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 거듭남의 의미

 

 


말씀 : 요1:9-14

제목 : 거듭남의 의미

오늘부터 오후예배 시간에는 어떤 주제를 택하여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주일오후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의 말씀들은 수요밤예배로 옮겨 계속 강해를 실시할 것이다. 왜 이런 결정을 하였느냐하면 우리가 전도에 대하여 살펴보며, 또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하여 늘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은 거듭남에 대한 체험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전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거듭남을 체험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지만 그러나 몇분의 초신자들도 계시고, 교회생활 오래하였지만 아직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신 것 같아 거듭남에 대하여 몇시간 동안 말씀드릴 때 아직 체험하지 못한 분들을 이번 계기를 통하여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기를 바라고, 이미 체험하신 분들은 더욱 확실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논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그 중에서 어떤 곳에 보니까 개신교인들은 그래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천주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얼마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답변은 자신들이 선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천국에 간다고 장담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보내고 안보내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들은 그저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신교를 비판하기를 개신교인들은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쉽게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행동은 하지않고 자기 나름대로 믿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여 구원얻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교만이라고 반박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 천주교인들이 말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반박이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자기가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 오히려 천주교의 주장이 교만이고 불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겸손인 것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이요, 동시에 불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확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100% 완벽하게 그대로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신이고, 교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거듭남이란 물론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론 육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났다고하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에 대하여 보다 확실한 의미를 살펴보려면 요3:3절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a[nwqen(아노덴)은「위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새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말은 위로부터 났다. 처음부터 새로 났다. 새롭게 태어났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라는 것은 물론 하늘을 가르키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므로 결국은 위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듭이라는 말속에 이미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났다는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사람의 지혜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도덕적 삶이나 종교적 철학적 사색이나 탐구나 수양이나 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 기여나 혈통적 계승에 의해서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필요없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은 너무나 많다.

요1:12,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보라!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혈통으로 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적 혈통적 관계에 의하여 거듭남이 계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말은 이성에 대한 것이든 물질에 대한 것이든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든 여하튼 어떤 것이라도 세상적인 욕망에 의하여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사람의 뜻으로나 나지 않는다는 말은 말그대로 종교적이든 아니면 철학적이든 아니면 윤리적이든 그 어떤 것이라해도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하여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거듭나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물질적, 학문적, 지식적, 도덕적, 윤리적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엡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거듭남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의 역사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것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철학적, 종교적 수양으로 되어질 수도 없고 되어져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보면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해석할만한 구절들이 몇구절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야고보서 2장이다. 예를 들면, 약2: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마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은 일견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행위구원 혹은 공로구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야고보 2장에 대해서 보자. 야고보서 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배경을 보아야 한다. 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1:1절에 있는 바와같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외적으로 많은 핍박에 직면해 있었고, 내적으로는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저 형식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믿는다고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유대교의 형식주의, 율법주의, 외식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런 형식적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다면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거기서 말하는 행위가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100% 완벽하게 선하게 옳게 바르게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씀은 진실로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다운 행위를 위해 힘써야 하고 또 그 결과로써 어느정동의 믿음의 행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씀이 100% 완벽한 행위가 없다면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면 이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태초부터 세말까지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기에 심각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더 심각한 것은 만약 그런 의미로 씌였다면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100% 완전한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완전히 성화가 되어 완전한 행동을 행해야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천국 갈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믿으며 구원받는다는 말씀들도 공수표가 되고 말지 않는가?

그러니까 오해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에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하였다하여 이것이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정말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가능한 최대한 실천하며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때에 어느정도의 믿음의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마7:21-23절의 말씀도 잘 읽어보라. 이것이 정말 100%행함이 없는 자들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주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마7:15절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주신 말씀이다. 거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시면서 겉으로는 믿는 자인체하고 더 나아가 선지자 노릇까지 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뒤로는 불법을 자행하며 다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2절에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기서 말하는 것도 역시 거짓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불법이란 우리가 나름대로 잘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주님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그래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진실로 살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잘못하고 또 때로는 죄를 짓기도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행하는 불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설령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도 실제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그 주님의 뜻을 따를 의사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진정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으니 설령 겉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니 결국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고해서 이 말씀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100%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석한다면 역시 천국에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번복하는 것이 되게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무효하게 만드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라. 예수님께서는 분명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는가? 더구나 100%믿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물론 진짜 믿음에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100%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얻는 믿음은 100%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대속의 죽음, 그분의 부활을 통한 구속의 은총, 그리고 그분의 다시오심, 그로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가운데서 하나님앞에 엎드리며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듭남의 의미와 그 방법을 되새겨보며 진정 구원의 확신가운데 살자. 우리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나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믿고,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그래서 그를 믿는 자엑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주어졌음을 믿고, 그래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 혹은 우리가 그분앞에 갈때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을 믿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든 믿음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온전히 믿으며, 믿는 자은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더욱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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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성령의 충만함

