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성탄절예배설교 -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

 

 

 

제목 :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세주

말씀 : 마1:18-21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의 가정위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지역 주민 여러분과 함께 성탄절을 맞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저희 교회를 찾아주신 분들을 다시한번 진심으로 환영하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이 성탄절은 우주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이 지구 뿐 아니라 우주 공간 전체에 걸쳐서 아니 우주 뿐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성도들이나 천사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영원토록, 그리고 민족이나 혈통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전 우주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날이요, 은혜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어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와 사망과 사탄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어떤 날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이땅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박수를 치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서로 간에 사랑과 기쁨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축복의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이 땅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

그렇다면 여러분, 도대체 오늘 성탄절이 어떤 날이기에 그렇게도 온 우주 최대의 위대하고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씻어주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고,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해방되고 평화를 누리고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켜주고, 서로 사랑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도 결국 다시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냥 늙고 병들고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와 공존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십시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데 어떻게 구원하느냐 죄에서 해방시켜서 구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10:10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잘먹고 잘살게 해 주기 위하여 혹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말씀하는 생명은 단순한 육체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주셨던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을 사랑하며 바르게 진실하게 아름답게 깨끗하게 살아가며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영원히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 빠져 이 생명을 잃어버림으로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죄와 무지와 어둠 속에서 온갖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과 폭력과 추함 속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백성 삼아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단순히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잘먹고 잘사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단순한 세상적인 평화를 주려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시켜 천국의 은총을 영원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이 영원한 생명,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우선적으로 이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인간적으로 아무리 서로 사랑해도, 아무리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지상 최고의 권세를 얻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인간적으로 사랑해도 죄인에 불과하고, 아무리 재물을 쌓고 권세를 누려도 그야말로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잠시 세상에 살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갈 때에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고, 이 생명을 얻으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 누구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천하없는 성인군자나 영웅호걸도 할 수 없고, 달나라 별나라 아니라 우주 끝까지 갈 수 있는 과학 기술로도 안됩니다.

이 죄의 문제는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지혜와 권능과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뿐입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들은 다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도 능력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하셔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영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부활의 생명을 얻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이 자기 죄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남이 대신 죽어준다고 어떻게 내 죄가 용서되느냐고 말씀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일평생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도 안되고, 죽도록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천개만개 따도 안되고, 세계 제일의 권세를 얻어도 안되고, 천하제일의 부자가 되어도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자기 마음만 똑바로 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천하없는 성인군자라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죄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쩔 수없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어떤 분이 깊은 물에 빠졌습니다. 이 사람은 헤엄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하면서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힘으로 올라오라고 하면서 내버려 둬야 하겠습니까? 배를 보내든지, 구조대원을 보내든지,줄을 던지든지 어떻게든 이 사람을 구원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의 수렁에서 건져 주러 오신 것입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도저히 올라올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그러면 저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성탄절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진정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받고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어 이 땅에서도 천국의 은총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원한 천국을 주신 예수님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이 죽으면 그만이지 천국이 어디 있느냐, 가 보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여러분, 아닙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신은 땅에서 왔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죄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들어간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분은 그럼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고 묻습니다. 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4:17에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또 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설령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아도 그렇습니다.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석가모니와 공자(혹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세계3대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너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죄 용서받고 천국에 갈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받아들이든지 만약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산다든지 천국과 지옥이 있다든지 하는 말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어째서 성인이라고 부른단 말입니까?

그러면 또 어떤 분들은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성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책으로 세계 2,5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수십억의 사람들이 읽고 인간이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지 알게 되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들이 바보라서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아니 그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과학의 법칙을 몰라서 부활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믿겠습니까?

그러면 또 예수님 안 믿는 수많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은 바보라서 그 사실을 안 믿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을 안믿는 분들 중에도 정말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과 육은 차원이 다릅니다. 육적, 물적인 것은 세상의 원리와 법칙아래 있지만 영혼은 세상의 육적 물적 이성적 법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기껏해야 3차원의 세계지만 영적인 세계는 4차원 5차원 백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어두워져 있으면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훌륭한 과학자들이나 그밖에 위대한 분들은 세상 지식도 잘 알고 영적인 지식도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세상적인 지식이나 인격적으로 훌륭하지만 영적인 지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세상적으로는 똑똑하지만 영적으로는 어두운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식과 영적인 지식이 모두 밝은 사람들의 판단이 더 옳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영적존재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단코 여기서의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말미암아 무지와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8:1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실제로 여러분, 인간이 스스로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이 처음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살다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처음 생길 때 있었나요? 죽어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맛보았나요?

여러분, 이것은 오직 영원전부터 영원후 오직 유일하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통해서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주셨고,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성탄절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무지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래서 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세계 역사상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전 우주 공간에 걸쳐서 가장 기쁜 날인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류를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살리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우리 인류가 진정한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축복속에 영원히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눅2:10,11절에서는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에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진정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탄과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해방자, 자유가가 될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과 고통에서 해방 될 것입니다. 모든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에서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진정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가정과 이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성탄절에 온전히 예수님을 모심으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여기서 누릴 천국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그러나 하오나 하나님 아버지, 아직도 세상에는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여,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와 무지속에 있는지 깨닫게 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먼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모든 이웃들에게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과 사랑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나누어 줄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죽음의 길로 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고, 가난과 핍박과 억압 속에 있는 자들에게 소망의 빛이 되고,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에 사랑의 빛이 되고, 거짓과 모함과 술수가 있는 곳에 진리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진실로 이 땅 만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참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강 속에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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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째주 대강절 둘째주일예배 설교

Second Sunday Advent Worship Preaching

 

 

 

 제목 : 전도하면서 성탄절을 기다리자

 말씀 : 누가복음 2:15-17절

 
   예수님의 성탄절 전 4주간을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대강절이되면 매주 초 하나를 켜고 성탄절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성탄절을 기다리게 됩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대강절 입니다. 지난 주의 첫번째 촛불의 의미는 "이웃을 도와주면서 성탄절을 기다리자 "였습니다.


