이끌고 믿음을 세워가는 일꾼으로 세워진다.

*** 우리가 진정으로 전해야 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종교지도자들, 교주들은 한결같이 다 죽었다.

죽지 않았거나 다시 살아난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스스로 태양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바벨론의 이방종교를 만들어낸 니므롯도 죽었고,

달신이라고 주장하던 세미라미스도 죽었고,

별신이라고 하는 담무스도 죽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죽었다.

유교의 공자도 죽었다.

힌두교, 이슬람교의 마호멧도 죽었다.

천주교의 교황들도, 추기경들도 죽었다.

통일교의 문선명이도 죽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안산홍이도 죽었다.

이제 멀지 않아서 신천지의 이만희도 죽을 것이다.

스스로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장길자 여인도 죽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김일성이도, 김정일이도 죽었다.

그렇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탄 마귀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 기독교에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일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500여명의 무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자살하여 죽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선별하는 조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베드로는 선언한다.

 

행1:22에서 베드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고 하시면서 맛디아를 뽑아서 12명의 사도로 세우게 된다.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인류 최악의 사기사건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500여명의 무리들의 두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식사도 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단 몇 사람밖에 없다면

그들을 매수하여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얼마든지 거짓말했다고 하면서 덮어 쉬울 수 있다.

하지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적어도 500여명의 무리들이 보았다는데,

어떻게 500여명의 눈을 가릴 수 있단 말인가?

500여명의 무리들 중에서 120여명의 무리들이 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10일 동안 전심으로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된다.

이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어진다.

믿음의 표적이 나타나게 된다.

믿음의 표적을 행하는 주인공들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교회와 구령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지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목숨 걸고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의 시작이자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축복의 시작이자 축복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시작이자 믿음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시작이자 생명의 완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시너지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은혜의 최고봉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성도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고

나눌 수 있는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통로, 축복의 근원이 되어지는 사람이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입으로,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전하고 또 전하고 또 전하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아멘!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성령강림절] 성령의 충만함 / Advent of the Holy Spirit

 

 