 

 

 

 


제목 : 성령의 충만함

본문 : 엡5:15-18

 


1.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혜란 한마디로 어떤 주어진 것들을 선용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육체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랑이든 이성이든 경험이든 시간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여하튼 각자의 삶속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선용할 때 모든 것들이 최상의 가치를 갖게 되고 그러면 우리 삶 전체가 복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그것이 돈이든 지식이든 상황이든 환경이든 기회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제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그걸 선용할 줄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말씀이예요. 제아무리 박사학위가 100개라도 그걸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더 나가서 그것을 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선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그저 자신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데만 사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박이나 향락이나 사치로 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지고 폭력이나 휘두르며 강도짓이나 하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이 많은데 그걸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을 궁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며 해킹이나 하고 남의 통장에서 돈이나 빼가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압력이나 행사하여 뇌물이나 받다가 망신만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엇이 옳은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선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5,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결로 세상의 왜곡된 가치관과 삶의 모습에 휩쓸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며 정말 무엇이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작든 많든 하나님의 뜻대로 선용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말할 나위없이 생명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17,18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즉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되고 그러면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선용할 수 있는 참된 지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진리의 길을 어떻게 알 수가 있어요. 무엇이 진리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지혜로 진리를 알겠습니까? 설령 안다면 그 진리의 길로 나 혼자 잘 갈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그 진리가 믿어지기는 하던가요? 도무지 안됩니다.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따라 갈 수 있습니까?

 

다른 뾰죽한 수가 없어요.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어둔 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내 어둔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귀를 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서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 진리의 길을 알게 되고,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콤한 생명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안 보여요. 안 들려요. 안 믿어져요. 아니 막혀 있는데 어떻게 들려요. 눈이 감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여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굳어진 마음과 이성과 경험으로 영의 세계에 대하여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리고 어떻게 보여요.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어떻게 분별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사람이 할 수 있나요? 돈이 할 수 있나요? 과학이 할 수 있나요? 경험이 해결해 주나요? 안돼요. 영은 영이요, 육은 육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하는 거예요.

고전2:13절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무엇으로 분별해요. 신령한 것으로,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서만이 분별하게 된다는 거지요.

좀전에 보았던 18절 말씀도 보세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술 취한다는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 마시는 술에 취한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떨어져요. 몸도 제 맘대로 안돼요. 그래서 용감해지지요. 그래서 술 마시고 용기를 얻어 평소에 못했던 소리도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소리를 지르고 범죄 행위를 하고 희롱하고 추태를 부리곤 하지요.

 

그러나 술취한다는 것은 꼭 마시는 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향락, 안락, 즐거움, 명예, 권세 등등 뭔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만족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세상의 것으로 취한 상태, 곧 세상의 것들에게 정신을 빼앗긴 상태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시는 술에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듯이 세상에 취하면 영이 제영이 아닌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분별력도 판단력도 없고 육체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취한 사람은 영적 분별력이나 판단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자꾸 영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관심과 열정보다는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성령에 취해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달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 받으면 내 마음속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거룩과 의로 충만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마음속에 가득 들어 있는 진리, 생명, 은혜, 사랑, 거룩, 의를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과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일들에 열심을 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의를 향하여 갈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진리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겠지요. 그저 세상에 취해서 세상의 것에 얽매어 욕심과 이기심과 안일함이 나를 지배하게 되겠지요. 마치 거기에 행복이 있고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기며 세상길로 세상길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그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인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과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달려가 달려 갈지라도 세-상길 가지 말고-, 그 하늘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품을 향해-.’

