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기도문.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서로다른 곳에서, 모두 저마다의 출발점이 달랐음에도

오늘 이시간 제일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되어 찬양과 예배를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이 찬양과 예배를 기뻐 받아 주옵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전능하시며 늘 저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저희가 속한 세상의 모든것이 아버지의 뜻 가운데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가 때때로 습관처럼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잃고 노심초사하며 세상속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혼돈할때가 있습니다.

진실로 고백하오니 주님!

저희가 이 자리에서 믿고 선포한데로 담대함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선과 악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삶을 주옵시고, 이땅에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오직 의만 취할수 있는 명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희 가정과 교회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

각 가정의 평안과,  그 가정의 일터와 각 가정의 가정의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고

온 가족이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로운 역사를 체험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약한자에게 하늘의 힘을 더해 강하게 하시고  병든자에게 치유의 역사를,

자녀들에게 지금 어디에 있어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를 깨달아

해야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을 분별할수 있는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씀을 전하시는 목사님을 주님의 오른팔로 붙들어주시어, 말씀을 전하실때

성령님이 함께하시어 영력이 더한 능력의 말씀이 되게 하시고 듣는자마다

성령의 불을 체험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이 예배의 시간시간 마다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실 것을 믿사옵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림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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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고전15:1-8

제목 : 부활의 증거들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만해도 그렇습니다. 이성적, 논리적, 과학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법칙에 의하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질서도 절대로 저절로 생겨 날 수 없습니다.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면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나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과학적으로는 절대로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저절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저절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대답은 하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니 모든 이성이나 지혜나 과학이나 질서나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과학과 지성과 이성과 경험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이성과 경험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행2: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결단코 사망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의 부활은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도 이성과 경험안에 갇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1)성경과 예수님이 증거입니다.

 

부활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4절을 보겠습니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은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3:5절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6:10절에서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즉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고하였고,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뭐가 되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허무맹랑하고 휘황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정신 이상자가 기록한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대의 거짓말장이요, 과대망상자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만큼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성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는 죽을 거다. 살아날 거다 말씀하셨는데 성인으로 믿는다면 따라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과대망상주의자, 정신이상자로 몰아가야 정상 아닙니까? 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성경이 어떻게 20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수십억권이 팔린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하여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따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있는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쓰레기 같은 것으로 여기든지........

지난 주일에 전도를 하다보니까 윗마을 버스 정류장 밑에 집 할아버지가 자기네 가문에서 사회로 진출했으면 판검사는 넉넉히 하고도 남을 제일 똑똑한 두 놈들이 하필이면 목사가 되었다고 한탄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다시 오신다. 예수님 믿어야 죄용서받고 천국간다. 당신네들은 그걸 미친소리라고 하는데 그 똑똑한 두 놈이 바보 멍청이 천치라서 그걸 믿고 그걸 전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분명히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진정 유일한 부활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빈무덤이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무덤이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냈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감춰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릴 것을 우려하여 무덤입구를 큰 돌로 막은 다음에 바위와 무덤 양쪽 벽에 밧줄로 여러 번 동여매고 진흙을 발라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세워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밧줄 아니라 쇠사슬로 백번천번만번을 묶어놔도 소용없고, 진흙 아니라 쇳물을 부어놔도 소용없습니다. 경비병 아니라 경비병 할아버지를 세워놔도 소용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는 무덤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임으로 무덤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8: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천하없는 사람이라해도 다 무덤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권세 앞에 그 어떤 조그마한 저항도 한번 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져 무덤에서 끝났습니다. 공자는 곡부성의 사수언덕에 안장되어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은 62세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무덤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무덤이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덤의 권세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서는 생명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무덤에 갇힌 자가, 사망 권세에 진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셨기 때문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에 집착하지 마세요.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연속극에 보면 무덤 앞에 가서 막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부질없는 짓입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생기가 있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썩어 냄새나는 시체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만 생명과 희망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천하없는 것이라해도 다 무덤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생명과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시고 살아가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만해도 16번이나 됩니다.