제목 : 성령 충만함

말씀 : 엡5:15~18

1.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유일한 구원자라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여기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는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풍성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우리가 믿는 그 믿음대로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음으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을 따라 살아야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래야 비로소 그 믿음이 주는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동행해야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고 믿으면서 그래서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이 있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어둠 가운데 있으면서 빛의 은혜를 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 은혜를 누리고 못 누리고를 떠나서 믿는다고 하며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하고 그러면 분명히 예수님이 주시는 그 무한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건 말하나마나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 충만하게 받으면 정말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얼마든지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왜요? 때가 악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때가 악해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혜가 없으면 악하고 왜곡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악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올바른 분별력과 힘을 가지고 그걸 물리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얻게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세상의 왜곡되고 헛된 것들을 물리치고 진정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신도 하나님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죄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운데서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 어두운 영혼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게되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방향을 알게 됩니다. 사탄에게서 해방되고, 세상의 죄와 무지와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올바른 분별력과 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령의 받아야 합니다. 받되 한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지 못하면 어떻게 근근이 죽지 않을 만큼의 생명을 유지할지는 몰라도 세상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과 도전을 이길만한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게 되어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느라고 다니기는 다니는데 예수님 안에 넘쳐흐르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것은 못 받아도 별거 없습니다. 세상의 것 많이 받은 사람이나 적게 받은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그래봤자 죄인이고 그래봤자 다 근심걱정 시기질투 속에 지지고 볶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받으면 다릅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운명이 바뀝니다. 영생복락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살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물론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어서 자연인 그대로는 어떤 생명의 은총도 누릴 수 없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쁘시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어 생명의 능력과 은헤와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이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설령 억지로 간대해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오심을 다른 무엇보다 기뻐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그 영혼 속에 기쁨으로 찾아 가셔서 거기 계속 머무시면서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 즉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믿고 그러기에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에게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님과의 만남과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은총을 진실로 사모해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돈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돈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어디로 달려갑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을 달려갑니다. 오락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이런 것에 빠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역사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어디로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성령이 역사하는 곳으로 달려가게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예배드립시다. 말씀 묵상합시다.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무엇으로 성령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영은 오직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에 오직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로 대화할 때에 하나님과 우리 영이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믿음을 주시고 힘과 능력과 은혜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말씀 되새기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아 능력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1:14절을 보십시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4절을 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말씀 되새기며 기도에 힘썼을 때 드디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신다면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러면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이미 상당부분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도전과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것은 못 받아도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 가운데 있던 옛자아가 죽고 영혼이 소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 가지고 있던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새롭고 올바르고 살아있는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천국시민이 됨으로 거듭나고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니 거듭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든 알지 못하든 사탄의 지배 속에서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죄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며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죄와 무지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황하는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다 똑똑하고 잘나고 세상에 모르는 것 하나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실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완전히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세상에 지배당하고 세상에 취하여 세상 사람들이 살아 가는대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물론 성령은 생명의 영, 은혜의 영,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기시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의 풍성한 은혜과 기쁨과 능력을 평안과 위로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삶의 모습을 보면 흡사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물론 결과는 반대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과 마음을 술이 지배해버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다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이 내 마음을 지배해 버리니까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고, 음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술이 나를 지배해 버려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은 영적 육체적 마음적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 선한 영, 은혜의 영, 의의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와 분별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달려가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어렵고 힘든 일도 이기게 하십니다. 상황과 환경도 이기게 하십니다. 심지어 환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마침내 완전한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술이 내 정신 줄을 제 맘대로 조종하여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추하고 더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고,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곤해서 사람을 질려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에 취하면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지만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근심걱정을 조금쯤은 잊어버려 약간은 평안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건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잠시 약간의 정신적인 마취를 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즉 술에서 깨어나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생명과 평강과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과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근심 걱정이나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진정으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인하여 더욱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에 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취해 있지 않고 돈과 명예와 안일함과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와 세상 즐거움에 취해 있습니다. 심지어는 술과 마약과 향락과 도박에 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세상에 취해서 헌신과 봉사와 충성과 이런 거룩한 귀하고 복된 가치들을 고색창연한 옛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고, 술을 마셔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18절에서 술 취한 것을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3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여러분, 그래도 마셔도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들은 도대체 뭡니까?

여러분, 롬12: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보세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까? 그게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겠습니까?

여러분, 바로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왜곡된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이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 그래야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면서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대의 왜곡된 풍조에 휩쓸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꼭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절기설교-대강절 <은혜받은 성도>

 

 


제목 : 은혜를 받은 자여

말씀 : 눅1:26-38

오늘 대강절넷째주. 대강절(待降節) 혹은 대림절(待臨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혹은 임하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그토록 기다려야 하고 준비해야 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기뻐하며 전파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오직 예수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요즘 새벽 시간에 계속 여기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수, 기독교의 핵심을 다시한번 살펴보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명한 믿음과 분명한 확신을 가지며 그래서 더욱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기쁨을 나누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말그대로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없다. 안된다. 인간은 하나같이 죄인이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아무리 선해도,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죄인은 죄인이다. 그런 인간으로서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같이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건져주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에게 빛이 있어야 남에게 빛을 비추지 않겠는가? 자신이 알아야 가르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주지 않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오실 수밖에 없었다.

2.구속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육신하신 그 자체가 엄청난 사랑이며 엄청난 구원의 행위이시기지만 거기서 끝나면 소용이 없다. 이제 구체적으로 구원을 위한 액션을 취해야 한다. 생각해보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기껏 구조대가 와서는 그저 구경만하고 있다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본격적으로 구조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물론 많다.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셨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지엽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진짜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마지막으로 하신 일 곧 십자가의 죽음의 진짜 그분의 사역이었다. 그것만이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져주는 그러니까 진정한 생명을 줄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가 문제다. 죄가 인간에게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저주와 증오와 갈등을 가져다 주었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를 가져다 주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주범은 인간의 내부속에 도사리고 죄된 본성이다. 그것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문제의 해결도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다만 임시 덮어두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저주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래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도 할수 없다. 해서도 안된다. 해도 소용이 없다. 자격도 능력도 사랑도 권한도 아무도 없다. 오직 성육신하신 하나님께만 있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해도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안된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가 살리지 못하는 주제에, 자기도 죄인인 주제에 누가 누구를 살리고 용서하고 새 생명을 주겠는가?