 

정말 우리 성도님들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충만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정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사랑과 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주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16,17절 다시 한번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월을 선용하며 지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때가 악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안에서 말씀안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보십시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한 일을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착하고 깨끗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살면 자연히 선을 배우게 되고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선한 모습과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혼자서 못되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이 사람은 결국 왕따를 당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악을 행하고 싶어도 행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살면 선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왜요? 보고 배우는 게 악이니까요. 보고 배우는 것이 악이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설령 어찌어찌해서 혼자 선한 척하면 왕따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줄 알면서도 같이 행동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세월이 가면 자기가 하는 나쁜 행동들이 나쁜 줄도 모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잠13:20절에선느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왜곡된 세상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늘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인본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사고 구조도 자연히 그렇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왜곡된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만능주의, 개인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빠져 그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그저 어찌 하든지 많은 소유하기 위하여 육신이 요구하는대로 죄와 무지속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하는 이 한마디 속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과학은 발달하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리의 측면에서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속에 처해있는 우리의 현주소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속에서 휩쓸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가 곧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언제나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획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언행들, 우리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상들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갈때에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혜로운 자가 되기위하여 기억할 것은 세월을 아껴야 한다 즉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15,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입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물론 아낀다는 것은 그저 애지중지 보관해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아끼는 것은 각각의 용도에 맞게 귀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을 아끼는 것은 돈을 쌓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재능을 아끼는 것도 재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능을 유익하게 사용하여 자신과 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아끼는 것은 자식을 가만히 앉혀 놓고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맨날 자식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가치있게 바르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자식을 아끼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아름답고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자신과 남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게 모두 유익이 되도록 가치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웃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며 우리 자신도 정녕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육체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정말 너무나 귀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귀한 것들을 어떻게 사용해 오셨습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정말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건강, 지혜, 물질, 육체, 시간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아름답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진정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취하지 말고 생명과 진리와 의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아서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동시에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기쁨과 유익을 주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며 주의 영광 나타내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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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 새롭게 태어나는 것 


 


 


말씀 : 딤후3:15-17

제목 : 거듭남의 방법(1)

지난 시간에 우리는 거듭남의 의미에 대하여 보았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이 온전히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 죄인인 인간이 죄인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어불성설이다. 오직 생명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오직 온전한 권능과 지혜와 사랑과 은총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과 권한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그저 하나님만을 온전히 믿고 따르라. 그분의 전권을 믿으라. 그분의 구원의 은총을 믿으라. 부족하여도, 어리석어도, 미련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의심하지 말라. 물론 부족하고 연약할 때 심지어 죄 가운데 빠질 때 우리는 철저히 회개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런 가운데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더욱 구원의 확신과 기쁨과 은총가운데 살라.

그렇다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이 구원의 은총을 받으려면 어찌해야 되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물론 이미 수차례에 걸쳐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였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1.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믿어야 한다.

믿음에 대해서 생각할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먼저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무엇으로부터 믿음이 출발된다고 보는가? 왜냐하면 만약 성경에 대한 믿음 즉 성경이 정확무오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으며 따라서 만약 성경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고 믿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식대로 믿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직 성경 안에서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랑과 은총과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오직 성경에서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믿음의 기초이고, 믿음의 출발점이며, 믿음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러하기 때문에 그 말씀만이 진실하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경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공해주는 책으로 믿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말씀들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순종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속에는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지, 성경의 기능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먼저 성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하는 것은 오늘 16절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들을 가감없이 오류없이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직접 쓴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같은 인간이 쓴 것이라도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인간의 말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도 있다.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기록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령님께 붙들린바 되어서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글씨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불러 주는대로 아들에게 기록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 유언장에 있는 내용은 누구의 말인가? 비록 쓰기는 아들이 썼지만 불러주기는 아버지가 불러 주었으니 그 말은 아들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인간을 선택하여 성령으로 사로잡아 당신의 뜻을 전해주어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는 완전히 질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다른 개념이라서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감화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천국과 지옥 등등의 영적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2:13에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 즉 하나님께 관한 일, 구원에 관한 일은 세상의 이치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에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인류에게 유일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으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진리이며, 책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서 감히 내 이성이나 지식이나 경험으로 과학으로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말씀 그대로 순진무구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더욱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2.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창조와 주권을 믿어야 한다.