   오늘 두 번째 촛불은 "전도하면서 성탄절을 기다립시다" 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전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일이 바로 전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모든 예언의 말씀이 거의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겠다고 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들이 온 세상 땅 끝까지 전도할 때 오십니다.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으신 것은 아직도 땅 끝까지 전도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에는 더 많은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합시다.


  이스라엘 나라는 백년 동안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가 남북으로 갈라져서 북은 이스라엘, 남은 유다 나라로 나뉘어졌다가 북쪽 나라는 앗수르에게, 남쪽은 바벨론에게 망한 후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약 2500년 동안 독립 국가를 세워보지 못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원은 그 옛날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독립해 주기를 소원했습니다. 이런 꿈이 점차 발전하여 메시야 예수님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하고 맞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만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였습니다.

 

  그 외에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야를 경배하거나 맞이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후 여러 날이 지나서야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하고 돌아갔지만, 이로 인해 헤롯 왕의 노여움을 피하여 아기 예수님은 멀리 애굽으로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금년 2006년  성탄절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널리 알리면서 성탄절을 맞이 해야 하겠습니다. 많은 친구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전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독일의 북쪽 케스말이란 산림 지대에 튜톤 족이 도울이라는 위뢰의 신을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이 산다는 나무에다가 1년에 한 번씩 어린이를 잡아 제물로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선교사 웰프렐이 성탄절 전날 이곳에 전도하러 왔는데 마침 튜톤 족이 모여서 추장의 아들을 잡아 도울 신에게 바치려고 칼로 어린이를 죽이려는 참이었습니다.


  웰프렐 목사님이 뛰어 들어가서 어린이를 구하고 동시에 그 나무를 칼로 찔렀더니 그 순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나무를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어린이를 구하고 제사하는 법을 폐지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튜톤 족들은 웰프렐 목사님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울 신(神) 이 있던 나무를 모조리 찍어 버렸습니다. 다음 해 우연히 신(神) 목이 섰던 자리에 아름다운 전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습니다.


  그들은 전에 자기들이 우상을 섬겼던 것을 뉘우치며 전나무를 캐어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다가 장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오면 그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교회와 가정에 장식을 하여 놓은 후,

 

  미신과 죄악에서 해방된 기쁨과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축하하는 풍속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죄에서 해방을 받는 일 입니다. 우리 나라도 옛날에는 많은 우상을 믿음으로 인해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서부터 우리들도 미신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빨리 예수님을 믿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올해 성탄절은 이렇게 예수님을 전도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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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성탄절 예배 설교 (예수님 탄생과 성탄의 진리)

 
 

 


성탄의 진리 누가복음 2:8-14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역사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수다한 기록들 가운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과거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매장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의 기록들 중에는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을 동안 그 사건이 영원히 살아서 생각나게 하고, 기억나게 하고, 감격하여지게 하고, 기쁨을 샘솟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결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잊혀져 버릴 수 없는 살아 있는 역사가 있습니다. 말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행동하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역사가 주는 힘입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는 과거 어느 역사의 시점에 있었다가 사라져 버린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는 역사의 한가운데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현재 여기 세상에 숨쉬고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사람들 속에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탄 진리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 성탄의 영광이 그리스도인에게 빛을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멋진 승리의 삶을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1998년의 예수 성탄을 맞으면서 또 다시 '성탄의 진리'를 만나보기 원합니다.


Ⅰ. 예언된 진리입니다


사실상 전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이 사실을 가리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예수 탄생의 예언은 더 내용적이고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예컨대,


1. 예수 탄생의 방법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탄생 74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2. 그 이름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을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사 8:8-10).

하나님의 천사(가브리엘)는 마리아와 정혼했던 청년 요셉에게 현몽 할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하였습니다. 이 천사의 예언은 먼저 마리아에게도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눅 1:31).


3. 예수 탄생의 시기와 나라와 장소가 예언되었습니다

 

① 예수 탄생의 시기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히 1:2)라고 하였습니다.

「때가 찼을 때」라고 하였습니다(엡 1:9, 갈 4:4). 이 사실을 역사적 시기로 표현하기를「헤롯왕 때」(마 2:1)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1-2절에는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께서 탄생하였습니다.

② 예수가 탄생할 나라는 유대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 1절에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③ 그리고 예수 탄생의 지역까지 예언하기를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1).

이는 선지자 미가에 의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왕도 예수께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 때문에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마 2:3-6).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에 대한 예언은 여자의 후손으로(창 3:15, 갈4:4-5),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창12:3, 마 1:1), 이삭의 자손으로(창 17:19, 눅 3:34). 야곱의 자손으로(민24:17, 마 1:2), 유다 지파 중에서(창 49:10, 눅 3:33), 다윗의 위를 상속할 자로(사 9:7, 눅 1:32, 33) 예언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Ⅱ.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처음 천사에게 들은 당사자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때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6-35).

