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헌신예배] 참된 인생의 길

 

 

 

 

제목 : 참된 인생의 길

말씀 : 요일 2:12-17

어느 서양의 시인은 “젊은이를 나에게 보여다오. 나는 그 나라의 앞날을 점치리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곧 그 나라의 미래이기에 젊은이를 보면 그 나라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젊은이가 참된 진리안에서, 올바른 이상안에서 맑은 눈동자를 지니고, 뜨거운 정열에 불타고, 냉철한 이성과 근면 성실한 손을 갖게 될 때에 만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는 소망이 있고 밝은 미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청소년들이 타락의 도를 더해가고 있다는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좀 지나간 통계입니다만 지난 95년 4월에 법무부가 발표한 최근 5년간 소년 범죄 동향 파악 자료에 의하면 강도나 강도 살인, 강도 강간 등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 중 10대의 소년이 전체의 54.3%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매년 증가 일로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현재의 10대 후반부터 30대 전후의 청소년들을 우리 기성 세대들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식적으로는 그들이 기성 세대들에 비하면 월등하게 우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엄청난 지식을 심어주기는 했지만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은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편하고 약삭빠르게 돈 잘벌고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가르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니 그런 세대가 남을 생각할리가 없습니다. 일하기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저 남의 등을 쳐먹든지, 사기를 치든지, 남을 밟고 일어서든지, 쉽게 돈벌어서 잘먹고 잘살면 그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생의 길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와 네가 함께 잘살수 있는 길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청소년기의 특징은 지극히 정열적이면서 지식에 대한 많은 욕구를 갖고 있으며 또한 매우 이성적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증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면 한사코 수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하여도 수학이나 과학의 문제처럼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년부, 아동부에서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어린이들이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에 올라갈수록 많은 수가 탈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일이 있으니 그것은 곧 우리의 그 알량한 지혜나 경험으로는 하나님을 헤아려 알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들이 몇 개인지 세어 보려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닙니다.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은 한계가 있고 미약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5-6)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마치 자기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져보려고 하고, 증명해 보려고 하고, 미신을 섬기듯 엉뚱하게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족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진정한 삶의 지혜와 능력을 덧 입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수 있습니까?

2.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면 무엇보다도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말씀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인생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둡고 왜곡된 세상속에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와 교회 안에서도 젊은이들이 무기력한 이유는 그들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고, 세상의 지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 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고 하였습니다.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된다.”(딤후3:17)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사모할때에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고,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둘 때에 올바른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이 없습니다. 사람은 늘 변합니다. 욕망이 끝이 없습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로 계속해서 부정부패 척결을 그렇게도 강조하고 그것을 퇴치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애를 썼건만 오늘 우리 사회속에는 곳곳에서 부정과 부패로 썩는 냄새가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우리나라가 무너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 마져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은, 진실로 우리가 함께 마음놓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우리안에 온전히 거하게 하는 길 뿐입니다. 더구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아직 분별력이 약하고,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니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범죄율이 적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쉐마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에서 능력있게 지혜롭게 돈 잘벌고 잘먹고 잘 살수 있는 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생의 지혜와 선악을 분별하는 말씀 교육을 먼저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평생 떠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안에 가득차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인생의 등불인 말씀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안에 거할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을 벗어 날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3.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세상은 악한 것이므로 세상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상종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과 반대되며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거기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대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철저하게 대적을 받았습니다. 물론 세상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는 범죄한 인류를 조종하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을 떠나서 쾌락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육신의 감각적인 것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도록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면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을 매력있게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갖 향락의 문화가 청소년 꾀어 내고 있습니다. 마귀는 심지어는 우리가 보기에는 건전한 운동이나 예술이나 오락을 통해서도 우리들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온통 그것들에게 빼앗기게 함으로써 교묘하게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지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했습니다. 왜 이겠습니까?

먼저는 세상이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속에서 일어나는 죄악된 욕심입니다. 육신에 대한 탐욕, 사치, 쾌락, 성욕, 물욕등 하나님을 잊게 하고 이웃을 생각지 않게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 다음에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보는 것마다 갖고 싶고, 누리고 싶고, 먹고 싶은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계속해서 강도를 높여가기 때문에 여기에 걸려들면 헤어 날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생의 자랑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고 자기자랑, 자식 자랑, 남편 자랑 등을 통하여 은근히 자기 자신이 높임을 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두번째 이유는 세상의 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세상이 아무리 매혹적이요, 수지맞는 것 같아도 거기에 소망을 두면 실망합니다. 세상의 새것은 곧 낡아집니다. 젊음도 곧 사라집니다. 아무리 값비싼 금은보화나 대궐같은 집도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흙먼지보다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봤다고 스스로 말할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누려보고 가져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월이지나자 그 모든 것은 빛 바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은 이와같이 안개와도 같이 바람과도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천국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도, 영광도, 명예도, 쾌락도 다 지나가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은 자요, 영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의 자본은 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짧은 과거와 긴 미래를 가진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제한 미래는 암울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그의 영원한 미래는 말할것도 없으려니와 현실속에서도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속에서 방황하는 인생이 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많은 지식을 얻는다 해도, 설령 많은 부귀를 차지한다해도, 설령 큰 명예를 얻는다해도 그것들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질수는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벧전1:24-25)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넓은 바다에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지식과 정보와 문화가 산더미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하지 않으면 세상이라고 하는 파도에 밀려 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는 바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만약 당신들이 세상이라고 하는 파도속에 침몰되어 버릴때에 당신들은 물론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안에서 진리를 지키고, 여러분들이 참된 인생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할 때 우리 사회는 붕괴 되어지고 말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험한 세상에서 당신들 자신을 스스로 자신을 지킬 때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이 혼돈된 세상속에서, 이 가치관이 상실되어 가는 사회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찬으로서, 진리의 파수꾼의 역할을 다할 때입니다. 그것이 당신들 자신을 살리는 길이며, 내 가정과 이웃과 교회와 이 사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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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십자가 신앙과 부활

