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가정 결혼 예식 / 기억에 남는 결혼식 준비

 

 


기억에 남는 주례를 위한 아이디어 10가지

 

1.혼인서약문을 신랑 신부가 직접 작성하도록 해보십시오.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혼인서약의 내용을 잊고 살게 마련입니다. 고작 “아멘”이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도의 대답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혼인서약문을 주례자가 낭독하고

서약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그저 대답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신랑과 신부가 스스로 혼인서약문을 작성하고 주례자가 미리 그 문구를 수정해주는 방법을 사용해보십시오.

서약의 내용을 만드는 일 자체가 신랑 신부에게 소중한 공부가 될 것이고 서약의 내용에 본인들 스스로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을 것입니다.
물론 주례를 맡은 목회자가 그 내용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세밀하게 조언을 해주어야만 내용이 충실한 서약문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가능하면 결혼식장에서 이 서약문에 신랑과 신부가 직접 서명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2.주례설교 원고를 신랑 신부에게 나눠주십시오.

일생에 한번 뿐인 결혼식을 위해 단 위에 서 있는 신랑과 신부는 대체로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하객들 앞에서 잔뜩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압박감에서 오는 부담감도 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례자가 아무리 좋은 권면을 한들 그 내용이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를 바라는 건 분명 지나친 기대일 것입니다.
차라리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지에서 안정감을 되찾고 결혼에 관한 생각을 되짚어 보며 다시 한번 읽어볼 수 있도록 원고를 선물해 보십시오.

실제로 이렇게 하는 목사님들이 몇 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또 결혼주례가 담긴 비디오 테잎을 신랑 신부에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시간 날 때마다 부부가 함께 틀어보며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의 한 장로님은 45년전에 받은 주례설교를 녹음해 해마다 결혼기념일맞아 듣고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단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랑 신부의 결혼생활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3.신랑 신부에게 제대로 된 결혼준비를 시키십시오.

하다못해 차를 운전을 하는데도 면허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인 결혼을 하는데는 1시간도 안되는 결혼식을 치르는 것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 고작입니다.
제대로 된 결혼준비란 단순히 혼수품을 저렴하게 마련하거나 신혼여행을 의미있게 보내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생활을 통해 부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행여나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어떤 요령이 있는지, 가사분담든 어떻게 하고, 가정경제는 누가 어떻게 담당할건지,

자녀에 대한 계획은 어떠한지, 부부간의 신앙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등등.
숱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서로 솔직하게 대화하고 해결할 수 있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혼수감입니다.
주례에 앞서 신랑과 신부를 만나 이러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들려주십시오.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기독교가정사역연구소를 비롯한 전문연구기관에서

실시하는 결혼예비학교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보십시오.
결혼예비학교를 거친 커플과 그렇지 않은 커플 사이엔 삶의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4.실제적인 가르침을 주십시오.

한 목사님은 주례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곤 합니다.

“남편되는 신랑에게 권면합니다
-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을 잊지 마십시오.
- 나무를 가꾸는 정원사의 심정으로 아내를 대하십시오.
- 모든 일을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 진정한 행복은 사랑의 대화입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가족의 이야기를 삼가십시오.
- 남편의 매력은 너그러움입니다. 한 걸음 양보하십시오.
- 가정의 경제를 아내에게 일임하여 보람을 갖고 살림에 임하도록 하십시오.

 

또 아내되는 신부에게 권면합니다.
- 아름다움과 재치와 근면성이 있는 현숙한 아내가 될 것을 꿈꾸십시오.
-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식탁을 친교와 화목의 장으로 가꾸십시오.
- 웃으며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결코 혼자 중얼거리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 남편에게 혼자만 지낼 수 있는 정신적인 휴식시간을 주십시오.
- 중요한 일은 꼭 남편의 결정을 따르십시오.
- 남편의 수입에 맞추어 규모있는 살림을 꾸리십시오.
- 가정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도록 하십시오.“
왜 그렇게 사소한 일까지 시시콜콜하게 잔소리를 하느냐는 분들도 있겠지만

실제로 젊은이들이 결혼주레에서 바라는 것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5.신랑 신부의 기억에 남는 결혼예식을 고안하십시오.

주례설교 중간에 신랑 신부가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를 낭독하는 시간을 마련해 보십시오.

미리 신랑 신부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오도록 주문하면 됩니다.

편지를 낭독한 후엔 새가정을 이루는 신혼부부와 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님들을 위해 주례자가 기도해 주십시오.

 당사자들은 물론 생각없이 들린 하객들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 특별한 선물도 생각해 보십시오. 한 목사님은 주례를 설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커다란 양초를 하나씩 선물한다고 합니다.