천사는 요셉에게 현몽할 때도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


성령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간섭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믿음이 일어나도록 역사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38). 요셉도 잠이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의 분부대로 행하여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4-25). 마리아의 고통과 요셉의 번민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풀려진 것입니다. 그 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의 성탄 신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가 된 것입니다. 곧 사도들의 신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의 기독교회가 한결같이 고백하여 오는 신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주의에 속한 구원 종교임을 입증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그 말씀은 태초부터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태초'는 시간 전의 영원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일입니다. 예수 성탄의 진리는 자연주의, 이성주의가 아닌 초자연주의에 속하는 진리입니다.


 

Ⅲ. 구원의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 성탄은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마 1:21)

 

요한복음 1장 11절에도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2.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은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 중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기 땅에 있던 자기 백성을 가리켜 잃어버린「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님은 이 죄인들을 비유하기를 「병든 자」라고 하였습니다(막 2:17). 사도 베드로는 제각기 자기 길로 가버린 길 잃은 양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벧전 2:25).


3. 그의 오심은 이러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도「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5).


4. 죄인 구원은 오직 예수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드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란 팔려가 버린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대신 지불하는 몸값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희생함으로 죄 값인 사망을 지불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18-19).


5. 바로 이것이 성탄의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에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탄생은 좋은 소식, 곧 복음(福音)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온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구원만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Ⅳ. 역사적 진리입니다


예수 성탄의 사건은 전설이나 신화나 혹은 미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권위 있는 역사가 요세퍼스 사기에도 '이 때에 예수라고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기투스(Tacitus)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에 대하여 말하는 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큰 무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베리오 황제 때에 유대의 감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된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유래하였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 탄생의 역사성에 대하여 바로 말하기를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한 사실입니다(마 2:1). 헤롯왕이 역사적인 인물이 확실하다면 예수 탄생 역시 역사적 사건이요 사실이 아닌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령을 내리고,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번째 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때 호적령을 따라 다윗 집 족속인 요셉이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올라간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어간에 베들레헴의 어느 구유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눅 2:1-7)! 무엇보다도 예수 탄생은 역사의 신기원이 되어버린 사실이 역사의 진리임을 보여줍니다. 역사의 연호는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주전(B.C.)과 주후(A.D.)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역사의 연호가 지금 1988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오늘의 인류는 예수의 역사적 탄생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헤르만 바빙크(H. Bavink) 박사는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70인역(LXX)이 지적한 대로 구약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456번인데, 오경(창, 출, 레, 민, 신)에서 75번이요, 선지서에서 243번이요, 그 나머지 부분에서 138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과, 33년의 지상에서의 삶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후손(마귀)을 이기실 것을 예언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3:15). 마귀를 이기신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출생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갈 4:4 ).

하나님은 주전 2,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예언하고 약속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2:3).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실 예수를 가리킨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740여 년 전에 다시 구체적으로 오실 메시야는 처녀 몸으로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7:14). 그 후에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고하였습니다.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 앞에서 우리 믿음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그 구속의 예언을 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언을 영감으로 기록한 계시, 곧 성경의 참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탄생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예수 탄생의 결과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인류에게 전해야 합니다. 2018년의 성탄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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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5일 성탄절 설교 - 기쁨의 성탄절(눅 2:8-14) 


 


 
기쁨의 성탄절(눅 2:8-14)

 

오늘 본문의 말씀 8절에 보면 한 밤중에 밖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간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참 빛으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천년의 희망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탄생하신 소식"은 온 우주에 가장 큰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목자들,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 그 외에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기뻐 찬양했으며, 하늘의 천사들까지 기쁨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merry christmas"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20세기 마지막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에게 첫 번째 성탄절의 기쁨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성탄을 맞이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한 성탄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목자들의 기쁨


8절-1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000년 전 당시 구세주의 탄생의 첫 증인이 된 사람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이 거룩한 일에 목자들이 그것도 첫 번째로 참여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신뢰받지 못했던 계층의 하나가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신뢰받지 못했다기보다는 멸시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업 속성상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무를 행할 수도 없었고, 또 이리저리 떠돌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던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법정에서 증인 노릇 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그렇게도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구세주 탄생의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시받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자리에 두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자를 놀라게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을 택하셔서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된 권리 하나 없는 목자들을 택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을 증거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영적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웠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서기관들조차도 구세주의 오심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겠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소망 없는 세상 한 구석에서 멸시받고 천대받는 목자들에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구세주를 집적 목격하게 함으로 세상의 모든 유력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들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목자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봅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아멘. 이 말씀은 "오늘(today)구주가 나셨으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약속의 성취됨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소식입니다. 은혜가 임하는 소식입니다. 멸시가 사라지고 고통의 날이 끝나고 흑암이 물러가고 밝은 빛 속에서 새 삶이 시작된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기쁨의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식을 목자들이 들었고, 2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들이 들은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영접한 기쁨에 찬송과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불편했던 모든 관계가 새롭게 될 때 얻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고 하늘의 평안을 얻었을 때,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떠한 염려나 근심이라도 초월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일 번지입니다. 그분만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분만 생각하며 기쁨이 넘칩니다. 빼앗길 수 없는 기쁨 그분 안에서 샘솟는 기쁨이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우리의 구세주로 주인으로 모실 때, 우리들에게도 목자들과 동일한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2. 마리아의 기쁨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그는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혼을 하였다는 것은 함께 살지는 않지만 완전한 부부가 되기로 약속된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정행위가 드러나면 율법에 따라 돌로 쳐서 죽이는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말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바로 예수라고 했습니다. 처녀에게 이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까? 나쁜 소식입니까? 분명히 나쁜 소식입니다. 지금 당장에 보기에는 엄청난 비극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①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는 한 이름 없는 처녀를 선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도 똑똑한 사람이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갈릴리의 작은 동네 나사렛에 천사를 보내셨는지 우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한 여자를 선택하셨는데 그 여인이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그를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 일로 모진 수모와 멸시를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 적인 선택의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마리아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바로 이 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거나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 있었는데, 원수 마귀가 내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듣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나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또 어떻게 내 마음이 예수님을 믿을 마음이 생겼는지, 생각만 해도 감사하고 기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소유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마리아가 기뻐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소망이나 바람이 아니라 지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들의 생애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역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그 엄청난 과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함께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비밀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밀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마리아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왜 우리에게 성탄절이 기쁨의 절기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하셨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여러분과 나의 삶에 참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동방 박사들의 기쁨