그 다음에 믿어야 할 것은 물론 하나님이다. 우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구원을 믿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쉽게 말하며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과학과 정신세계를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그릇에는 도무지 담겨질 수 없는 그야말로 무한히 크고 영원하고 지혜롭고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경험과 지식과 이성과 과학이라는 그릇에 담겨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도구로 그 분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한다면 천날만날 애써봤자 절대로 확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 우리 눈을 보자. 인간의 눈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눈이 아무리 밝은 사람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세균들은 인간의 눈을 아무리 부릅뜨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음식을 썩게 만드는 세균을 눈으로 확인하고 잡아죽이겠다고 천난만날 썩은 음식물을 들여다보아도 냄새만 나지 세균을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인간의 눈은 적당한 광도가 있어야 물체를 식별한다. 너무 어두우면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보지 못한다. 그런데 밝다고 다 잘보이는 것은 아니다. 밝아도 적당히 밝아야 한다. 여려분, 태양을 직접 볼 수 있는가? 한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가서 한번 보라. 몇분만 지나면 시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태양은 인간의 눈의 한계를 벗어난 밝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의 눈을 너무 어두워도 보지 못하고 반대로 너무 밝아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이나 지성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과학과 그 이외의 다른 어떤 그릇에도 담을 수 없을만큼 너무 크고 너무 밝고 너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성과 경험과 과학으로 하나님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날만날 연구해봐야 보이는가? 들리는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없다고 말할 수 밖에....... 그러나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은 마치 두눈을 부릅뜨고 썩은 음식을 쳐다보면서 내가 아무리 봐도 병균이 없으니 이곳에는 틀림없이 병균이 없다고 우겨대는 것과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항상 이점을 생각하라. 우리의 이성과 과학과 지성과 경험과 정신세계로 보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절대로 못본다. 영성으로 보라. 영성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오직 성경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라. 세균을 보려면 현미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보려면 성경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보라. 그러면 분명 보인다. 들린다. 영광의 나라가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덮어놓고 그냥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존재는 성경책이외는 다른 증명할 방법이 없는가? 아니다.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우주만물이 곧 하나님 존재의 증거이다. 우주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는 우주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없이는 모든 물질세계나 모든 생명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드리면 과학에서 열역학 제1법칙에 의하면 어떤 폐쇄된 공간속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불변한다. 쉽게 말하면 어떤 물질이나 에너지도 자연적으로 없어지거나 생겨날 수 없고, 자연적으로 감소되거나 증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형태와 모양은 변할 수 있고, 그래서 한쪽의 에너지가 감소되거나 증가하면 반대로 그 만큼의 다른 에너지가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는 있어도 그 총 에너지의 양은 항상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처음에 없었던 것이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있었던 것이 저절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어떤가? 그런데 우주는 존재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저절로 사라져 버릴 수도 없는데 분명 우주는 존재한단 말이다. 분명 어떤 물질이나 생명이나 에너지도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저절로 사라질 수도 없는데 이 신비한 우주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신비한 생명체는 엄연히 우리앞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분명히 그냥은 있을 수가 없는데 있단 말이다. 분명히 그냥 생명체가 생겨날 수 없는데 이 신비한 생명체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이외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과학에서도 나름대로의 주장을 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폭발설을 주장하고, 생명체에 대해서는 진화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과학에서는 우주는 처음에 무언가 초고밀도의 특이점이 있어서 이것이 대폭발을 일으켜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말도 안된다. 그렇다면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데 그 초고밀도의 특이점은 처음에 도대체 어떻게 해서 존재했단 말인가? 저절로 생겨날 수도 없고, 저절로 사라질 수도 없고 자기들 스스로 말해놓고 그럼 어떻게 그 특이점은 존재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또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이 우주의 신비한 질서가 어떻게 저절로 형성 되었단 말인가?

또 생명체의 존재에 대해서는 진화론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말도 안된다. 처음에 어떤 생명체가 저절로 생겼다고 하는데 과학의 법칙에 의해서 어떤 유기물로 저절로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 되었다고해도 그것이 자꾸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말도 안된다. 과학의 유전의 법칙에서도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만이 유전된다. 그러니까 부모대에 가지고 있지 못한 유전자는 저절로 생길 수가 없다. 그렇다며 처음에 생겨난 그 어떤 원시적인 생명체에 지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십억개의 유전자가 있었단 말인가? 있었다면 처음부터 인간이었어야지 어떻게 원시생명체로 남아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이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존재밖에 없다. 하나님이 없이는 이 우주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없이는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우주와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물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해와 달과 별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그리고 땅위의 식물들을 그 종류대로, 새들을 그 종류대로, 물고기를 그 종류대로, 들짐승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시고 그리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함으로 창조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가 동시에 증명된 것이다. 즉 우주의 존재, 이 신비한 생명체의 존재, 그리고 거기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증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이 두가지를 분명히 기억하라. 우리는 성경을 바로 믿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믿으라. 그대로 순종하라.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지 말라. 오직 그 말씀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의 길을 찾으라. 믿고 따르라.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라.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라.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라.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라. 그래서 우주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또한 그러한 사실을 증거하는 성경의 말씀들을 온전히 따라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온전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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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말씀] 주일낮예배설교 언제나 소망은 있습니다