오늘 본문 5-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심어는 500여명이 모여 있는 곳에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다가 500여명의 문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고, 귀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산증인이 되어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제자들의 삶이 증거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하나같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일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생명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고 증거하다가 하나같이 다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바보가 거짓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요새 말로 총 맞았습니까? 안 그래요? 혹시 돈이나 한보따리 안겨 주든지 무슨 큰 권세나 하나 준다면 몰라도 돈이나 명예는커녕 환난과 핍박과 죽음만이 돌아올 그 일을 위해서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 잠깐 있는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더 소중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알량한 이성과 지식과 경험속에 갇혀 거짓말이다, 환상이다, 신화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연 정말 부활할 수 있을까하면 의심하거나 잘 믿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걸어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가 있지? 어떻게 물이 갈라져 벽처럼 설 수가 있지? 여러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의 한계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주님의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절망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모든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다 이기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의 촉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내 작은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틀을 깨트려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 부족한 것들, 어려운 것들, 죄된 것들 다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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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대표 기도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주님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하시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오늘 이 거룩한 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 주시고

우리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사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하시니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또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부활의 하나님 아버지

죄 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수모와 그 고통을 다 당하시고

끝내 십자가에 달리심은

오직 나의 죄, 나의 허물임을 생각 할 때에

이 죄인 몸 둘 곳 없어 온 몸으로 속죄하며

용서를 빌 따름입니다.

주님을 빌라도 법정에 넘겨주던 무리들,

예수를 십자가에 목 박으라고

아우성치던 무리들

그들이 바로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나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

이아침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내 마음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게 하셔서

죄와 허물로 살아온 옛 사람의 모습들을

내 감정, 내 정욕대로 살아온 이기주의를

겸손하지 못했던 교만함을

아집에 함몰되어

남을 비판하고 정죄했던 어리석음을

특히 모든 안건에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내말은 맞고, 남의 말은 다 틀리고

내 주장만 옳고, 남의 의견은 무시하며

모든 것이 다 내 마음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욱박지르고 따돌리는

아주 독선적이고 고집스런 습관들을

또 말로만 예수 믿는 기독교인인척하며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표리부동함을

이제 모두 다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주님을 닮은 새사람으로, 새 영으로

거듭나게 하여 주셔서

내 속에 예수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타협하는

사랑과 섬김과 돌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없는 사랑으로 우리 교회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희가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인근에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원하지 못하였사오니

이제라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부활 신앙을 가슴에 안고 살아서

정말로 예수 믿고 사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해 보임으로

우리 교회에 새 생명 찾은 영혼들이

가득 차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혜가 풍성하고 복 받는 교회가 되고

서로 사랑하며 신행일치 하는 교회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 교회가 주님이 주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교회위에 세워주신 각 기관과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주님 함께 하셔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며

우리들의 헌신과 봉사로 말미암아

우리 교회가 정말로 좋은 교회가 되도록

열심히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지금 이 시간에도 부활의 멧세지를 들고

세계 열방 곳곳을 누비며

한사람에게라도 더 전파하기 위하여

애쓰고 수고하는 선교사님들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늘 동행하시어

아픈곳 없게 하시고

외롭지 않게 하시고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이 공급 될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내리어 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보호하여 주옵소서.

민족의 앞날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사오니

이번 총선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선택케 하시어서

그들을 통하여

이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시고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는

역사를 이루시게 하시며

힘 있는 자는 더 이상 약한 자를 누르지 않고

모든 위정자들은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백성을 생각하며 정치하게 하시고

모든 백성들은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간다면

마침내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며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고

단 위에 서시는 목사님을

성령으로 붙드시고,

권세 있는 말씀으로

저희 온 심령을 채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기쁜 부활주일을

우리와 함께 나누지 못하는

교우들을 기억해 주셔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던지,

저들 모두에게도 성령님을 통하여

부활의 은총과 기쁨을

우리와 똑 같이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글로리아 찬양대의 준비한 찬양이

하늘에는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감동의 찬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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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소서
때론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원망도 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난을

주셨냐고 원망도 했습니다.


모든 시험은 피할수

있다는 말씀도 주셨는데
막상 그 말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돌아보면 내게 그

고난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인것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걸어가신
예수님 고난에 비교할수 없는

 작은 고난에도 헉헉이며
불평과 원망을 했었습니다.