예수님의 탄생을 목격하고 경배한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의 페르시아(이란)아나 아니면 인도 같은 이방 나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천체와 우주를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의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큰 빛 하나가 나타나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분명히 만왕의 왕이 나실 징조라고 깨닫고 왕을 만나면 바치려고 몰약과 황금과 유향을 선물로 준비하고 급히 그 별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별을 따라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아이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을 보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장 10-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참 빛을 발견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둡고 암울한 세상, 당시 로마의 거대한 세력이 마구 세상을 짓밟고 있어 로마에 식민지가 된 나라마다 배고픔과 가난으로 힘겨운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이 모두 그랬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암울한 역사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도 어디에서 그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 그 희망의 빛을 찾은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은 1장 9절부터 읽겠습니다.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참 빛 곧 세상에 비추는 빛이 있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어둡고 칙칙한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열어 가실 영원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과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의 정부도 로마도 희망이 없으나 온 세상을 비추는 큰 빛을 따라 달려와 만난 아기 예수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보화를 드려 왕 되심을 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생명의 주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이제껏 세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엄청난 희망이 열려질 것이며, 동시에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그러면 여러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목자들과 마리아와 동방박사들,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얻은 그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그야말로 기쁜 성탄절입니다. 이 기쁨이 영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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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성탄절 주일 예배설교 (2018년)
Christmas Sermon in 2018

 

 

 


제목 : 진정한 성탄 준비

말씀 : 요17:14-17

1.예수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늘 대강절 넷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물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참뜻을 되새기며 주님을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에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주님이 누구신지, 왜 오셨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만약 왕이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어떻게 왕의 예우를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만약 왕이 나에게 높은 자리라도 하나 주려고 왔는데 난 높은 자리 따위는 필요 없고 돈이나 한보따리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돈이나 지위는커녕 왕의 분노만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면 바르게 영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참 뜻을 알지 못하면 엉뚱한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실망과 좌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성인군자라고 하고, 어떤 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어떤 경우는 건강이나 물질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정말 주시려고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어도 집안이나 거리나 상점이나 교회에 여러 가지 장식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만 정작 생명을 주려고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되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당연히 성탄축하프로그램도 하고 외부장식도 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어렵고 힘든 이웃들도 도우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도 당연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성탄절이웃초청잔치도 하고 어려운 분들을 돕기도 하며 성탄절 헌금의 거의 전부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희망과 위로를 주고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참 구세주로서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천배 만배 억배 중요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10:1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또 마1:21절 보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서 사함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인류가 이 땅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원토록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이 발달해도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더더구나 영원한 고통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대강절을 맞아 성탄절을 준비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이 넘침으로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었으면 그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마6:13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것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을진대 어떻게 악 가운데 머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악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은혜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떠나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기 위해서도 모든 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 날 많은 인생들이 이걸 몰라서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그 안에서 사랑과 선과 의와 진실가운데 살아갈때에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인데 오직 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믿음과 진리와 선과 의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소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면서 악한 방법으로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할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틈이 벌어져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점점 틈이 벌어져 갈등과 불신과 싸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는커녕 갈등과 불화와 상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행하면서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다음에는 진정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누리며 주님의 향기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룩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3.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물리치고 믿음과 사랑과 의와 선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려면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그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달콤하고 교묘한 유혹과 도전과 왜곡된 가치관을 분별하고 그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래야만이 우리 심령 속에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되고 악한 것들에게 휩쓸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마귀의 간계를 간파하고 즉시 물리치게 됩니다. 감히 마귀 따위가 장난치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겁 없이 대들어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에 힘쓰지 않아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환경과 왜곡된 가치관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만한 분별력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만연된 인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종교다원주의와 향락주의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게 되고, 악을 분별하며 거부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달려감으로 거룩한 인생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4: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대강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대부분이 미동도 안하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정말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모입시다. 기도합시다. 예배드립시다해도 꿈쩍도 안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또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선과 의와 진리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으며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을 준비하며 또 오늘 성찬식과 세례식을 하면서 주님이 오신 참뜻을 바르게 알고 진실로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를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이 왜곡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의 모습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비춤으로 아직도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여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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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대강절 주일예배 설교 (2018년 대림절 설교 )

Preaching the Advent of 2018
 

 


제목 : 은혜를 받은 자여

말씀 : 눅1:26-38

오늘 대강절넷째주. 대강절(待降節) 혹은 대림절(待臨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혹은 임하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그토록 기다려야 하고 준비해야 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기뻐하며 전파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오직 예수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요즘 새벽 시간에 계속 여기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수, 기독교의 핵심을 다시한번 살펴보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명한 믿음과 분명한 확신을 가지며 그래서 더욱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기쁨을 나누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말그대로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없다. 안된다. 인간은 하나같이 죄인이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아무리 선해도,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죄인은 죄인이다. 그런 인간으로서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같이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건져주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에게 빛이 있어야 남에게 빛을 비추지 않겠는가? 자신이 알아야 가르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주지 않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오실 수밖에 없었다.