부부가 오붓하게 마주앉아 대화할 때마다 그 양초를 키도록 하고 양초가 다 달았을 즈음엔 다시 한번 주례자를 찾아와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에 대해 들려달라는 것입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부부간의 대화를 회복하고 부부간의 친밀감을 높일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랑 신부가 부부 십계명을 스스로 만들어 서로에게 약속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결혼예식 순서지나 청첩장에 소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6.주례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십시오.

한 목사님은 딱딱한 권면보다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얽힌 경험담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주례를 대신하곤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나 감동적인 순간도 이야기 하지만 그것보다는 가장 위험하고 위태로웠던 경험을 들려주는데

주안점을 두는 겁니다. 심지어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생각하고 홀로 눈물을 곱씹던 아픔들까지 고스란히 들려주는 겁니다.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쏟아놓는 모습을 보면 사회적으로 덕망도 있고 성공한 목회자로서 존경을 받아온

그 목사님이 정말 그러한 아픔을 겪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러한 주례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흡인력으로 결혼예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영혼을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습니다. 또 부디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결혼을

경솔하게 여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권면하는 힘도 갖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도덕률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경험담이 감동적이게 마련입니다.


7.참석자들을 고려하십시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 신부 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신랑 신부의 부모님을 비롯해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주체입니다. 그

런 점에서 주례자는 결혼식 하객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기억에 남는 주례사를 남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객들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불교 신자이지만 어쩔 수 없이 평소의 친분 때문에 교회에서의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한번 총동원주일 행사를 마련하려면 숱한 노력과 비용이 소모되지만

결혼식에는 제 발로 찾아온 전도대상자들이 수두룩하게 마련입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할 때도 보다 보편적인 언어와 표현법을 사용하십시오.

일평생에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해 차근차근 기독교의 사랑에 관해 설명한다면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하객들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례를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8.과감하게 특별한 순서를 도입해 보십시오.

미국에서는 결혼식에서 당사자들만이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까지 서약을 하는 이색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부모서약’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오늘 자녀들을 결혼시키는 우리 부부 두 사람은 늘 사랑과 기도로 신랑 신부를 후원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녀들에게 가정생활의 참된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 친지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또 한번 떠나보낸 자녀들을 우리의 뜻대로 먼 거리에서 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도록 힘써 기도하는 후견인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또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편지를 낭독하고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이에 대한 답례로

몇가지 권면을 들려주는 편지를 낭독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울러 하객들이 신랑 신부에게 들려주고 싶은 축복의 말들을 써넣을 수 있는 사인 보드(sign board)를 마련해 두었다가

신혼부부에게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9.신랑 신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십시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 가운데는 신랑 신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찾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나 이웃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더구나 신랑측 하객들은 신부에 대해 아는 부분이

거의 없을 것이고 신부측 하객들도 신랑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에 대해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반대로 산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주례자는 신랑 신부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 당사자들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에 얽힌 에피소드, 신랑 신부의 버릇이나 특징 등을 소개해보십시오. 또 신랑 신부의 경력이나 앞으로의 소망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하객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신랑 신부의 장점과 단점,

취미나 공통점, 별명이나 신앙생활 경력 등을 들려주셔도 됩니다.
이를 통해 목회자가 예비 부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수도 있고 보다 친밀한 피드백을 주고 받으면서

결혼식을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선 결혼식 전에 신랑과 신부를 만나 부담없이 대화를 나눠보아야만 합니다.


10.결혼주례의 ‘아프터 서비스’를 시도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주례가 결혼식장에서 단 한번의 행사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보다 의미있는 주례는 결혼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랑과 신부를 돌보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랑 신부를 만나 보십시오. 그동안 귀로 듣고 속으로 예상했던 것과 신혼부부들이 실제 결혼생활에서

겪는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엔 예상하지 못한 갈등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고 배우자에게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커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잠시라도 함께 생활해 본 신혼부부들을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새롭게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집으로 직접 초청해 선배의 입장에서 신혼부부들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들려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주례의 ‘아프터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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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대형교회 앞의 노숙자

 

 

 


미국의 대형 교회 근처에서 한 노숙자가
초라한 행색으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인 중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세 명에 불과했고
초췌하고 남루한 차림의
노숙자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음식을 사려고 하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노숙자는
성전 맨 앞자리에 앉으려 하였으나
예배 위원들에게
끌려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는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석에 겨우 눈치를 보며 앉았고
광고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새로 우리 교회에 부임하신
스티펙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앞으로 나와 주시죠”
교인들은 모두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새로 부임한 목사를 찾아 일제히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모든 성도들은 경악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노숙자가 강단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바로 이 교회에 새로 부임한
스티펙 목사(노숙자)였습니다
그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곧장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염소’ 비유로
누가 양과 염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티펙 목사가 말씀을 마치자
회중은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엔 흐느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이날 오전 조용한 목소리로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인들은 많으나
제자는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라는 말을 남겼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으로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옆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교인수 1만 명의 미국 대형교회에서
예례미야 스티펙이라는 목사가
노숙인이 된 이야기가 페이스북 등
 인터넷 사이트를 강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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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삶 / 그리스도인의 자세