 

 


제목 :  십자가 신앙과 부활
성경 : 누가복음 24장 25∼35절

무언가를 본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기 위해선 잠시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름다움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눈을 감고 움직이면 여기저기 부딪치게 돼 생활하기가 매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영적인 안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본문엔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가 나옵니다. 둘의 차이는 큽니다. 닫힌 자에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죽음, 실의와 좌절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눈이 아닌 영적인 눈이 열린 엠마오로 가는 길은 천국, 생명, 기쁨,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안으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닫힌 영안은 세상적인, 자기중심적인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눈엔 십자가형을 받은 나사렛 목수가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열린 영안에는 부활한 예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 예수, 메시아 예수가 보입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 곁에서 대화하는 것은 영안이 열릴 때나 닫힐 때나 똑같습니다만, 예수님이 보이고 깨달아지는 건 닫힌 영안이 열릴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깨달음이 있길 바랍니다. 엠마오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 바로 예수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목회자 빌리 그레이엄은 “빈 무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생명과 부활과 대속의 신앙이 됩니다.

어느 종교 창시자가 부활했습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 주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고치시다가, 끝내 주님 스스로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피터슨 스미스는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다만 불신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증거가 있을까요.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사복음서 안에 쉰여덟 번, 사도행전에 스물두 번, 바울 서신서 안에 육십 번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로마 시대의 정치가, 역사가들도 예수님의 사심을 문헌으로 기록한 바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다투어 예수님의 사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체험했습니다. 이 증거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 가운데서도 기쁘게 순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부활이라는 말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기원으로 합니다. 부활의 믿음과 그 신앙으로 우리는 생의 갖가지 좌절과 낙심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과 그에 대한 영적인 안목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패배치 않게, 낙담치 않게, 실망치 않게, 분노치 않게, 격동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믿으며 전진하는 우리들은 사건 앞에서도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슬픔을 찬송으로 바꿉니다. 그것을 우리는 욥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바울에게서, 요한에게서, 빌립에게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느 곳에 있던지 감사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사건이 2000여년 전 오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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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고별설교] 모세가 마지막에 남긴 말

 

 

 

신명기 32장 7∼8절

모세는 아주 건강하게 살다가 12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모세는 이스라엘 총회를 열어 고별의 말을 전하면서 중요한 세 마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들어가는 가나안의 땅을 모세와 아론은 들어가지 못하는 그 아픔을 가지고 한 말입니다.

그 첫째가 ‘옛날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역사를 보존하라는 말입니다. 옛날이 우리의 현실이며,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소중하게 보존하고 아낄 때 미래가 약속되고 목적이 뚜렷해지며 강력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는 없습니다.

다음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역사에는 마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디마다 그 시대의 특별한 사명이 주어지고, 각 시대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훌륭하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마치 사람에게 있어서 10대와 40대, 60대, 80대의 삶의 특징과 사명이 각각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걸그룹 ‘소녀시대’와 같은 앳된 모양대로 여생을 산다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인은 조선시대에 그 나름대로 훌륭한 삶을 살았고, 일제 강점기에도 환난 속에서 훌륭하게 버티며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잣대를 가지고 과거의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지나온 역사나 미래의 표준도 아니고 심판자도 아닙니다. 우리도 그 역사의 한 마디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음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그리고 사람마다 사명이 있고, 그 사명에는 경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限)하셨느니라(행17장)’는 말과 상통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모세의 두 번째 말과 통합니다. 다시 말해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나라나 민족, 개인은 그 나름대로 일정한 한도의 사명과 역할, 그리고 공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계가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암적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암처럼 아무데나 퍼져가고 건너가고 다 건드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과 사회, 그리고 국가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사명과 역할이 있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영역 안에서의 충성입니다. 넘어가서는 안 될 경계선이 무시되거나 침범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여자는 여자로 남자는 남자로, 소년들은 소년답게, 장년층은 장년답게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서에 있는 지체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손은 손의 역할을, 눈은 눈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퍼즐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와 같습니다. 퍼즐 조각들이 각각의 색깔과 모양, 크기, 위치는 다르지만 서로 맞물려 전체의 그림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적절하게 창조하셨다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각자는 그 맡은 사역을 그 경계선 안에서 충성스럽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전체를 위해 나선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전체 역사는 하나님만이 이끄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2013년이 갑니다. 우리는 이 해에 우리들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다했습니다. 이제 새해에는 새해대로의 사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민경배 목사 (백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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