2.구속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육신하신 그 자체가 엄청난 사랑이며 엄청난 구원의 행위이시기지만 거기서 끝나면 소용이 없다. 이제 구체적으로 구원을 위한 액션을 취해야 한다. 생각해보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기껏 구조대가 와서는 그저 구경만하고 있다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본격적으로 구조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물론 많다.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셨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지엽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진짜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마지막으로 하신 일 곧 십자가의 죽음의 진짜 그분의 사역이었다. 그것만이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져주는 그러니까 진정한 생명을 줄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가 문제다. 죄가 인간에게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저주와 증오와 갈등을 가져다 주었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를 가져다 주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주범은 인간의 내부속에 도사리고 죄된 본성이다. 그것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문제의 해결도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다만 임시 덮어두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저주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래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도 할수 없다. 해서도 안된다. 해도 소용이 없다. 자격도 능력도 사랑도 권한도 아무도 없다. 오직 성육신하신 하나님께만 있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해도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안된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가 살리지 못하는 주제에, 자기도 죄인인 주제에 누가 누구를 살리고 용서하고 새 생명을 주겠는가?

3.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역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질때 구원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시고 우리 죄악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런데 만약 죽고서 그것으로 끝이라면 이 역시도 구원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도 죽음으로 끝나버렸는데 누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사망의 권세에 지고 말았는데 누구를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줄수가 있단 말이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온갖 고통과 멸시와 저주를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가 당한 저주와 멸시와 고통과 죽음은 단지 우리가 받을 저주와 고통과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분은 결코 그와같은 어둠의 세력들을 당해야 될 이유도 없었고, 거기에 억눌려 있을수도 없는 분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과를 담당하기 위하여 당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류의 구원의 위한 아픔과 저주와 죽음을 당하신 후에는 그것을 이기시고 나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죄와 죽음의 세력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시다.

그렇다. 이 세가지 기독교의 핵심을 잊지말라. 성육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이 세가지 인류를 구원했다. 이 세가지 사역을 하신 분도, 하실 수 있는 분도, 하셔야 했던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분 뿐이셨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하여 이땅에 오실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말한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러자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묻는다. 아니 저는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요. 이 무슨 말씀입니까? 약혼은 했지만 아직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다시 말한다. 마리아야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네게 임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네 태속에 생명의 주실 것이다. 인간에게서 온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네 태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어주셔서 네가 잉태를 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란다. 그분께서 영원히 왕노롯하시며 그분께서 세상을 구원해 주실 것이란다.

그러자 마리아는 말한다. 저는 다만 주님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다만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참으로 이 엄청난 사실을, 이 놀라운 사실을 일찍이 듣고 깨닫고 믿고 오늘까지 따르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마리아가 하신 말씀을 보라. 28절에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30절에서 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주의 계집종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오늘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자.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순종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 구속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영접했다. 이 엄청난 생명의 진리를 알았다. 믿었다. 구원받았다. 이보다 놀라운 은혜는 없다. 선물도 없다. 엄청난 사건도 없다.

이제 대강절 절기를 맞아 새롭게 영접하자. 깨닫자. 준비하자. 감사하자. 영광을 돌리자. 찬양하자. 기뻐하자.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누리자.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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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째주일 대강절 예배설교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의미)

 

 


제목 :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의미

서    론
부모님들은 자녀를 낳으면, 자기들의 희망을 담아 이름을 지어주곤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름 중 거의 의미가 없는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와 문화가 비슷하여 자녀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줄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신앙과 관련을 지어 이름을 지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사람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시고 천사를 통하여 알리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명과 직명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예수님께서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 요셉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의 의미대로 구원자로 오셔서 구원자로 사시면서 구원의 사역을 잘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려고 제물이 되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4“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9:28“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었고”
히10: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2)예수 그리스도는 각 가지 환란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8:23-27에 보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호수를 항해하다가 큰 풍랑을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셔서 잔잔케 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풍랑은 영적으로 인생의 환란을 의미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는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마4:23-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백성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다 고쳐주셨습니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너무 많으므로 일일이 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자로 이미 예언이 되었고 치료목회를 통하여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사29:18“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사35:5-6“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는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사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이상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치료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4)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롬6: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엡2: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5)예수 그리스도는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갈3: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6)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다 지키시고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마5:17“내가 온 것은 선지자나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롬8:1-2“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2.임마누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7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알려주셨습니다.
사7: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임은 함께, 마누는 우리와 , 엘은 하나님 입니다.
또 천사가 요셉에게 태어나실 예수님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마1:23-2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시청각적으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 육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마28: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자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복을 받고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 큰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라 직명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서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 취임을 할 때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 취임을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시는 것은 3직을 다 감당하러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1)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세우고 백성을 보호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하늘나라를 세우시고 세상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려고 오셔서 그 일을 지금까지 하시고 계십니다.