3.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역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질때 구원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시고 우리 죄악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런데 만약 죽고서 그것으로 끝이라면 이 역시도 구원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도 죽음으로 끝나버렸는데 누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사망의 권세에 지고 말았는데 누구를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줄수가 있단 말이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온갖 고통과 멸시와 저주를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가 당한 저주와 멸시와 고통과 죽음은 단지 우리가 받을 저주와 고통과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분은 결코 그와같은 어둠의 세력들을 당해야 될 이유도 없었고, 거기에 억눌려 있을수도 없는 분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과를 담당하기 위하여 당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류의 구원의 위한 아픔과 저주와 죽음을 당하신 후에는 그것을 이기시고 나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죄와 죽음의 세력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시다.

그렇다. 이 세가지 기독교의 핵심을 잊지말라. 성육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이 세가지 인류를 구원했다. 이 세가지 사역을 하신 분도, 하실 수 있는 분도, 하셔야 했던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분 뿐이셨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하여 이땅에 오실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말한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러자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묻는다. 아니 저는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요. 이 무슨 말씀입니까? 약혼은 했지만 아직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다시 말한다. 마리아야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네게 임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네 태속에 생명의 주실 것이다. 인간에게서 온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네 태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어주셔서 네가 잉태를 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란다. 그분께서 영원히 왕노롯하시며 그분께서 세상을 구원해 주실 것이란다.

그러자 마리아는 말한다. 저는 다만 주님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다만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참으로 이 엄청난 사실을, 이 놀라운 사실을 일찍이 듣고 깨닫고 믿고 오늘까지 따르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마리아가 하신 말씀을 보라. 28절에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30절에서 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주의 계집종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오늘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자.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순종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 구속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영접했다. 이 엄청난 생명의 진리를 알았다. 믿었다. 구원받았다. 이보다 놀라운 은혜는 없다. 선물도 없다. 엄청난 사건도 없다.

이제 대강절 절기를 맞아 새롭게 영접하자. 깨닫자. 준비하자. 감사하자. 영광을 돌리자. 찬양하자. 기뻐하자.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누리자.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전하자.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생명의 말씀 : 성령강림절설교] 성령 받으라

 

 

 


제목 : 성령이 충만할 때

말씀 : 행7:54~60

 


1.왜곡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러디어드 키플링이라는 사람의 작품 중에 정글북(The Jungle Book, 1894)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만화영화로 제작(1967년)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인도의 정글을 탐사하던 한 부부가 아기를 잃어버려 정글 속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는데 흑표범 바기라에게 구출되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됩니다. 늑대들은 이 아이에게 모글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글의 법칙을 가르치며 양육하여 모글리는 늑대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모글리가 소년이 되었을 때 평화롭던 정글에 인간을 극도로 싫어하고 포악하기 짝이 없는 호랑이 쉬어칸이 나타납니다.