 

 

 

중세 종교개혁자들 가운데는

교회의 성일(聖日)에 대해 주일(主日) 외에는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는 신앙을 승화시키려는 여러 가지 절기를 만들어 지켜왔다.

부활절, 성탄절, 성령강림절, 사순절 등이 있다.

이외에도 가톨릭교회는 성인의 날, 성모축일 등 갖가지 성일을 지켰다.
그 가운데 부활절은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부활주일을 중심으로 그 이전, 주일을 뺀 40일 기간을 사순절이라 하고,

그 마지막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한다.

 


올해는 3월 27일이 부활주일임으로 20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고난주간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금식과 기도로 부활주일을 맞기위해 경건생활을 하는 기간이다.

고난주간 내내 금식할 수 없으면 성금요일 하루 또는 한끼 금식할 수도 있다.

어쨋든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보내자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이나 고난주간에는 가능하면 육식을 피하고, 결혼식이나 회갑연, 생일잔치 등을 미루었다.

경건생활의 모양을 갖추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역사적 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도 교인들을 상대로 이러한 신앙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는 아예 고난주간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교회들도 있음을 본다.

사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고난주간에도 교회 안에서 결혼식을 갖는 경우도 있고,

평소 보통의 주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낸다.

그러다보니 교인들은 고난주간이 언제인지도 모른 채 부활주일에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마는 것이다.
신앙은 훈련이다. 경건의 훈련, 봉사의 훈련, 희생의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절을 준비하는 고난주간이라는 귀하고 아름다운 훈련기간이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교인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좋은 기회를 잃는 것이다.
고난주간을 통해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과 관련된 성경을 찾아읽고

기도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세를 갖게 하는 것이 부활절을 맞는 교회의 자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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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수난

사도 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의 진정한 뜻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의 정의를 내려 보라. 이것에 대한 정의를 내린 다는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수많은 이단 들의 출현을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그런 이단들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에는 율법에다 믿음이 보태어진 다름 복음이 있었고 그 이후에 우후죽순 처럼 교회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믿음에 안식을 보탠 안식교 하나님의 교회라는 집단은 안식일 뿐만 아니라 유월절 까지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구원파는 믿음과 거듭남을 구별해서 믿음에 거듭남을 보태야 온전히 구원된다고 가르치고 다락방에서는 믿음만이 부족하므로 거기에 예수 영접이 보태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박옥수 파에서는 믿음에다 의인됨을 덛 붙이기도 한다. 그 모든 이단들이 예수 믿음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목숨바쳐 피력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해 지는거다. 그 불안한 마음에 자꾸 뭔가를 보태고 있는거다. 정통이라고 하는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과연 정의를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옳게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섰는데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 불법을 행하던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렇게 말씀 하시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성경은 분명 참 믿음은 무엇이며 잘 못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눅8:28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 소서 하니 , 이거 누가 한 말 이죠? 귀신이 한말 이다. 그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런다. 그 귀신은 하나님을 가르켜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그랬고 여기서 지극히 높다라고 하는 것은 최상급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것도 정확하게 알고있다.

적어도 귀신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 보다 더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성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야고보서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라고 한다. 귀신들이 적어도 기독교 내에 삼신론자들이나 다신론자들 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하나님을 알고 있다라는 것이다.

귀신들은 이러한 지식적인 믿음에 감정적인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 야고보가 말하기를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고 떨었다고 한다. 귀신들이 떤다는 것은 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도 믿고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으며 그것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떨기도 한다는 것인데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믿음 아닙니까?

그러면 이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귀신들에게 교회가 세례를 줘도 괜찮습니까?귀신 보다 못한 믿음을 갖고도 전부 세례 받고 직분도 받고 예배도 하지 않습니까? 지적으로나 감정적 으로나 오늘날 교회가 귀신과 크게 다른점이 있나요? 적어도 성도는 그러한 귀신들 보다는 명확하고 명료하게 예수 믿는 믿음에 관하여 정의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그 지식은 기본적으로 전제가 되는거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는 제사를 영 단번에 십자가에서 치르시고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 내셨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너무 간단하고 쉽죠 ? 그냥 십자가 하나로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었다 라는 것을 믿는 거다. 그러나 그걸 믿는 믿음은 굉장히 많은 것을 함의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믿음에 율법 지킴이나 절기 지킴 거듭남이나 예수 영접 의인됨 등이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 된다는 그런 이단 사설들에 속으면 절대 안된다.