2)선지자이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인데 예수님은 한 생애를 사시면서 이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멈추시는 곳마다 그곳에서 열심히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마4: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마7:28-29“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3)제사장이십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백성들의 죄를 제사를 통하여 해결하여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 제사장으로 오셨고, 제물로 오셔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마20:28"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히3:1“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7:26“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7:27“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결 론
1.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고 천사가 알려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과 불행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십니다.
2.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3직을 감당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실 메시야입니다.
3.과거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메시야 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모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을 힘있게 알리고 전하는 명절로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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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신년설교. <새해에는 의인처럼 삽시다>

 

시 37:1-7,19-26

새해에는 의인답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노년에 이르러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비탄시로써 아마도 과거 다윗 자신이 수많은 핍박과 억울한 일들, 사울의 추격과 저주와 욕을 당한 일(삼하 16:5) 등을 배경으로 쓴 지혜시입니다. 다윗은 본 시를 통하여 의인이 고통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하는 듯한 모순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의 섭리는 계속되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지킨 의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어떤 때에는 손해를 볼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정말 억울하게 느낄 정도 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때때로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악인들이 오히려 더 잘 되고 득세하고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세금을 포탈하고 불법적으로 떼돈을 벌고, 호화롭게 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오히려 더 잘 될 때에 믿음으로 온전히 주일을 성수하며 순전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결코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말라기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말 3:14-17에서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무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투쟁하고 애써 보았자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만한 자들이 오히려 더 복이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입술로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시대에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의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새해에는 의인답게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결점이 없는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3:10에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9에서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은혜를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의인”이라는 말을 히브리말로 “카도쉬” 또는 “하시드”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데, [카도쉬]라는 말은 [구별된 자 곧 성도]라는 뜻이고, [하시드]라는 말은 “죄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자”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시 31:23),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시 30:4),“성도”,“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자”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을 통하여 이러한 의인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이들을 보존하신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은 마땅히 성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의인답게 사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해 아무리 어렵고 어려워도 성도다움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의인답게 살지 못하면 형식적인 삶을 살았던 [바리새인]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현재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면은 [에세네인]처럼 말씀을 왜곡시키고 경건을 가장하여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에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도면 다 성도입니까? 성도답게 살아야 성도입니다.”아무리 세상에 악인이 득세하고 악이 광풍처럼 물려온다고 할지라도 성도다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의인답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이며, 의인답게 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1-2절,7-8절)
1절 말씀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행악자]란 '행악자'란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불법적인 일을 계획하고 계속 저지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불평이란 “격심하게 화를 내는 것”을 말하고, [투기]란 “질투하다 혹은 부러워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는 것은 행악자들의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무슨 해를 당할지라도 화를 내어 그들을 대항하지 말고, 불의한 자들이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일들을 행한다고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신본주의 인생관을 소유한 자들은 결코 인본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좇는 자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이 불의한 자의 일시적인 형통함을 보고 불평한다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릇된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악을 행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습에 말려들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세속화되고 완악하고 교만하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참된 신자들을 남겨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것을 모르고 실망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귀에 의인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악한 자들에 득세하는 세상으로 변한다고 할지라도 은혜와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삶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행악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고, 투기한다면 극서은 공의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현실만 바라보았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것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완악한 말은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입술로 기도하고, 우리의 입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잠 18:21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말 3:16에서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139:4에서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다 들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다 들으실 뿐 아니라 그대로 준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낙심과 어려움과 환란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입술로 범죄 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고백대로 축복하시고 큰 역사 이루실줄 믿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환난을 당했지만 결코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던 것처럼(욥 1:22)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시도하지도 않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사는 성도라면 결코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불평합니까? 자기를 기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기준,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불평, 불만을 품고 살아갑니다. 일에 대한 이해 부족을 가진 자는 불평을 합니다. 예를 들면 탕자의 형은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요, 자기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행동이었습니다. 출애굽 시의 이스라엘의 불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다면 결코 불평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든 일에 자기중심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즉시 반응하면서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출 16:7-9)

잠 19:3에서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원망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불평을 몰아내야 합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방법은 빛이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평을 몰아내는 방법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매일마다 물밀듯이 몰려오는 불평을 매일매일 감사의 생활로 물리치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욥은 "불평은 어리석음이요 범죄"라고 하였습니다.(욥 1:22) 그러므로 모진 풍랑이 몰아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였기에 놀라운 축복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 생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였습니다.(빌 4:8)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을 능력자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로 영 죽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① 악인의 형통함은 순간적이기 때문입니다.(2절) 아무리 악인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악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해지고 말 것입니다(2절) 다윗은 악인들을 가리켜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풀이란 잠시 있다 베임을 당하고, 또한 푸른 채소 역시 그 푸르름이 며칠을 못 넘기지 않습니까? 마치 아침 안개와 같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일시적인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고 사모하며, 이런 악인들의 행실을 좋아서야 되겠습니까?
② 악인의 계획은 허망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숨어 의인을 치러 하지만 그 계획은 허망하여지고 맙니다.(12-13절)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길지라도 그 칼과 활은 결국 자신의 심장을 겨누게 됩니다(14-15절)
③ 악인은 잠시 잠깐 후면 반드시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대에 앞에서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결코 불평, 불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2. 선을 행해야 합니다.(3절 상)
본문 3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을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을 행하려면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면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의뢰하다”라는 말은 “...에게 매달리다”(cling to)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말은 “선을 행하되 여호와께 매어달린 상태로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본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중에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그것을 미룬다면 그것은 은혜 받은 자의 행동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 4:17에서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마땅히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을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성도가 선을 행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보상에 있고, 선을 행하는 능력은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선을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갈 6:10)