그러자 늑대들은 모글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이미 동물과 같은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글리는 정글에서 살고 싶어서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자 쉬어칸이 모글리를 해치려고 찾아다니는데 다행히 회색곰 발루의 도움으로 모글리는 위험에서 벗어나 결국 인간 마을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 한동안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정글에서는 폭군 쉬어 칸이 횡포가 점점 심해져 동물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마을까지 내려와 가축과 사람을 물어가는 만행을 저지르자 모글리는 다시 정글로 돌아가 쉬어칸을 해치우고 정글의 영웅이 되어 평화로운 정글을 만듭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다시 인간마을로 돌아와 인간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서로 속이고 빼앗고 싸우고 죽이는 등 힘 있는 자들의 탐욕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있는 사회악에 대한 경종을 울리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협력하는 곳에 행복이 있음을 보여주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이러한 일반적인 교훈 말고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글리는 왜 늑대인간으로 살아야 했는가 하는 것과 왜 인간들은 그렇게 끊임없는 탐욕 속에서 서로 속이고 빼앗고 죽이고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환경 때문입니다. 모글리는 늑대와 함께 늑대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웠기 때문에 늑대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싸우고 빼앗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무지 속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기쁨과 행복이 있는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왜곡된 세상에서 그러한 어둡고 왜곡된 세상을 보고 듣고 배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물질만능주의적인 왜곡된 인생관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있기 때문에 온갖 부조리와 불의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자칫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이 옳은 것인 양 착각하며 그 쪽으로 끌려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롬12: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이 너무나 왜곡되고 부패되고 혼동 속에 빠져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오직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하고도 진정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성령충만하면 모든 것을 이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야 죄와 무지가운데 육신의 욕망을 끌려 살아가지 않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축복의 길을 바르게 알고 그 길로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은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능력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으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바르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서 그 길로 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생명의 길로 갔던 스데반집사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55절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여러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하나님 우편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굉장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때가 언제입니까? 행7:58절을 보겠습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러니까 이때는 스데반집사가 복음을 전한다고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붙잡아다가 공회에 세우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고 모함하여 이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이 변론을 하였으나 그들은 도리어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며 죽이려고 덤벼들어 결국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맙니다. 이와같이 복음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이 때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돌로 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순교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6:15절을 보면 이 변론이 있기 전에 그가 공회에 앉아 있을 때에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데반 집사님은 공회에 붙잡혀 와서 자기를 죽이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도 얼굴이 천사처럼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국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리어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의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으로 가득 차니 근심이나 걱정이나 불안도 사라졌습니다. 눈 앞에 다가온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도 없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사라지고 도리어 그들이 불쌍하고 가련해져 그들을 향해 저주나 욕설을 퍼붓지 안하고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유혹도 미움도 원망도 증오도 불평도 다 이기게 됩니다. 환경도 상황도 마귀사탄도 핍박도 다 이기게 됩니다. 자신의 약하고 부족한 것도 이기게 됩니다. 세상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이 덤벼들지도 못하고 설령 덤벼들어도 성령의 능력으로 단번에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행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숨고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목숨을 바쳐 주의 복음을 전하는 능력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묵상하며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약하고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들과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고 승리하며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충만하면 밝게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능력있는 삶이 될 뿐 아니라 그 인생이 밝게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행6:15절을 보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성령충만한 스데반은 그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이 어떻습니까? 