 

그 모든 것들은 십자가 안에서 이미 해결이 된것이다. 십자가는 뭔가 불완전 한 것이고 거기에 뭔가가 보태져야 한다 라고 하는 이들은 전부 가짜이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그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거 아닌가요 우리가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고난까지 받으셨을까요? 왜 수난까지 받아야 되는거죠?

 

어느날 성인으로 뚝 떨어져서 십자가 높이들고 애들아 나 너희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죽는다 잘봐 나 하나님이거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어 너희들 위해서 내가 죽을꺼야 그냥 확 죽어버리면 되는거 아니예요? 왜 예수님이 아기로 오셔서 태어나는 날 부터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 수난을 당하다 가야 하죠? 십자가 만으로는 뭔가가 부족합니까? 오늘 주제의 키 포인트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하는 대목은 단순히 예수님 십자가 고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 하면 단순히 십자가만 떠 올리는데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하는 대목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포함 하지만 십자가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포함한 예수님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전 생애는 고난의 생애 였다 라는 것을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의 어구가 그 의미를 함축하여 설명 하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앞 어구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라아에게 나시고 이다. 그 뒷 어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 중간에는 뭐가 들어가 있어야 되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들어가 있어야 되는데 신앙 고백에서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사망 그 중간에 있는 예수님의 전 생애가 바로 고난이었다 라는 것이고 그 고난은 본디오 빌라도로 상징된 어떤 세력에 의한 고난이었다 라는 것을 함축하여 설명 하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와 고난의 개념은 한 개인이나 그 개인에 의해서 저질러진 어떤 특정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죽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에게서 죄가 없다고 세번이나 놓아 줄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이라고 한거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을 고쳐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혹은 온 세상의 고난을 받으사로 고쳐야 되는것 아니냐고 반문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빌라도는 당시 세상을 다스리고 있던 로마 황제의 대리인으로 섰던 사람이다 이 세상 권세 잡은자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더 나아가서 본디오 빌라도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 전체를 가리킨다. 나를 포함한 세력 전체 그러니까 본디오 빌라도 이름대신에 내 이름이 거기에 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 사도신경이나 영어 사도 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를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under Pontius pilate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under 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을 하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수난의 주체가 아니라 그 예수님의 가해자는 따로 있는데 그 중간에 빌라도가 대리인으로 서 있었고 그 아래에서 수난이 주어졌다 라는 뜻이다

 

쉬운말로 본디오 빌라도는 당시의 법정에서의 최종 선고자 판사로서의 자격과 기능을 가진 총독이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유죄를 선고하는 세상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의 수난에 등장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독립적으로 예수님의 수난의 주체자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발견된 빌라도가 로마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빌라도가 이 일로 얼마나 고민 했는지 정확하게 나온다.

 

예수 죽인 것은 빌라도는 아주 크게 회개를 했다. 어떤 면에 있어서의 빌라도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괜히 그 당시에 총독으로 있는 바람에 그의 이름이 2000년이 넘게 전 세계 기독교 인들에게 오명으로 불리고 있는것이다. 사도신경 고백할때 마다 그 사람이 이름이 나온다. 그 때 총독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울러 그 대목에서의 본디오 빌라도의 역할은 그 실재 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예수가 고난을 받았다 라는 사실에 기인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에 역사성 그 실재성을 확증하는 용도로 신앙 고백이 그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의 이름이 사도 신경에 들어 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를 생각할 때 예수를 죽인 천인공로할 나쁜 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유죄인으로 선고해 버린 이 세상 권세의 총 대표로 보아야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나라는 존재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결단하고 살아가던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자로 보아야 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염요일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내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 있었던 자라는 것이다. 오히려 유죄 선고를 받아야 할 죄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대단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정말 행복할 수 있다라고 복음을 전해 주러 오신 예수님에게 유죄선고를 내려 버렸다. 이것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짧게 축약을 하여 표현을 한 것 뿐이다.