 

 

 

제목 : 언제나 소망은 있습니다

말씀 : 애3:19~26

 

1.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근간에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농어촌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인데 농촌사회가 초고령화, 동공화되다보니 교회도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천국으로 가시는 분은 많고 들어오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지난 1월 말에는 정병호 장로님이 소천하시고, 지난 주에는 최윤익 집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지 8년 좀 넘었는데 제가 직접 장례예식을 치러드린 분이 15분이고, 그밖에 우리교회 다니시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셔서 소천하신 분이 너댓분이 계셔서 약 20명 정도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큰 교회라면 20명이 적은 숫자인지 모르겠지만 전체성도라야 50여명 정도인 교회에서 20여명은 40%에 해당되는 수치이므로 큰 수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 성도님들 중에도 연로하시거나 육신의 질고 또는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도 많습니다. 이재성도는 지난해 10월에 쓰러져 지금까지 넉 달 이상은 누워계시고, 지난 주에는 김춘옥성도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깨관절을 크게 다쳐 인공뼈를 넣는 대 수술을 받았습니다. 또 고상진집사님도 건강이 좋지 못한 가운데 있고, 김병철집사님을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몸과 마음이 약하여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김춘옥 성도님과 이재 성도님 문병을 다녀왔는데 김춘옥 성도님은 적어도 몇 개월은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고, 이재성도님은 의식은 회복한 것 같은데 본래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분이라서 사람이 가면 그저 힘없이 손을 겨우 잡고 아는 것 같은 반응만 보이고 있습니다. 그 날 중환자실에서 면회를 하고 나오려하는데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저를 계속 응시하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애처로운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새벽 기도 시간에는 얼마나 울면서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어찌하여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셨는데 이 불쌍한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 하십니까? 하나님, 이 불쌍한 사람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데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할 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노라면 정말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 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애3:49,50절에 보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를 기다리며 그저 눈물 흘리며 기도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말씀속에서 우리는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지금은 고난속에서 그저 기도하며 눈물 흘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라도 분명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날이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낙심하며 눈물 흘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절망의 그림자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머잖아 절망의 그림자는 물러가고 마음껏 감사와 기쁨과 은혜의 찬양을 할 수 있는 날이 곧 다가옵니다. 혹시 조금 시간이 걸린다해도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고, 그날이 오면 모든 아픔과 고통과 절망의 탄식소리는 사라지고 기쁨의 찬가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35: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할 때입니다. 그래서 낙심과 절망과 고통이 그들을 짓누르고 도무지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해방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맹인의 눈이 열리고,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리며, 저는 자들이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떤 사나운 짐승이나 근심 걱정 염려 불평 탄식거리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춤추며 찬양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은 광야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가나안 복지인 천국에 가기까지는 고통과 아픔의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탄식이 변하여 기쁨의 함성이 되며, 고통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되어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그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혹 힘든 순간이 있더라도 그저 겸손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제들을 반드시 이기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고통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현실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렸고, 자연도 온전한 상태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갖 거짓과 폭력과 질병과 전쟁이 있습니다. 자연의 질서도 상당히 왜곡되어 온갖 자연재해와 질병과 기근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만든 온전치 못한 문명의 이기들이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온전치 못함으로 사람과 자연과 문명의 이기들을 통하여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받을 때가 너무나 많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 현실을 이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러분, 보십시오. 21절에 보니까 이것을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소망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마음에 담아 둔 것이 뭡니까? 내 고초와 재난입니다. 그래서 울며 탄식하고 있는데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소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소망이 생겼습니까? 22절, 24절에 있습니다. 22절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즉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온전히 진멸 된 것은 아니어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살려주셨고, 그 자비와 긍휼로 이후로도 우리를 살려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고난의 현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보다 천배만배억배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작에 진멸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그런 은혜로 우리가 진멸당하지 않고 결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천배만배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욱더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고난을 아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욥의 고난과 억울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엄청나게 받아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천 마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나 되는 거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열명의 예쁜 자녀를 둔 다복하기 한량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졸지에 폭삭 망했습니다. 