아름답고 밝게 빛나고 깨끗하고 순진하고 선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당시 스데반집사님은 만사형통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도리어 공회에 잡혀 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은혜의 영, 평강의 영, 능력의 영,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그를 사로잡음으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고 그 심령속에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주셨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도 얼굴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밝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얼굴에 웃음이 있고, 말도 밝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찬송도 기왕이면 밝고 힘차게 하고, 여하튼 모든 영역에서 밝게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 속으로 ‘아이구 목사님 뭐 좋은 일이 있어야 기쁘게 살지요. 촌에서 무슨 그렇게 좋은 일다고 기쁘게 즐겁게 삽니까? 형편도 상황도 조건도 뭘 그렇게 좋다고 항상 웃으며 삽니까?’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만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사도바울만 하겠습니까? 스데반 집사님과 바울 사도나 우리들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매를 맞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감옥에 갇히고 바다와 강에서 고난을 당하고 강도를 만나고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질병까지 있었지만 항상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2:17절에서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살전5: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성령님이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때에 주님이 얼마나 흡족해 하시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탄식하고 원망하고 슬퍼하고 뭔가 그늘진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축 쳐져서 감사와 기쁨도 모르고 탄식하고 원망하고 무언가 한이 맺힌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런 자녀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성령안에서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가 행복합니다. 내 가족이 행복합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교회를 밝게 만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면서, 불평 불만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져서, 사람이나 사회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얼굴이 사나와져서 전도를 한다면 누가 그 전도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 자기 자신이 기쁨이 없는데 무슨 천국을 말하겠어요. 원망과 불평 탄식 비판하면서 무슨 하나님 나라를 말하겠습니까? 평안과 기쁨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천국이 있다고 전도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먼저 내가 기쁘게 밝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면 입으로 전도하지 않아도 전도가 됩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는 삶은 결코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삽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고 환경이 좋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으로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여러분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만드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성령충만하면 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를 바라보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5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가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 어디를 보았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그 영광스러운 나라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셨다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빛나는 모습이었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렇게 남겠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한 무슨 미운 감정이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이를 갈며 덤벼들었지만 스데반은 너무나 평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이제 곧 이 죄많고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저 영광스러운 품에 안길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죄와 무지와 미움 속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 동족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너무나 안타까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기뻐하면서 영광스러운 주님 품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위를 바라보면 문제는 끝납니다. 문제는 아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정말 별거 아닌 땅엣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고, 땅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래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엣 것은 본래 문제가 많습니다.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나도 너도 상황도 환경도 조건도 인간도 동물로 식물도 자연도 다 온전치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습니다.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점점 우리를 옭아매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키고 서로 속이고 빼앗게 만듭니다. 그래서 행복은커녕 점점 더 갈등과 고통과 아픔과 불평을 야기 시킬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골3:1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과 목적과 위안거리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망과 낙심과 불평 밖에 남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 영광의 나라에 우리의 진짜 소망과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상황이 꼬이는 것처럼 여겨질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좀 미운 마음이 생기려고 할 때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절망감이 찾아오려고 할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세상이 원망스럽고 불평 불만이 찾아오려고 할 때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위로와 평강과 기쁨과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금 힘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면 영광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죄와 무지속에 있는 세상, 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인생, 썩어 없어질 것들이 있는 땅엣 것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총과 소망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여건을 이기고, 모든 부정적이고 칙칙하고 어두운 세력들과 모든 미움과 원망과 불평도 이기고 주님 안에 있는 빛과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진정으로 생기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부활절 설교] 예수님 부활의 축복

