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설교 (하나님 영광과 믿음) 

 

 

 

 

누가복음17장 11-19절
  
사람이 무엇을 만들때는 목적을 가지고 만드는 거예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든 사람인데 왜 비행기를 만들었을까요 ?
아마도 하늘을 날아서 빨리 이동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 거예요
  
사람들이 왜 슈퍼에 갈까요 ?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사려는 목적을 가지고 가겠지요...
  
아이들이 학교에 왜 갈까요 ?
공부를 해서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훌룡한
사람이 되려고 갑니다
  
이처럼 무엇을 만들거나 무슨 일을 할때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고 또한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여러분을 이땅에 태어나게 하셨는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여러분을 이땅에 보내셨을까요 ?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첫 번째 물음에 보면
우리가 이땅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거라고 정의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땅에 보내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의 영광과 믿음이 무엇인지
공부할 거예요
  
오늘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열명의 나병 환자가 모여 살고 있었어요
예수님 당시에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병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수 없는 병이었어요
요즘이야 의술이 발달해서 나병환자도 고칠수가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불치 병 이었어요
  
문둥병에 걸리면 성안에서 가족과 같이 살수가 없었어요
성바깥으로 쫒겨나서 성안에서 던저 주는 음실을 받아 먹으며
살았어요
  
몸은 상처가 나서 썩어 들어가고
자고 일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발가락 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덜어져 나가는
병이 나병인 거예요
  
그들에게 소망이란 없었어요
죽지못해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그런 그들에게 복된소식 복음이 들려 왔어요
죽은자도 살리시고 앉은뱅이도 일으키시며 중풍병자도 고치시던
예수님이 자기들 옆을 지나간다는 소식이었어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다렸어요
그때 멀리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어요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존재 들이었어요
문등병 걸린 자들은 부정한 존재들 이기 때문에
다만 멀리서서 소리 높여 예수님 이름을 불렀어요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이 여겨 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그들이 할수 있는 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 밖에
달리 할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예수를 부르는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보셨어요
그리고 말씀 하셨어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이 들리자 그대로 순종 하여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어요
  
문둥 병자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기뻐서 펄쩍 뒤고 난리가 났겠지요
내 몸이 깨끗해 졌다고 정상으로 돌아 왔다고
기뻐서 어쩔줄을 모를고 난리 법석을 떨었겠지요
  
그러나 고침을 받은 10명중 9명은 제갈길로 가버리고
그중에 한명만이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께 돌아와 발아래 업드려 감사했는데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개 돼지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 이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어요
열명이 다 고침을 받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 있는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자가 없느냐 ?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을 향하여 말씀 하셨어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육체적인 구원을 얻었을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을 얻을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고침을 받은 9명은 육체적인 구원은 얻었지만
영혼 까지 구원을 받을수는 없었어요
..................................................................................
  
이 이야기는 먼 옛날 예수님 당시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말씀에 보면
열명의 나병환자다 나옵니다
열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수예요 또한 전체를 뜻하는 수예요
  
열명의 나병 환자는 실제로 열명 숫자를 말할수도 있지만
세상의 사람들의 모든 영혼 의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는거예요
  
세상 사람들의 모든 영혼 상태는 아담의 범죄이후
문둥병자 와 같이 죄로 인하여
영혼이 썩어 문드러지고 냄새가 나고 아무 소망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 이셔요
예수님은 어쩌다 우연이 사마리아와 갈리리 사이로
지나 가신 것이 아닙니다
나병환자에게 가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 있는거예요
예수 님은 반드시 그 길을 지나 가야 하는 거예요
왜 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였으니까요
  
열명의 문둥 병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똑같이 병고침을 받았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수 없는 병이 나았다면
그것은 분명이 하나님 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셨구나를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봐야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본사람은 사마리라 사람 한사람 뿐이었다는 거예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아홉 사람은 그냥 제갈길로 간거예요
눈에 보이는 제사장을 만나러 간건지 가족을 만나러 간건지
더 이상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를 안아요
  
그러나 그중의 한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영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 께 자기 몸을 보이러 나아오는 거예요
내가 깨끗해진 것은 내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입니다 감사하며 나아오는 거예요
  