유죄 선고를 받아야 마땅할 죄인들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유죄 선고를 받아 버리심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 구원의 대하 드라마를 아주 작은 그림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인것이다. 하이델 베르그 소요리 문답에 보면 심판자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렇게 나온다 본디오 빌라도 그가 심판자 이기 때문에 그에게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그에게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심판자 아래에서 저주를 받게된 것은 우리에게 선고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인데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 권세 잡은 자에게 심판을 받는거다.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이 서 있는 거다. 그래서 그 때 최종 선고자로서의 자격과 신분을 가지고 있던 로마의 총독이 예수님을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린것이다. 빌라도는 최종 선고자의 자격으로 예수님 앞에 서서 내려질 유죄 선고를 예수님에게 내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그 그림을 통하여 마귀의 참소를 받아 유죄 선고를 받아 영원한 지옥에서 이를 갈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어야 된다. 아무튼 예수님은 나면서 부터 빌라도로 대표 되는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세력에 의해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까지 그 세상 권세 잡은자의 권세에 의해 공격을 당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그 분의 생애가 단 한 줄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기록이 되고 있다.

예수님의 전체 생애는 세상 권세 잡은자의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대목 인 것이다. 왜 주님은 십자가만 지시면 되는데 나면서 죽는 순간 까지 고난을 받다 가셔야 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 까지 그 분이 세상 권세 잡은 자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라는 것을 굳이 넣어서 고백을 해야 됩니까? 그냥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로 이어져도 별 무리가 없을것 같은데 왜 그 짧은 신앙 고백 속에 그 분의 고난의 삶이 꼭 들어 가야 되는 것인가 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고백을할 때 그 고백이 염불 외우듯이 하는 주문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 해답과 더불어 왜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 하여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도 하며,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인가에 대한 것도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장면이 어떻게 나에게 영적 현실이 되어야 하는가 까지 가셔야 한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데 그런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사실 확인만을 위한 것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정말 가치 없는 가르침이 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의 내용으로 고백을 하고 있는 그 고난을 우리 에게로 까지 연결을 시켜 적용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수시로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이리처럼 공격할 것이다.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을 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할때 그 속에 예수의 본을 쫒아 함께 그 분의 고난에 참여 해야하는 우리 성도의 필연성 까지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고난의 삶이 었다라는 것이 확실한 사실인 만큼 우리에게 약속된 고난 또한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 라는 그 고백을 할 때 나도 그렇게 고난을 받게 될꺼야를 함께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 속에 나의 고난의 필연성이 들어가 있다. 당혹 스럽지 않으세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라고 내가 이야기 할 때 나도 반드시 그런 고난을 통과 할꺼야 라는 믿음을 고백 하는 것이다 내가 신앙 고백을 할 때 마다 나의 고난을 확인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재수 없는 말 같지 않으세요? 그런데 신앙고백 할때에 그 고백이 분명히 들어가 있다. 어떻게 우리의 예수 믿는 믿음 안에 우리의 고난이 그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알아 봐야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어요 왜 꼭 십자가여야 하는가 당시 십자가 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가 받는 참수형이라는 율법에 근거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자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죽음을 확증하고 확인시켜 주기 위해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이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다 라는 것을 교회와 당시의 유대인 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거기에 빌라도가 참고용으로 세상 권세잡은 자의 대리인으로 잠깐 등장하는 것이다. [신명기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율법에 적힌 요 부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물론 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모든 고난의 절정이요 결정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의 삶은 십자가와 채찍에서만 나타 나는게 아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 이시다. 그 분이 제한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 성육신 사건 자체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이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자들 심지어 타락까지 해버린 벌레 만도 못한 자들과 함께 33년을 지내셨다.

그런데 그 벌레들이 자기를 알아 보지도 못하고 걸핏하면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죽이려 하고 걸핏하면 모함을 하며 밥 먹듯 배신을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은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 나셨다.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갔는데 변변한 여관하나 구하지 못해서 짐승이 사는 헛간에서 잠을 자는 정도였다. 그리고 인생의 시작은 구유에서 시작 하셨다. 심지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1년된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고 비둘기를 속죄제로 드릴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 어린 반구 둘로 정결 예식을 감당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분은 공생에 기간에도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평생 자기 소유의 재산이나 집을 한번도 가져 본적이 없다. 그 분은 가족들에게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3년간 동거 동락을 했던 제자에 의해 팔렸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당신을 끝까지 쫒겠다던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배신을 하고 도망을 갔으며 아무죄도 없이 매를 맞으셨고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벌거 벗기고 홍포를 입힌 상태에서 빛을 받으면 금관의 색을 낸다는 가시관을 씌웠다.

손에다가는 황제의 호를 빗대는 갈대를 쥐어 줬구요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밷었고 그분의 눈을 가린 후에 뺨을 때린 후에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춰 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엉터리 절을 하게도 했다. 그리고는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짊어 지실 우리 죄를 대신 죄에 대한 죄인들의 중보적 죄의식 또한 평생 가지고 사셨다.