주님!
왜 절 사랑하셨읍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사랑 받을

거리라곤 털끝만큼도 없는데...
이제 주님의 고난을 깨닫게 하소서


그 고난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표이면

 내가 받아야할 고난이

였음을 알게 하소서


아직도 내 속에

불평이 있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초라해 하고 있읍니다


주님 !
이제 그만 성숙한 

성도로서

 더 이상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십자가 뒤에 던지고
감사하게 하소서


무엇에나

감사케 하소서
내 생명이 지금

 끝난다해도 감사케 하소서
예수님 존함 의지하여

 기도 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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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설교]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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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예배설교] 빌라도의 선택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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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예배기도

종교생활 2018. 3. 29. 16:34


구역예배기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보호 안에 각자의 삶을 살다가

이렇게 다시금 만나 주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합나다.

 


우리 구역 식구들이 모이기에 힘쓰며 기도에 힘쓰고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주님께 시선을 두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여,

주님이 이끌어주시시 않으면 넘어집니다.

주님의 능력의 오른팔로 붙들어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역 식구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허락하사,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세상의 일로 어려움 당하는 일이 없도록 지켜 주시고,

우리가 환란가운데 거한다면,

그 환란 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을 바라보며 인내함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예배드리는 이 가정에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셔서

평안한 가정 되게 하시고,

주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는 믿음의 가정 되게 하옵소서.

이 가정에 물질의 축복도 허락하여 주셔서 물질로 인하여 어려움이 당하는 일 없도록 채워주시고,

가정원들의 건강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구역 식구들의 기도제목을을 아시는 주님께서,

각 가정의 계획하고 있는 모든일들이 주 안에서 형통케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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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절기기도] 종려주일 대표기도

 

 

 

종려주일 대표기도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벗은 자를 입히시는 주님,


우리의 모든 일상을 책임지고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고 축복의 땅 가나안까지 이끄셨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를 거니는 나그네 인생들에게 하늘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늘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초라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 우리도 나귀처럼 연약하지만


왕이신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드리기 원합니다.


주님이 쓰시력 할 때 자신의 나약함을 핑계 삼지 않고, 모자람을 불평 하지 않게 하옵소서.


여태까지 억지로 주의 일을 하거나 불평과 짜증을 일삼았다면 용서해 주소서.


주님을 모신 것이 기쁨이요 행복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세상에는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우리처럼 연약하고 무지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순이 우리에게는 은혜가 됩니다.


우리는 그저 왕 되신 주님을 위해 온 몸 바쳐 충성하기만을 소원합니다.


완이신 주님, 우리의 장점이 다른 사람에게 거리끼지 않게 하시고 남보다아주 조금 나은 능력을 내세워


자고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주인 앞에 불려 나온 종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지 말고 주인의 쓰임새에 맞게 순종하게 하옵소서.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가지신 주님, 왕이신 주님이 죄 많은 우리를 위해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종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참 인간에 되어 섬기신 은혜에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왕이신 주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참된 종의 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지만 실제로는


왕이신 예수님 앞에 굴복하지 않았던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이 저희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을 부리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도 쥐락펴락 하려고 골몰했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소서.


어디서나 내가 드러나기를 원했고,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시키려 했고,


자기 목소리를 높여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마시켰습니다.


주님, 우리 안에는 여전히 스스로 왕이 되어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의 쓴 뿌리가 꿈틀거립니다.


완이신 주님을 높이고 자랑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에선 육체의 소욕에 무릎 끓는 사악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성령님께 우리의 전 인격을 맡겨드리오니 이 육체의 소욕을 다스려 주옵소서.