  
그럼 그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있는 일인데
지금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데 구원 받은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께 나아가나요 질문이 생길수가 있어요
  
우리도 사마리아 문둥병자와 같이 이 우주 만물속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말씀의 약속을 믿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 맘속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계심을 끈임없이
생각해 내야 하는 거예요
말씀속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늘 말씀을 읽어야 하고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예수님 께 나아 가는 거예요
또한 끈임 없이 주님 이름 예수님을 불어야 합니다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그 분의 전부요 실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영광 돌리고 감사하며 나아오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말씀 하셔요
다시 말해서 영광 돌림과 믿음을 똑같이 보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믿음의 삶을 살수 있잔아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요 ?
어떻게 생겼나요 ?
.................................................
        
영광은 크게 세가지로 나뉠수 가 있어요
1, 본체적 영광 (본유적 영광)
2. 발산적 영광 (발로적 영광)
3. 효과적 영광 (반응적 영광)
  
첫 번째 : 본체적 영광이란 무엇인가요 ?
본체적 영광이란
다른 피조물들 과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 안에 실제하고 있는
탁월한 신성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다시말하면 하나님 자신모든 것 을 본체적 영광이라고 할수 있어요
  
하나님의 외적인 탁월성과 내적인 완전성을 본체적 영광이라
말할수 있는데
  
외적인 탁월성 에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분 영원 하신분(광대하시고 크신분,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부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작과 끝이 있으나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 없는 분이셔요
  
무소부재 한신분 (아니계신 곳이 없으며 세상 어느곳에도 계신분)
시공간을 초월 하신분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사시는 분이고 막힌 공간일지라도 그곳을 걸림 없이 넘나 드실수 있는 분이셔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모든 피조물들은 스스로 존재할수 없음)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붙들고 계시는 힘 하나님의 능력 등을
외적인 탁월성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말할수 있어요
  
내적인 완전성 에는 
그는 지혜와 지식과, 능력, 거룩과 의, 선에 있어서 무한하신분. 즉 그는 완전자 이신분.
사랑 온유 인내 긍휼 등이 인간과 비교할수 없이 완전함을 말해요
(시편 29편3, 에베소서 1장17절)
그는 완전 충족 하셔서 어떤 점에서도 부족이 없으셔요.
하나님의  완전성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두 번째 발산적 영광
본체적 영광인 신성이 밖으로 흘러나와 피조물 에게 입혀지고 보여지고
경험 되어지고 인식 되어 지는 것을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신성이 만물에게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
(시편8:1-3) 자연을 통해 나타나지요
    
예를 들어
예뿐 꽃을 보면 정말로 예쁘죠 꽃무뉘 점 하나 하나 까지
사람이라면 도저이 만들 수 없음을 느끼게 되고
그 꽃속에 하나님이 만드심을 보게될 때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단순히 예쁘다 말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그속에 계신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보게 되고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하고 저절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됩니다
  
또 성경속에는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으로 가득차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경험하고 보게 되는 거예요
  
세 번째 효과적 영광
자연이나 성경을 통해서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갈망이나 행위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물 (대상16:25-29)
  
다시말해 성경에서 하나님 말씀이 원수까지 사랑하라 했기에
나는 사랑하기 싫은데 하나님 말씀이 사랑하라 했기에
순종해서 사랑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이 되는 거예요
  
발산적 영광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른사람들에게 삶으로 보여지고 입으로 자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거예요
  
우리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데
그 영광은 이 효과 적인 영광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발산적 영광을 받고 그 영광을 나타내며 사는 삶을
살 때 그 영광은 내것이 아니기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말하며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런자를 향하여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은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문둥병을 낫게 할사람은 하나님 밖에 없어
그렇니 내병을 낫게 한 예수님은 하나님 인거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 만이 가진 능력의 영광을 본거예여
그렇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밖에 없었고 감사할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가 세상에 살때에 하나님의 영향력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나타나는 결과물에 대하여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돌려 드릴때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말씀하시며 믿음이 있구나
칭찬 하십니다
  
믿음 생활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내 힘이나 능력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사는 것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 만이 하실수 있는 일입니다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폴리 교회 학생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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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 감사와 찬양 )
 


제목 : 감사와 찬양

말씀 : 시138:1~5

1.감사하는 복된 마음이다.