성육신에서 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겨우 끝이 난다. 죽을 때 끝이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는 전체가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 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아브라함 카이포가 말한대로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고난이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시간적으로도 총체적인 고난이었음과 동시에 그가 취하신 인간성 전체에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 총체적 고난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의 최대의 수난은 그런 육신적인 고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최대의 고난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영적인 수난이었다. 영원 속에서 단 한번도 끊어짐이 없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끊어짐을 경험 한겁니다. 성경도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대해서는 그리 세밀하게 묘사를 하지 않는다. 영화중에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기 까지 모진 고문과 채찍으로 맞는 태형에 처해 진 장면을 본다.피가 튀고 살이 튄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훌쩍 그리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고 운다. 그 장면들을 오래 오래 기억에 새겨 놓고 두고 두고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고난을 단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 채찍으로 치고 십자가에 못박게 넘겨 주니라 단 한줄이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성경의 장수를 많이 할애 하여 맞고 맞았고 맞은대 또 맞았고 살이 튀었고 창자가 튀어 나왔으며 피가 튀었다 얼마든지 세밀하게 묘사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성경이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에 별 관심이 없다라는 것의 반증이다.

그런데 굳이 그 부분만을 극화를 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맞으셨는지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아프셨는지를 밝혀서 그것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요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 정도의 고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고난의 하나님과의 끊어짐에 집중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평생 들은 설교보다 감동적인 것이었다 라고 평을 쓰신 분이 있다. 도데체 평생 어떤 설교를 들었길래 그래요

그건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오해 되고 있는가를 처절하게 증명되고 있다 라는 사실이다. 그런 고난은 사람들도 너끈히 참아 낼 수 있던 고난이었다. 채찍에 맞는 것과 기름에 튀기는 것 어떤게 더 고난스러웠을 까요?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독사굴에 넣어서 수 많은 뱀들에게 물어 뜯겨 서서히 공포 속에서 죽어 가는것 중에 어떤것이 더 힘듭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면 하루 안에 죽는다. 독사굴에 넣으면 몇일을 그 독사들과 함께 살면서 서서히 죽어가야 된다.

예수님 이후에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한 육체적 고통을 잘 견뎌내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지키다 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무 톱에 켜 죽으면서도 죽는 순간 까지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사람들이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한 건가요 더 아프고 처참하게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집중이 되어 있다. 엠 고고힐이나 로버트 스타인은 그들의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두려워 하신 것이 총체적인 죽음이나 고통이었다 라는 것이 전혀 없다 아무턴 예수님은 평생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난과 수난의 삶을 살다 가셨다. 그 예수님의 수난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헤르만 바빙크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소극적 수난이다. 다른말로 수동적 수난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인들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 지우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대속의 수난을 이야기 한다.

두번째 의미의 수난은 적극적 수난 능동적 수난이라 부른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지고한 사랑으로 우리가 마땅히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종의 삶을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드림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얻게 해 주시려고 수난을 당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의해서 격발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을 크게 둘로 나누면 십자가와 순종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십자가가 수동적 수난이라면 사랑에 의한 순종이 능동적 수난이다. 십자가와 순종에서 비롯된 고난이 전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기여 하는 것이었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또한 하나님의 순종에 의해서 격발 된 것이다. 하나님이 시켰더니 목숨을 걸고 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수난의 삶은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해도 틀림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수난의 삶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의 삶으로 표출이 된다라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 주는 삶이기도 하다. 순종의 삶은 반드시 고난으로 드러 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삶이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대단한 의미를 지닌게 아니다. 십자가는 당시의 율법에 나오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의 형벌이었기 때문에 선택된 소품이지 만일 율법에 단두대에 목이 짤린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 하고 기록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은 단두대에서 죽었을 겁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를 상징하는 소품이다. 예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죽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어디에서 격발된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고난으로 드러다더라 이것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요약이 된 예수님 전체의 생애에 대한 우리에게 주는 유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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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자살 믿음으로 해결해야...

 

 

 

 

 

 

최근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 중앙심리부검센터가 발표한 자살자 심리부검 결과를 보면,

대상자인 자살 사망자 121명의 유가족 면담을 실시한 결과 93.4%가 이 같은 경고신호를 보냈지만

유가족의 81.0%는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언어적 경고신호로는 가장 흔한 것으로 죽음이나 자살에 관해 직접 언급하는 방식이다.

"내가 먼저 갈 테니 잘 지내", "총이 있으면 편하게 죽겠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편지나 일기장 등에 죽음과 관련한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사후 세계를 동경하거나 자살한 사람 등 주변의 고인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도 징후 중 하나다.

"허리가 아프다" 등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호소해도 자살 신호가 아닌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행동 중에서는 수면 상태가 바뀌거나 식욕과 체중이 변화하는 경우에도 자살 신호가 될 수 있다.