그래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는 연약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장려하시고 세우시니 말씀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로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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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대표 기도문

 

 


 흑암의 세계에 빛이 있게 하시고, 혼돈한 세계에 질서가 있게 하시며, 생명이 없던 세계를 살아 숨쉬게 하신 하나님 진실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죽었던 매화의 등걸에 화관처럼 눈부신 꽃이 피게 하시고, 잠들었던 자연을 일깨워 생명의 활동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이 대자연이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죽어서 무덤에 묻혔던 예수를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당신께서 그 분을 살리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 분의 다시 사심을 경축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이 모임을 축복하옵시고, 저희들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능력의 주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며, 영생의 소망을 주신 예수님 진실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당신께서는 빈 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당신을 무덤에 가둬 두지 못했습니다. 육중한 돌문이 당신을 무덤에 가둬 두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 나셨으며, 돌문을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당신께서 당하신 고난 때문에 저희가 구원에 이르며, 당신께서 이루신 승리 때문에 저희가 승리하며, 당신께서 받으신 영광 때문에 저희가 큰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이 큰 영광에 이르도록 모인 저희 무리들을 인도하옵소서.

 

흑암과 혼돈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빛과 질서와 생명을 경험하게 하시고, 죄의 현실을 극복하고 중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며, 죽어 무덤에 갇힌 것 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돌문을 박차고 빈 무덤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을 맛보게 하시는 성령님 진실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당신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일년 삼백육십오일이 부활의 아침이 될 것을 믿습니다. 무덤에 갇힌 죽음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돌문에 갇힌 불가능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함께 하시고, 당신께서 도우시기 때문에 매일 매일 부활의 아침을 맞게 될 것을 믿습니다. 임마누엘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기며,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는 승리의 주역들이 될 수 있도록 힘 주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죄많고 부족한 저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시고, 부활의 능력을 주시며, 부활의 삶을 주신 하나님 진실로 감사합니다. 오늘 모여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깊은 뜻과 축복을 깨달아 알게 하옵시며,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은혜로운 시간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이 예배를 통해서 무한한 영광과 찬양을 받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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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대표 기도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꽃꽂이 솜씨로 온 대지에 아름다운 꽃물결 치는 4월 하고도 이 좋은 계절에 우리를 건강으로 지켜주시고, 주의 날을 맞아 주의 전으로 불러주시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부활주일을 맞아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화창한 봄날 꽃들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더 충만케 하옵소서.

 

 

천년에 한번 우는 새의 눈물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도록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바다가 마르도록 피와 물을 쏟으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남기신 핏자국마다 고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증오와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피 묻힌 우리의 손을 용서와 사랑의 손길로 변화시켜 주시고,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을 배품과 나눔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그리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드리어진 온갖 어두운 부분들을 부활의 빛으로 물리쳐 주시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이 꽃피게 하옵소서.

 

우리들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 전도와 사역 훈련에 온 힘을 쏟는 우리들공동체 되고자 온 성도들과 모든 구역들이 힘을 모우고 있사오니, 이 지역사회에 복음의 진리가 힘을 얻고 섬김과 나눔의 손길마다 열매를 맺으며 성령의 능력이 증거 되어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임 받는 교회되길 원합니다.

사랑과 희망에 메말라 황무지 같은 이 땅에 생명의 꽃씨를 부지런히 뿌려서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소망의 꽃을 쉬지 않고 피어가는 교회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웃음을 잃고 메마른 언어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여 절망의 홍해를 갈라 주시고 불행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거두어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샘물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거운 삶에 지친 성도들을 눈물의 골짜기로부터 벗어나 축복의 평원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어두운 인생의 그늘에 밝은 햇살과 화창한 봄날을 내려 주시옵소서.

 

단위에 세우신 담임목사님을 위해 간구합니다.

초대교회 회복의 꿈을 꾸는 교회됨을 위해 1목회 비전을 세우고 온힘으로 목회를 하고 계시오니 하나님께서 마음껏 축복하셔서 목회 현장마다 사역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꿈과 계획대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은 특별히 부활의 메세지를 전하실 때  전하는 말씀 말씀마다 성령께서 7배 역사하심으로 부활과 소망을 살리는 레마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축도하실 원로 목사님을 영육간에 강건케 하시고 남은 여생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세례 받는 이들을 영육 간에 축복하여 주시되 불세례 성령세례까지 허락하여 주시고 앞으로의 믿음 생활 잘 하도록 늘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시온성가대의 찬양을 흠양하여 주시고 이곳저곳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 헌신 봉사하는 손길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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