미국의 헨리 포드가 자동차 왕으로 돈을 많이 벌자 전국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어느 날 시골 벽지의 한 여선생님이 학교에 피아노를 한 대 들여놓고 싶다며 피아노를 살 수 있도록 1,000달러를 도와 줄 수 있겠느냐며 간곡한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방침대로 10센트를 보냈다고 한다. 100센트가 1달러니까 요청한 금액의 1/10,000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여선생님은 비록 작은 돈이었지만 고맙게 여기고 그것으로 땅콩 씨를 사서 학생들과 함께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 해 수확한 땅콩 중 한 봉지를 감사의 편지와 함께 헨리 포드에게 보냈다. 그러자 이 땅콩과 편지를 받은 헨리 포도는 너무나 감동해서 10,000달러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 감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시50:23절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다. 감사는 곧 은혜를 아는 마음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감사하지 않는다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우찌모라 간죠라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저주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도무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다면 그 마음이 메마르고 강퍅한 것이므로 저주라는 뜻인 것이다.

그렇다. 감사가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다. 감사가 가득한 사람은 감사만 있는 게 아니라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마음이 메마르고 완고한 것이며 그래서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 그래서 나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한다. 그러나 감사가 있으면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살아가자. 감사는 상황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인격과 마음의 문제이다. 인격이 바르게 다듬어져 있으면 어떤 상황이라도 감사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요즘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감사할 것이 더 많다. 옛날 우리나라가 못 먹고 못 살 때와 비교해 보라. 또 지금도 세계도처에는 얼마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은가?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고 평화롭고 물질적으로 풍족한가?

오늘 본문 1절 말씀도 보라.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찬양하겠습니다. 그런 고백이다. 그렇다. 감사가 있는 곳에 찬양이 있고, 찬양이 있는 곳에 감사가 있다. 우리에게는 감사와 찬송이 이유가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찬양하자. 전심으로 감사하자. 그래서 영광을 돌리자. 그래서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그러면 무엇을 감사하고 찬양했나?

2.주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 찬양

시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주의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음에,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주님을 알았다는 것, 이렇게 자유롭게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예배드릴 수 있는 자유, 예배드릴 수 있는 믿음, 환경, 상황, 마음 조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시84:10절을 보라.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주의 전에서의 한 날이, 악인의 호화스러운 궁전에서 사는 것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이 임재하시고,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만나 주시는 성전을 가까이하며 예배 드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므로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모여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말씀듣고 은혜받고 평안을 얻으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3.기도에 응답하셔서 힘을 주심을 감사 찬양

시138: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의 삶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사울왕 밑에 있을 때에도 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는 근 10여년을 사울이 죽이려고 쫓아다녔다. 왕이 되고 나서는 심지어 아들이 반역을 꾀하여 도망다니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끝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잘되면 잘돼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어려울 때 주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며 믿음으로 기도드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셔서 이기게 하셨다. 그래서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회상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찬송시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그래서 시103:2절에서는 고백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는 정말 이 사실을 묵상해야 한다. 기도할 때마다,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의 찬송을 드려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오늘까지 필요한 모든 것들로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렇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하며 살아갈 때에 더욱 큰 은혜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가장 긴 밤 등을 집필한 작가인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으로 투병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암투병을 하는 5년동안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감격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시니 감사한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도대체 무엇이 그리 감사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사랑하는 당신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된 것, 가족들의 음성을 듣게 된 것, 그리고 병들어 눕기 전에 탈고한 것, 병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 무엇보다도 주님이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신 것을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우리들은 얼마나 감사의 마음이 있는가? 얼마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양하는가? 얼마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가?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하면서 기도응답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왜 기도 응답이 없을까? 응답하셨는데 모르는 걸까? 응답하지 않으신 걸까? 어떤 경우든 감사와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은혜를 받고 나서 감사 찬양하지만 오히려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할 때에 은혜를 받는다. 감사와 기도와 찬양할 때에 은혜가 넘치고, 더욱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은혜요, 응답이요, 인도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응답하시는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은혜충만한 삶을 살아가자.