3. 성실로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3절 하)
본문 3절 하반 절에서 "...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성실을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의 “성실”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안전, 보호”를 뜻하지만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사 그에 따른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실로 식물로 삼으라”는 말씀은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성실된 보상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라고 말씀입니다. 진리로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우리에 대하여 성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우리 자신도 성실해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려면 성실이 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라면 힘들다고, 어렵다고, 기분 나쁘다고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여 감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그 기쁨을 하나님께 대한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번에는 내가 성실해져야지”라고 결심해 보지만 성실함이 습성화되어 있지 아니하면 곧 실패로 돌아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늘 부족한 것이 성실입니다. 시31:23절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자를 보호하십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꿈을 지닌 소년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의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에서 모함을 받아 옥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고 끝까지 낙심과 불평을 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성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자리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성실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하나님께 성실한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성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불평하지 말고 모든 일에 인내와 성실을 그 음식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조급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낙엽송 같은 나무는 10-15년 생만 되어도 잘라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잣나무 같은 나무는 30-40년 더 키웁니다. 그런데 만일 잣나무가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잘 몰라서 생기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잣나무는 더 좋은 재목으로 쓰려고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엽송은 당장 급하게 사용하게 될 재목이 필요해서 잘라 쓰는 것 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의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는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십니다.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기쁨을 얻어라”는 교훈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만남이 기쁘고, 하나님과의 사귐 자체가 즐거워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 발 앞에서 말씀 듣고 그분과 진정한 사귐을 갖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던 마리아의 심정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최상의 방법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신령한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래서 시 100:2에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 66:10에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때때로 눈물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시 126:5-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결국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절에서도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되기 원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①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읽는 중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항상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의 대화니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③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④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⑤ 영적인 해산의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전도해야 합니다. 삼상 2:7절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높아지는 비결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는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본문 5-6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기의 “너의 길”이란 “인생 전체의 여정 뿐만 아니라 삶의 계획, 목표, 방법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맡기라”는 것은 “돌을 굴려버리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은 인생의 계획을 자신이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큰 돌을 산에서 지고 내려가지 않고 굴려서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면 반드시 어렵게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피할 길을 예비 받으면서 갈 길을 지도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결을 깨달은 솔로몬은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나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이 제시하시는 삶의 인도를 순종하여 좇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그분께 여러분의 앞날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그만큼 고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때 누구의 뜻에 따라야 하겠습니까? 우리인생을 우연에 맡기려고 하지 마세요. 점쟁이나 사주팔자에 맡기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16:3에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서 하십니다.(잠29:26)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고 나의 소원을 맡기면 그분께서 책임지십니다. 맡긴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이요, 신뢰는 곧 신앙입니다.

 

야곱이 인생 전반부는 자기 뜻대로 행할 때의 실패요, 하나님께 맡긴 후반부의 인생은 성공이었습니다.
인생을 창조하신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주 공간을 지금도 경영하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리하기면 하면 본문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선악 간에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밝혀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승리하고 복을 받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그것은 정오의 빛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혹시 악인들 앞에서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도가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할 때에 주님은 그것을 해결하여 주십니다.


본문 7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답게 살려면 악한 자들의 횡포에도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잠하고”라는 말씀은 침묵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거나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의 보응을 믿는 가운데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맡김으로 심령의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기다리라”라는 말은 “시선을 집중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바라보고자 자신의 내면의 생각을 한 곳에 집중 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역경이 휘몰아쳐 와도 동요하지 말고 참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견디면 마침내 승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욥은 필승의 때를 알고 참아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 중첩하고,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12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연기처럼 없어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비록 악인이 득세 하는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괴롭힘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어떤 복을 주십니까?

19절에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근 때에도 풍족한 복을 받습니다. 의인은 환난이나 기근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눈을 향하고 계십니다. 성도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성도를 넘어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환난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하게 합니다.
여기 '의인'은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죄로부터의 구원을 입은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의인들이 기근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삭은 심한 기근의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랄 땅에 거하면서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창26:12-13). 이것은 이삭이 농사 기술이 탁월해서 얻은 소득이 아닙니다. 큰 흉년을 만났지만 의인에게 베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백배의 축복을 얻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축복이 성도 여러분들 가정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시는 특별한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는 있는 곳이 광야든, 흉년의 장소든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자 하는 성도를 어떤 환경이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합 왕 시대에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재앙의 날에도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어김없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제공하셨습니다(왕상17:6).
하나님은 까마귀를 동원시켜서라도 하나님의 일군을 먹이시는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한끼의 양식만 남겨 둔 체 이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사르밧 과부의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사르밧 과부에게 흉년이 지나기까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왕상17:10-16).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의인들에게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게 하셨습니다. 경제 기근 속에서도 이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갈 길을 미리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함으로 그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실 때 반드시 평탄한 길만을 제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어릴 때에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등극하기까지는 오랜 피난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쉽고, 실족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평탄하고 형통한 길만을 열어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평탄하든, 그 길이 좁고 협착하든 그 길이 하나님이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하신 길은 구원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는데 성도는 그 길을 가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에 때로는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자기의 길을 계속 가게 됩니다. 여기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땅에 몸이 닿을 정도로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24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길을 정하셨든지 그 길을 감사함으로 걷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은 자손까지 복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여정 속에 하나님이 의인을 어떻게 다루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 구절로 보아 이 시편은 다윗의 인생이 황혼을 맞은 때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나이가 들은 이 시점에서도 의인은 결코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의인이 받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손은 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언 10장 3절에도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의인들의 후손이 복을 받는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20:6, 신5:10).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왜 의인의 자손이 복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26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역시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이 기근 때에도 풍족하게 하심으로 움켜쥐는 자가 아니라 베푸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만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나보다 못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펴야 합니다. 역시 이런 성도들의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나님께 심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자식을 위한 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기근 때에도 풍족한 복을 받는 신비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길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고 오늘도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은 완전 넘어짐이 없습니다. 성도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이 나를 통해서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교회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성도와 그의 자손이 망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의 백화점 왕인 죤 와너 메이커?는 가난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헌금하는 교인이 되게 하소서!"라고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의인답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해 주셨는데,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는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2019년 새해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① 불평하지 맙시다.
② 선을 행해야 합니다.
③ 성실로 식물로 삼아야 합니다.
④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깁시다.
⑥ 끝까지 참고 기다립시다. 그리하면 새해에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는데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시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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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송구 영신 예배 기도문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