주변을 정리하거나 평소와 달리 가족들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해도 한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중앙심리부검센터는 자살자를 △우울증 미치료군 △문제음주군 △정신건강-경제문제 동반군 등 3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우울증 미치료군은 유족들이 자살자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 중 자살 시도·사망자가 있거나 스스로 기분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사망 직전까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다.

 

 돈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 우울증 경험…4050대 남성들 무력감 '高高'

 

문제음주군에는 스스로 음주 문제를 가진 경우 외 부모로부터

음주로 인한 폭력에 노출됐던 경험을 가진 케이스도 포함된다.

고인이나 가족들이 음주가 치료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간과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정신건강과 경제문제가 함께 나타나는 집단에는 정신건강 서비스의 사각지대인 중·장년 남성들이 포함되어 있다.

경제문제와 연관된 생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경험해 중년의 위기를 겪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다.

 

이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 10명중 9명 가량은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를 겪었다.

복지부 중앙심리부검센터가 발표한 자살 사망자 121명의 심리부검 결과를 보면,

88.4%가 정신건강에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안타까운 죽음,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어요"

 

사망 한달 이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나 정신건강증진센터를 이용한 경우는 25.1%에 그쳤다.

되레 복통 같은 신체적 불편감이나 수면 곤란 등으로 1차 의료기관 등을 방문한 경우는 25.6%로 이보다 많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하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동네의원이 환자를 발견했다면,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도 있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우울증·불안감 등 정신과적 문제 진단 및 처방 확대


우울증·불안감 등에 대한 진단과 치료약 처방 등은 동네의원에서도 가능하지만,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복지부는 동네의원에 관련 교육을 하는 등 우울증에 대한 선별 검사 도구를 개발해 보급,

관련 수가를 만들어 진료 참여를 독려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동네의원에서의 진단 후에도 전문치료가 필요할 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있는 의료기관이나

각 지역의 정신건강증진센터와 연계, 적극적인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을 수있으며

교회의 목사님과 상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고 믿음으로 잘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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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자의 준비와 자세

 

 


오늘은 성경에서 말하는 중보기도에 관하여 살펴봅니다.

1)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

2)기도하는 당사자인 사람

3)기도로써 대적하는 악한 영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였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하나님께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 대항하여 그 분과 함께 그 분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약 4:7-8에 나타나 있다.

 

약 4:7,8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1) 하나님께 순복하라 -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간직하고 계명을 지키는 삶

(요일2:3 “그의 계명을 지키면”,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 기도로써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숙해짐으로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깊은 마음을 통찰함.

기도는 대화요, 연합이며, 결합이다.

 

(3) 손을 깨끗이 하라 - 모든 행함에 정결하라.

 

(4)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생각과 감정을 성령께서 주장하시도록 양보하라. 영적전사에게 거룩함은 필수적인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는 것이요, 예수를 무엇보다 사랑하며,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영적전투를 위한 거룩함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라.

 

 영적전투를 위한 준비와 무장:

 

A.  영적전투를 위하여 거룩성을 점검하여야 한다.

 


1)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가?-하나님을 친밀히 알기 원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길 원함.

2)알고 있는 모든 죄를 자복하라(갈5:19-21’육체의 일’)

3)지속적인 죄악의 틀을 깨뜨릴 치유법을 찾으라(5R Principle-Repent, Remove, Renounce, Renewal, Rejoice)

4)다른 사람으로 당신의 영적 상태를 측정케 하라. 5)더 높은 거룩함의 기준으로 올라가라.

 


B.  영적전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라(엡6:10-20).

 


1)예수님의 보혈

2)기도

3)하나님의 전신갑주

4)찬양

5)예수님의 이름

6)인내-영적무기를 보관하는 창고

7)진리의 띠

8)의의 흉배

9)믿음의 방패

10)성령의 검-하나님의 말씀.

 


엡 6:10-20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C.  도시와 민족의 죄를 회개하라 - 마귀가 모든 국가와 사역에 대해 전략을 가지고 있다

(계20:3-‘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느1:6“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단 9:3 -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 쓰고 나아감. 민족의 죄를 개인 죄와 동일시하여 회개함.

존 더슨은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것 뒤에 숨어있는 영적인 세력들을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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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부예배 대표기도문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제까지 부모님의 손에 이끌리어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여 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고 성령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를 체험케 하옵소서.
그리하여 기도하는데 기쁨을 주시고 찬양하는데 기쁨을 주시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게 하옵소서.