 

 


제목 : 예수님의 부활의 축복

말씀 : 마28:1-6

 


1.놀라운 축복의 사건, 부활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너무나 감격스럽고, 너무나 큰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세상의 그 어떤 날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크게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입니다. 육체가 병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보다도, 금덩어리를 산더미처럼 얻게 된 것과도, 세상의 가장 큰 권세를 얻게 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요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을 열저 젖히고 나오심으로 예수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은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건강이나 권세나 모든 부귀영화는 며칠 후면 다 사라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6:5에서는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믿고 그 분을 심령속에 모셔들인 자는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어둠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는 진실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세상의 모든 어둡고 추하고 칙칙하고 절망적인 것들을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전인적 생명을 부활시키신 사건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덤권세,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 다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 혼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생명을 주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늘 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기 계시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무덤입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으스스하고 캄캄하고 절망과 두려움과 공포와 어둠만이 있는 곳입니다. 마귀가 역사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덤속에서 당할 그 고통과 절망과 캄캄함과 두려움과 공포와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잠시 무덤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언제까지 거기 계실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하셔서 잠시 맛보아야 할 과정일 뿐이요, 예수님께서는 그 더럽고 냄새나고 절망적인 무덤의 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가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고, 그 부활의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으신 게 아니라 죄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죽음과 절망과 고통을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영과 혼과 육신이 다시 살아 전인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돌아가신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성령을 통해서 승리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그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승리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이 우리 가운데 힘을 쓰지 못합니다. 더 이상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절망과 더러운 것들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승리의 주님이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상황과 어둠의 세력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더 이상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와 사망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등의 마귀사탄의 권세에 억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인도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사망과 고통과 연약한 것과 절망적인 것들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믿음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온갖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시는 주님을 친히 보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하기 전에는 형편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앞에서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끝났다고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을 만나 주셨을 때,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셨을 때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나 절망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혹은 십자가위에서, 혹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혹은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어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분이심을 명백히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20:28절에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고백했지 않았습니까?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인도에 가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주님의 뒤를 따라 순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믿음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을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 잘난 지성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를 접어두고 천지의 창조주로써 생명의 주관자로서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져본 사건입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만져 본 것을 기록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걸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오직 그들 자신이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는 완전한 부활의 능력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런 분명한 부활 신앙을 살아가실때에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사랑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의 이간질로 시작된 인간사이의 갈등과 미움과 고통을 깨트리시고 사랑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화와 미움과 저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마귀사탄의 역사였습니다. 사탄은 먼저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합니다. 그리고 더 부추겨서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먹게 함으로써 결국 아담을 공범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담은 사랑하는 아내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 사이에 갈등과 미움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과 미움은 집안 전체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와 질투로 죽이게 됩니다. 가족관계가 깨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왜곡된 관계는 더 나아가 이웃과 이웃사이에 불신과 미움과 갈등을 유발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는 가정, 지역사회, 국가 그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투쟁과 갈등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시기와 미움과 갈등이 편만해 있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원수조차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몹쓸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에게 침을 뱉고, 뺨을 치며 온갖 희롱을 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상)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결국 사랑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와 멸시천대까지도 가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떨쳐 버리고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을 부활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점도 깊이 묵상하여 모든 미움과 저주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주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에게 혹시 미움이나 시기나 저주나 질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남아 있다면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모든 생명과 사랑과 은혜를 부활시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의 심령속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활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부활의 기쁨이 더욱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소망을 부활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한마디로 하늘나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고, 죽었던 자를 살려 주심으로써 천국의 모형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하늘나라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맛보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실 새로운 세계에서나 완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있는 인생이 받게 될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만으로는 천국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물리쳤으면 이제는 새생명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죄를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그 깨끗하게 씻어진 공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로 생명으로 거듭나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하고 낙향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님을 알고,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과 소망 속에 다시 모였습니다. 주님의 분부대로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망과 꿈과 생명을 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4:33절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비겁하게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진정한 생명의 주님이시오, 부활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고 소망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사망과 마귀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원수는 패한 것입니다. 죄도 패하고, 마귀사탄도 패했습니다. 죽음도 패하고,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원수도 절망도 다 패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그 승리는 예수님의 것만이 아니라 그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보내며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찾아 오셔서 우리를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믿음을 회복시키고 천국의 소망을 주시는 주님과 더욱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

절기설교 종려주일설교

 

 

 