금년 한해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베풀어 주신 자비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주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으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주의 크신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에 감사드리며, 믿음으로 사랑 안에서 자라는 교회로 세워
주셨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주셨는데도 실천하지
못하고 나와 우리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이웃의 관심에 귀 기울이지
못하였음을 고백하며 진정 주님의 사랑으로 베풀고 나누며 빌려주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변함없는 빛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가오는 새해에도 신실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나니 지난 해 말에도 성실함을 내세우며
살아가겠노라고 서원한 우리 모두는 2011년 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시간이옵니다.
이 시간 주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지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서원했던 것들을 아버지와 주의 백성들 앞에서 행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리의 터 위에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주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분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삶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알게 모르게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님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고,
강하신 팔로 붙들어 주셔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을
감사 드립니다.
새해에는 낙심하거나 실족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희들을 언제나
붙들어 주시옵고, 어렵고 힘든 일들이 엄습하여도 능히 이기고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주님께서 보시기에 복되고 아름다운 일들이
넘쳐 주님을 더욱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금년에는 우리 교회의 모든 형제 자매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분부하신 명령을 힘써서 준행하는 복된 교회가 되게 하시고,
영혼을 추수하는 교회, 이웃을 부요케 하는 교회, 구제와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성도들의 가정마다 주님의 그 크신 은혜로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 당하는 가정이 없게 하시고, 부부간에도 심적인
갈등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며, 자녀들도 주님을 앙망하는 마음들이 더욱
넘쳐 나게 하시며, 질병이나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시간 다짐하고 서원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 안에서
일년 내내 불변하게 하시옵고, 저희들의 계획과 주님의 뜻이 일치되어
주님이 허락하시는 성령의 열매들을 많이 맺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이 송구영신 예배에 성령님이 친히 운행 하시고,
이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말씀을 증거하시는 목사님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출발하는 저희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소망을 얻는 축복의
말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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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별 설교 추수감사주일 오후예배설교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편118 :1,26∼29 )

장애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은혜의 집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집을 방문한 어느 장로님이 장애자들의 식사를 도우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 손으로 내 입에 밥을 떠 넣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일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와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신 은혜가 크고 지대합니다. 하나님은 풍수해에도 불구하고 평년작을 넘는 풍년을 주셨습니다. IMF를 지나 고유가 시대를 맞이했는데도 도로에는 자동차가 다닐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후 남북관계의 긴장이 완화되고 50년만의 상봉이라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우리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까지, 5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 나라가 이토록 세계적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새 천년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의 추수감사주일은 1623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첫 번째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초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감사의 노래"입니다. 첫 절부터 끝 절까지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납니다. 이 시편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큰 명절 때 불렀던 감사의 노래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시편 주석을 모두 끝낸 후 본 시편을 가장 사랑하고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본 시편을 루터의 시편이라고 합니다.

 

I. 감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의 얼굴입니다

이스라엘이 지키던 제사 제도에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제사 제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의식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양상과 동기는 달라도 모두가 감사의 제사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세 절기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유월절, 즉 무교절입니다. 둘째는 칠칠절, 즉 오순절 혹은 맥추절입니다. 셋째는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장막절, 혹은 수장절입니다. 모두 그 시기가 다르고 지키는 제도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정신만은 같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첫째 절기는 구원에 대한 감사요, 둘째 절기는 추수 혹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요, 셋째는 광야 인생 길을 인도하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감사의 동기 혹은 가장 기본적인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를통한 구원에 대한 감사, 구속에 대한 감사입니다. 프린스턴의 교장을 지낸 분


이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자선과 도덕적 권위의 동기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것이 동기가 아니라면 어떤 자선이나 도덕적 헌신도 상업주의에 치우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감사는 인간 됨의 특징입니다. 철학의 조상인 탈레스도 세 가지 때문에 감사한다고 말하면서 그 중 첫째가 자신이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얼굴입니다.


II.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감사의 제사인 번제를 1천 번이나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고 말씀하시자,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화와 장수와 건강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좋은 조건에서만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 시편의 경우를 보더라도 때로는 고통 중에 미움을 받으면서, 원수의 공격을 받으면서, 억울해도, 죽을 지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는 즉시 해야 합니다. 희랍 사화에 "감사는 즉시하라. 지체하면 감사도 없어지고, 감사의 명목도 없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형식만 남은 감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III. 감사는 인생을 건강하게 하는 묘약입니다

97세의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 분의 별명은 "감사 할머니"입니다. 어찌 인생 길에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분은 어떤 경우에도 "주여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 분은 건강하고 장수하여 자녀와 집안이 모두 하나님의 큰복을 누리며 신앙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의 데롤 파커 목사님은 "인생은 감사할 때 예쁘고 아름답다. 감사는 마치 좋은 물건의 끝손질과도 같고 아름다운 여인의 끝 화장 솜씨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현대인은 유독 미모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50세나 60세가 넘어가면 모두 비슷합니다. 하지만 감사의 얼굴은 천사같이 아름답고 어머니같이 다정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자신의 미모를 자랑해도 화를 내거나 불만이 가득하거나, 한이나 독을 품으면 그 얼굴마저 이지러져서 마귀 같은 얼굴로 변해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감사는 예쁘고 건강하게 하는 묘약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작은 일일수록 소중할 수 있습니다. 큰 일만 감사하지 말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웃 어른에게, 선생님에게, 심지어 어린아이에게까지 감사하며 더 나아가 이 모든 감사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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