이 땅은 험란하고 황금 만능주의가 판을 치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악한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리고 죄에 물들지 않은 이 학생들이 세상을 헤쳐 나갈 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리 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세상의 법칙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중고등부 학생들이 컴퓨터와 게임 때문에 부모님과 다투고 싸운적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아픈 상처들을 치료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우리 학생들이 발랄하게 젊음을 마음껏 발산 할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까지 배운 컴퓨터와 게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기를 원하옵니다.

하나님! 이제는 중고등부 학생들이 이 땅에 고통 받고 신음 받고 버림받은 낮고 천한 사람들을 사랑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사랑을 체험하여 우리도 어려운 이웃과 가까이 있는 친구들을 위하여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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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삶 사장님 며느리 된 가정부

 

 

 

사장님 며느리 된 가정부

 

한 처녀가 집이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취직자리를 찾았으나 할 수 없이 어느 집에 식모로 가게 되었다. 그런 형편에서도 주인의 양해를 구하여 주일에는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는 처녀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교회건축이 마무리 단계에 왔으나 재정이 모자라 중단할 위기까지 되었으며 내일 밀린 인건비를 주지 않으면 인부들이 목사님께 행패를 부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5년 간 식모살이를 하며 쓰지 않고 모아둔 돈을 몽땅 찾아서 목사님께 드렸다.

 

그러면서 “버릇없는 사람들이지 돈을 제때 못준다고 주의 종에게 행패를 부리다니 말이 됩니까?” “자매님, 이 돈이 있어야 시집이라도 가지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한 푼 없어도 해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목사님은 헌금을 받았으나 그 어린것이 갖은 고생을 하며 소중히 모은 돈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자매와 함께 눈물로 기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건축은 계속되었고, 이 사실을 들은 온 교인들은 눈물로 회개하고 헌금하여 교회는 완공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 중에서 큰 회사의 사장인 장로님이 무조건 우리 며느리라며 납치하다시피 데려가서 돈 한 푼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과감한 투자를 하는 자에 과감한 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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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증인 전도의 지침 7가지 

 

 

(캄보디아 단기 선교 사진)


전도의 지침 7가지 

 

전도는 복음을 먼저 듣고 구원받은 구원의 빚진자들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

들 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방법이다,

주님은 당신들을 통하여 한 영혼이 회개하고 천국 시민이 되기를 기뻐하신다

그 사명을 받은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고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됩시다 

 

1,전도를 방해하는 세력은 사탄임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복음의 빛을 가로막기 때문에 태신자는 많은 방해를 받게되고 태신자

자신도 어두움 가운데서 빛가운데 노출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

이 없이는 전도가 불가능 하니 기도와 인내가 필수다

 

2, 태신자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매일 기도하라 

   기도는 전도의  최우선이다 태신자 의 마음이 열리고 복음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주님을 영접할수 있도록 기도하라 성령께서 그 영혼을 품고 생명의 씨가 잉태하리라

 

3,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계를 개선하라 

   사랑은 관심이다 태신자의 필요를 살피고 채워주라, 그 영혼을 사랑하고 귀히여겨라

   그르면 그 마음이 열리고 전도자를 신뢰하게 될것이다 사랑으로 복음의가교를놓으라 

 

4, 내 삶속에서  구별된 생활로 신뢰를 구축하라 

   사실 생활로 전도하는것이 어려움이 많다  그럼에도 전도 대상자에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겨야한다 자신을 거룩한 삶으로 연습하고 노력하고 기도하자 

 

5, 태신자에 대한 선입관을 버리고 기대를 가지라 

   우리가 전도하면서  저 사람은 안 될 거야, 하는 나름대로 선임관을 가진다 

   나의 힘으로 할수없되 하나님은 하실것을 믿고 10 년뒤 혹 20 년뒤에도 내가 심은 

  복음의 씨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둘수있슴을 기대하자 

 

6, 종말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기회를 포착하라 

   한번의 기회가 중요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수도있다 는 종말적인 신앙으로 접근하라

   복음 전할 기회를 활용하라 오늘 이시간이 구원의 그 날이로다 

 

7,첫 날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라 

   최대의 서비스를 하라  예배드리는 일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도

   록 배려하라 첫 번째 방문이 중요하다 교회에대한 첫 인상이 마음을 결정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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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복음 메시지(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갈증이 날 때 음료수를 마시면 갈증이 더 합니다.

그런데 생수를 먹으면 갈증이 해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음료수는 사람이 만들었고 생수는 하나님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 보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 품질이 더 우수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 믿으세요.

 
 
 
2 ♧ 전도 ♧  

 

선진국의 많은 나라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 10초 복음 메시지(선진국의 많은 나라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지구에서 잘 사는 나라들은 신기하게도 기독교 국가가 많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믿는 나라 가정 개인이 잘 삽니다

행복하고 잘 살기 원합니까?

예수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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