4.말씀을 듣게 하심을 감사 찬양함

시138:4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다윗은 또 말씀을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믿게 되었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그저 음담패설이나 좋아한다. 무슨 추리소설, 만화, 순정 소설, 무슨 역사이야기, 고고학, 철학, 혹은 무슨 잡다한 이야기들. 물론 그 중에 유익하고 재미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생명은 없다. 기껏해야 인간의 삶에 좀 유익을 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진리의 말씀이다. 능력의 말씀이다. 그래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평안을 주고 소망을 주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준다. 그래서 다윗은 시119:105절에서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듣게 됨이 얼마나 복인가? 알게 됨이 얼마나 복인가? 믿게 됨이 얼마나 복인가? 그 말씀을 마음껏 읽고, 들으며 생명을 얻고 길을 찾고 위로받고 소망을 얻고 평안을 얻을 수 있음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가?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들으며, 오늘 찬양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정말 감사하자. 구원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자. 나 같은 죄인 만나 주심에 감사찬양 드리자.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찬양하자. 기도를 응답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찬양 드리자. 말씀듣게 하심에 감사찬양 드리자. 정말 우리의 심령을 감사로 채우자. 찬양으로 채우자. 그런 은혜의 마음, 감사의 마음, 찬양의 마음으로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의 삶에도 더욱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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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 낮예배 설교 < 고난을 은혜로 >

 

 

고난을 은혜로   (고후 12:7-10)


찜통더위가 늦게까지 기승을 부리더니, 이제 슬슬 물러설 차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예전에는 한여름 무더위가 즐겁기만 했는데, 이젠 여름 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힘들다, 지친다 할 즈음에 또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신비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허락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쾌청하고 신선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더운 날도 있고, 매서운 추위와 싸우는 날도 있습니다. 사는 날들이 언제나 해뜨는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린 날도 있고, 비바람 몰아치는 폭풍의 날도 있습니다.

우리 생활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행복하고, 기쁨과 웃음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숨짓고, 비통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역경에 처할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뜻하지 않은 병마와 씨름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이 남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점에 고통의 무게가 있고, 고통이 고통 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젊은이들은 나만이 실연당한 상처를 입고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분들은 나만이 이런 큰 고통 가운데 헤멘다고 여깁니다. 건강을 잃은 분들은, 왜 하필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 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통이 고통 되는 것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연세 많으신 할머니 한 분이 눈이 어두워 앞을 보기 어려웠는데, 결국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심방을 가도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면 왜 꼭 내 눈을 멀게 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원망만 하고, 반항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고, 잘해 주는 이웃에게 오히려 악하게 대합니다. 이 분은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의 힘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력만 해도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수만 있어도 그 고통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 고통은 나만 당한 것이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만의 쓰라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저마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점점 더 커지는 원인 입니다.

어쨌든 왜 사람들은 이런 고통과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하느냐? 그 이유를 따진다면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 자체가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얇은 유리그릇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닥치면 금이 가고, 심하면 깨어집니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은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는 실수 때문입니다. 실수는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수 때문에 생기는 고통은 심각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야고보 사도는 고통스럽게 고백합니다.

셋째는 삶 자체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범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고난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라고 말하고, 시편 시인은 “하나님, 내 영혼이 피곤합니다” 호소합니다.