제목 : 십자가

성경 : 눅22:39-46                  
                             
예수님의 고난이 오늘 오후 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일년 중에서 이번 주간이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며 장엄하고 뜻이 있는 주간에 해당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픈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고난주간 첫날인 오늘은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이라고 합니다.  2천년 전 오늘 에수님은 니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 때 군중들은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왕으로, 메시야로, 열열히 환영하며 환호 했습니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려주일" 이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들이 이 날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날인 내일 월요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날 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주님은 불결하고 속된 시장바닥과 같은 문란해진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는 분노하시며 장사꾼들을 모두 내 보내시고 성전을 척결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길을 가시다가 죄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으로 나타 내십니다.  타락할대로 타락해 버린 예루살렘의 도성, 그리고 그 보다 더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쏟으실 저주의 진노를 대신 나무에게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날에 있었던 일 입니다.
셋째날인 모레 화요일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날 입니다. 앞으로 40년만 있으면 망해 버리고 말 이 도성의 앞날을 주님은 일찍 알고 계십니다.  그 날, 이 도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그 때를 보시면서 그것도 모르고 오늘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저 우매한 민중들을 바라 보시기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결국 이 도성은 기원 70년에 로마의 디도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110만명이 불에 타 숨지고 도성은 산산이 조각나는 수난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행렬을 따르면서 눈물 짓던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 이르셨
던 것입니다.
네째 날인  수요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모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루를 휴식하신 날 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가룟유다는 열심히 돌아 다니면서 예수를 팔기 위해서 흥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날 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세족 목요일(洗足 木曜日) 이라고 부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안은 것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음껏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
을 이끄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 가십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에 있었던 일 입니다.
여섯째 날인 금요일은 고난주간의 절정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 입니다.  이 날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군중들에게 맡겨져서 가시관을 쓰시고, 붉은 죄수복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가서 죽으십니다.  이 날이 기원 29년, 니산월, 15일,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서 여섯시간 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성 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 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은 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매장되어 토요일을 무덤에서 지내시고 제 3일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 하십니다.  모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 하시고, 모든 부조리를 일소 하시고, 보란 듯이 살아 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새벽이 부활의 아침 입니다.  그 후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오늘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 되어버린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를 말할 때 십자가를 빼 놓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그렇게 아름답거나 유쾌한 것도 아니고 뜻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통나무 두개를 서로 엮어 3 M 높이로 세워 놓고 그곳에 흉악한 죄수들을 잡아다가 매달아 놓고는 진을 빼서 죽이는 곳, 그곳이 십자가 입니다.  이를테면 사형틀 입니다.  바로 이같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창조자가 피조물들에게 처참하게 죽으신 자리 입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 들이고 10년 후에 가서 화폐에다 이 십자가의 모형을 새겨 넣었습니다.  30년 후에 가서는 죽은 사람의 관 위에다 고난의 표시로 이 십자가의 모형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4세기 후에 가서는 교회들 마다 십자가를 만들어서 종탑 위에 세우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 것이 오늘 날에 와서는 교회들 마다 십자가를 높이 지붕 위에 달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그 뒤 부터는 사람들은 고난을 표시할 때느 의례히 십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몸에 지닌 질병을 가시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라는 뜻 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는 십자가가 주어졌다고 말 합니다.  근심거리가 생겼을 때도 사람들은 십자가가 생겼다고 말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 마다 가보면 십자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겉에서 보면 행복하게 보이는 집에도 좀 깊이 들여다 보면 나름대로 다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십자가는 네가 지고 가라" 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다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 입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남이 대신 져 줄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나 밖에 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십자가인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마음 속으로 생각 하기를 "내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내게 주신 십자가는 너무나 커,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이렇게 큰 십자가를 주셨는지 몰라"하고 푸념하며 불만스럽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언덕 길을 올라 가고 있는데 그
곳에 십자가가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 지고 가거라",  이 사람은 너무나 반가워서 지고 있던 십자가를 집어 던지고는 가장 작은 것으로 골라 졌습니다.  빛이 나고 보석으로 꾸며 있고 가볍게 생긴 것으로 골라서 져 보니까 묵직했습니다. 그래서 속을 들여다 보니까 그곳에는 아품과 고뇌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다른 것으로 골랐습니다.