세상에 망해도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없고, 원통하고 절통해도 이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도적떼의 습격을 받아 재산은 몽땅 빼앗겼습니다. 열 명의 자녀가 하루 아침에 모두 죽었습니다.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며 죽으라면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온 몸에는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몸을 긁고 있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도 한때는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죽어서 나왔더라면, 내가 낳던 날이 없었더라면, 내가 낳던 날에 빛이 없었더라면, 어찌하여 내게 생명을 주셔서 이 험한 꼴을 보게 하셨는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참담하고 캄캄하여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면서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그렇게 끝내 무너져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의인이 아니지요. 욥23:10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눈도 귀도 마음도 어두워 하나님을 보이지 않고 음성도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을 알고 계시며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정금같이 나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고, 마침내 시련의 기간이 끝나자 두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이라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만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가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현실이 어렵고 낙심이 될 때에라도 그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저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소망 중에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길이 보입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오늘 24~26절을 보겠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비록 고난의 현실이 쑥과 담즙처럼 쓰고 아프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으로 나는 여호와를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선하시기에, 여호와께서는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므로 분명히 긍휼히 여기사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잠자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그 작은 생각과 이성과 판단으로 함부로 떠들어대지도 않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원망과 불평과 좌절 속에 빠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구원과 섭리를 믿고 조용히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꽤 오래전에 미국에서 15살 난 한 소녀가 심한 구타를 당하여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떤 목격자가 나타나 래리 밀러라는 사람을 지목하며 이 사람이 사건 현장에서 그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래리 밀러가 살인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사실은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시간에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뚜렷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아 이 목격자의 증언으로 래리는 3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질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한 목사님의 편지 중 한 귀절에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은 우리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 위로를 받은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성실하게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교도소에서 실시하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러자 몇 년 후에 그의 신실한 믿음과 열정이 인정되어 성경공부반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도소 내에서 실시하는 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죄수들도 열심히 가르쳐 많은 사람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과 중등과정을 가르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주며 사는 동안의 그 자신도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12년이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진범이 체포되어 래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무려 12년 동안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정말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출옥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만 알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타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만약 여기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그 안에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 나갔을 때 결국 그는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요셉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도, 사람이 만든 문명도 심히 왜곡되고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현실 속에는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분통이 터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의 순간에도, 아무리 절망감이 짓누르는 순간에도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분명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현실이 어떻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겸손히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주님의 뜻을 물으며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하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과 은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현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주의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복된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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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주일예배설교] 빌라도의 잘못된 선택