이번에는 장미 꽃으로 장식해 놓은 십자가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지자 마자 찔러대기 시작하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한숨과 질고가 가득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다시 고른 것이 지금 까지 자기가 지고 있다가 무겁다고 집어 던진 그 옛날의 십자가를 골라 다시 졌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아니, 그것은 네가 무겁다고 던져버린 그 십자가가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이 가장 가벼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이 그 십자가를 지니까 그렇게 가벼웠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남들은 모두 십자가가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있어도 모두 가볍게 보입니다.  내게만 제일 무거운 십자가가 주어진 것 처럼 생각되어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죽하면 그 고난들을 십자가라고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요. 지금 겟세마네 동산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제자의 배신으로 체포 됩니다.  지금 산 아래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금요일,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누가 대신 져줄 수가 없습니다.  져줄 일도 아닙니다.  어떻게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절박한 시간, 너무 괴로와서 몸부림을 치며 기도를 합니다.  혼자서는 너무나 고독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얼마나 외로운 시간 입니까.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래서 잠만 잡니다.
이같은 모습들이 예수님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 하나는 배반을 하였고, 세 제자는 잠만 자고 있고, 호산나 하면서 열광 하던 그 군중들은 내일이면 폭도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운명의 시간은 자꾸만 다가오고 있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한 밤, 그것이 겟세마네의 밤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심각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주석자는 그 때 예수님이 바위를 부여 잡고 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 때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데 핏방울 같았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2세기의 교부였던 저스틴과 이레네우스는 문자 그대로 그것은 핏방울이었다고 해석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 입니다.  누구를 위한 고난 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같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밤새 기도하고 하산 할 때 산 밑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체포당한 에수님은 빌라도 앞에 가서 심문을 받으시고, 죄수의 몸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강도요, 살인자요, 방화범인 바라바는 석방되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아픈고 어두웠던 면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죽음은 이렇게 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죽음은 억울한 죽음 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그렇다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예수의 죽음을 군중들 만큼은 막아 주었어야 합니다. 군중들 속의 단 몇 %만큼은 그 시대를 옳게 분별하고 직시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약자를 보호하는데 그 군중들을 이끌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민중의 힘 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어떠했습니까. 엇그제 까지만 해도 호산나 하면서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열광하던 군중들이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입으로 이번에는 살인범 바라바를 석방하고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정치에 이골이 난 빌라도가 그 순간을 놓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그 죄 값을 너희가 받아라" 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우매한 군중들이 화답하기를 "그 핏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머리에 돌리소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그 죄 값을 얼마나 혹독하게 치루었습니까.  예수 사후 받은 혹독한 죄 값 말고도 근대역사 속에서 그의 자손들이 나찌에게 당한 수난이 얼마 입니까. 당시 인구 천만명 가운데 600만명의 백성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작위로 전쟁도 아닌 때에 학살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군중들이 왜 이렇게 까지 우매했습니까.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백성들을 "권고"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고" 라는 말은 "Epeisan"이라는 말 입니다.  한 사람이 대중 앞에 나서서 부추기는 선동을 "에페이산"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가만히 있는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말 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 입니까.  그래서 정치인들의 선동에 군중들이 놀아나면 안됩니다.  이 땅에 더 이상의 선동정치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정치학자는 "군중은 우매한 무리들이다, 군중을 잘 이용만 하면 천부의 독
재자가 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얼마나 처절하고, 외롭고, 고독한 자리 입니까.  그래서 견디다 못해서 절규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소리가 그냥 나올 수 있는 소리 입니까. 피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인류에 모든 고통과 질고와 죄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한 몸에 걸머지고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하나님을 불러 가며 고뇌 속에서 절규하는 이 예수의 처절한 모습, 이 모습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누구를 위한 고난이고,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피요 아픔 입니까.
이렇게 절규하건만 정작 인자하기만 하시던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일언반구 말씀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 한 마디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정을 어떨 것이며, 또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말씀 한 마디가 없으십니다. 어디에선가 마음 아파해 하며 고뇌하고 계실 것이 분명한데 그 하나
님은 끝내 절규하는 독생자를 외면 하십니다.
왜 입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 때문 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 라는 신학자는 십자가 속에 들어 있는 이같은 하나님의 고뇌하시는 아품을 모르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입니다.
여러분, 어떠 십니까.  오늘 고난주일 아침에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생각 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며 부르짖는 고뇌에 찬 저 절규의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독생자의 저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내 세상 구원을 위해서 아들을 포기하시는 하나님의 저 저미는 아픈 마음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그 고난에 만분지 일이라도 동참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 내 앞에 닥칠 십자가도 기쁘게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주일의 아침에 부활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블로그 이미지

헤나메오

영화,음악,여행은 경제로 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