 


 
제목 : 빌라도의 선택

말씀 : 마27:15-26

 


어떤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 나오는 빌라도라는 사람은 좀 억울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그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사람인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면서 저주받은 사람의 대표격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 보면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는 왜 사도신경에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을까요? 저는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으며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며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빌라도는 정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의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하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당시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을 군중들의 요구대로 처리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처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24절에서 빌라도가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말했다는 것은 그는 어느 정도 종교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사람을 죽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하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공정성을 기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처리하려고 애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빌라도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빌라도는 그러한 공정성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므로 중대 사안에 대한 법적인 결정은 로마 총독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사형집행에 관해서는 로마 정부 즉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게 판단하여 최종결정을 해야할 위치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고소하고 있는데 만약 사형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사형언도를 해야 하고, 죄가 없다면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23절에 보면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하고 있고 또 요18:38절에서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요18:38)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을 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중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조금 애를 썼다고해서 억울하다고 하소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혹은 이해득실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옳지 않은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 진리편에 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빌라도의 이 옳지 않은 결정을 보면서, 그래서 대대로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 어떤 상황가운데서라도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옳은 선택, 옳은 결정을 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빌라도는 명예를 위하여 정의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정의대신 타협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은 빌라도를 향하여 아우성을 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반역자를 살려두면 당신은 로마의 충신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서 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빌라도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슨 큰 폭동이라도 일어날 태세였습니다. 그러면 치안상태가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질 것이었습니다. 출세길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빌라도는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저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저렇게 아우성을 치고 있다. 저 성난 군중들의 아우성을 무시했다가는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나사렛 촌사람 하나 때문에 내 출세 길을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 그는 큰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명령을 내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또 하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진리냐, 정의냐, 옳은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자신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느냐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 그릇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 육신의 소리, 유혹의 소리를 뿌리치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곡된 세상의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런 것 다 뿌리쳐 버리고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때로는 어떤 때는 그러면 물질적으로, 명예적으로 손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따라 살아갈때에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빌라도는 진리의 소리를 작은 소리라고 무시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빌라도는 조금만 귀를 기울였다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바로 그의 아내를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그러니까 빌라도의 아내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옳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꿈에 그분의 고통앞에서 자신도 몹시 괴로움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저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끝내 그러한 아내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왜 일까요? 아마도 그 소리는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의 소리는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작은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미미한 소리였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는 너무나 큰소리였습니다. 아우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는 자신의 권력을 삼킬 듯한 거대한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옳은 소리였지만 작은 소리에 불과했던 아내의 소리는 무시해 버렸고, 잘못된 소리였지만 큰 소리였던 군중들의 소리를 따라 악을 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도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자칫하면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하기가 쉽습니다. 작고 소수이지만 진리의 소리, 정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옳지 않은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 많은 소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항상 요란하고 커다란 소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진리는 좁은 길에, 작은 소리에, 잘 들리지 않는 소수의 소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 앞에 몇 가지 상황이 벌어지는데 먼저는 산을 흔들만한 요란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땅을 흔드는 지진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일어났으나 거기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갑자기 고요해졌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작고 세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만한 가냘픈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고 힘들어 하실 때 아주 그럴듯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여기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그리하여 네 배고픔을 해결하고 군중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보여주라. 그러면 너는 최고의 인기스타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천하만국 권세를 가지라. 너는 최대의 권력자와 성공자가 될 것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럴듯한 소리였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리라는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현란하고 요란스런 거짓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커다란 거짓소리를 물리치시고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결국 인류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기의 소리에, 명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작은 소리라고 아내로부터 전달된 진리의 소리를 무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저주받은 이름으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요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조용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큰 소리에 파묻혀 그만 진리의 소리를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떠들어대든 주님앞에 조용히 엎드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빌라도는 사람들의 큰 소리 때문에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 그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심의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가 없었고, 죄가 없으니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그러니 그를 석방하라. 이것이 빌라도의 양심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를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양심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고 군중들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시 당장은 손해가 되는 일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져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목축업을 생계수단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양떼를 방목할 수 있는 풀밭과 물의 근원이 가장 중요한데 유대 땅의 그러한 환경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제는 롯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며 떠나라고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니까 네가 먼저 우선권을 결정하라.”(창13:9)

여러분, 이때 롯의 양심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롯은 아버지 어려서 아버지 하란을 잃고 큰아버지 아브라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길러주신 늙은 아브라함에게 이 좋은 것을 다 드리고 젊은 자기는 양떼를 몰고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사막을 떠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양심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기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그래서 늙은 큰 아버지 아브라함은 좋지 못한 땅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좋은 땅으로 갔던 롯은 풍요로운 땅에서 잘먹고 잘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성공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땅이 불의 심판을 받을 때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다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그 땅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중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딸들이 아버지를 술취하게 만들고 관계를 맺어 모압과 암몬 족속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당장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을 좇아 갔던 롯은 재물로, 가문의 체통도, 윤리도, 믿음도, 하나님의 유업도 모두 잃어버리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절기가 아닙니다. 바로 세미한 주님의 소리를 듣는 절기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무슨 화려한 소리, 대박이 터지는 소리, 출세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세상의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인류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세상 사람들의 커다란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내의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다고 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세상의 권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부귀영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권력과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나중에 사마리아인들의 어떤 폭동과 관련되어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로마로 소환되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의 지위도 빼앗기고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흉악한 죄인으로 대대로 남은 저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순절을 보내면서 정말 세상의 크고 시끄러운 소리,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군중의 소리, 부귀영화의 소리, 물질의 소리, 무사안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혹시 작은 소리일지라도 주님의 소리, 양심의 소리,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라 진리의 길을 달려감으로 진정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으며 생명의 은총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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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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