넷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얼 좀 안다고 하지만 별 것 아닙니다. 우리는 죽는 날을 모릅니다. 미래를 모릅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 지 전혀 모릅니다. 이 사건들이 어떻게 풀릴지, 이 일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생애, 이 의미의 깊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신앙생활도 살펴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사노라면 신앙생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불평, 불만, 원망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영혼이 시원하지 못하고 때로는 답답함이 있습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요, 복된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무능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생 때 공부해야 하는 줄 알았지만, 열심히 못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아는데, 못 갔습니다. 잘 될 때 내가 행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만 그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 그 많은 좋은 기회를 알고 있기에 이제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여기에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길, 바른 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내가 걸어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원하여도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도 믿지 못하고, 세상도 믿을 수 없고, 나 자신도 못 믿습니다. 그 누구도, 아무 것도 믿을 것 없으니, 항상 불안 할 뿐이요,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도, 지혜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제자가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소리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했습니다. 의심, 믿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계속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한 복판을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소중한 간증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면 신약 성경의 약 절반을 쓴 인물이요, 기독교 신앙을 체계화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인물도 인간적으로 보면, 평생을 가시밭 속에서 이리저리 가시에 찔리며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에게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운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세 번을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 번이란 그저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특별한 기간을 두고, 금식 했는지, 철야 했는지, 특별 작정을 하며 세 차례나 기도했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생을 위탁한 사람입니다. 온 생을, 전 생명을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바쳐서 헌신하는 충실 된 주의 종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욱 복을 많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넘치도록 축복하셔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과연 바울이 받은 복은 무엇입니까? 부귀는 없다 해도, 건강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정은 없어도 명예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명예조차 없습니다.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보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는 그런 복은 바울에게는 없었습니다.

칭찬 대신에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오해와 친구들의 몰이해와 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외롭게 살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결정적인 고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육체의 질병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 병이 안질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주기적으로 오는 열병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간질병이라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육체의 고통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내 몸이 아프고 쓰라릴 때, 그 누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습니다. 쑤시고 아픈 육체의 가시는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아가서는 이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인해서 마음도 아픕니다.

주의 종이 되어서 몸에 간질병이 있어서 되겠습니까? 남에게 안수해서 병 고치고, 내 손수건만 닿아도 병을 낫게 했는데, 내 병을 고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심령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병을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기도 가운데 놀라운 신앙의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나의 능력이 너의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니라.” 평소에 육체의 가시는 영육 간에 나를 약하게 만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시를 통해 나를 더욱 강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는 바울을 그대로 아멘!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또 지금 당장은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을찌라도 그 부분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충분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즉 가시가 없어져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가시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깨달은 것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극복하는 기본자세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고난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째서 내게만 이런 고난이 닥치는가, 왜 하필 내게 이런 문제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아무런 해결을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내게 닥치는 고난을 먼저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건강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으로 타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성공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공으로 교만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가 축복이 되고, 잠시 병든 것 때문에 더 위대하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예전에 세계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토스카니니라는 유명한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그분은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눈이 나빠서 제대로 악보를 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단의 지휘자가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원 중 누군가가 급히 지휘를 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 때 악보를 몽땅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세계적인 지휘자가 된 것입니다. 시력이 나쁜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그래서 악보를 통째로 외운 것이 세계적인 지휘자로 등장하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분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드릴 귀한 기도입니다.

둘째, 고난 속에서 겸손해 져야 합니다. 이 고난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겸손히 받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약함을 스스로 깨달을 때에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는 법입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에 온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흙이 굳었을 때에는 그 흙을 토기장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습니다. 대장장이가 쇠로 무엇을 만들 때에, 그 쇠가 뜨거워져서 부드러워져야만 대장장이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쇠가 단단해 졌을 때는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때로 고난을 당합니까? 예기치 않던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앞을 가로막습니까? 바로 이 때가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자 하는 때입니다. 약함으로 나를 강하게 하시고, 나의 이 약함을 통해 능력 있는 존재가 되게 하려 하심을 믿으면서 그 고난을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바울처럼 주님 주시는 은혜를 덧입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고난 속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시련을 통해 강한 존재가 되어 승리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큰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주님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곳에서 내가 할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시련은 나의 할 일을 가시 보자기에 싸서 나에게 줍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나의 일을 찾은 사람에게는 가시가 면류관으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실망과 불행을 모르고 산 것은 그에게 고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일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을 만나면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습니다. 이방인을 만나면, 또한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할 일을 찾았기에, 고난도 은혜가 된 것입니다.


올해는 광복 5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큰 굴레를 벗겨 주셔서,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기독교의 신앙은, 비바람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순교와 박해 속에서도 절개를 지키며 꿋꿋하게 피어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피를 밑거름으로 피어난 오늘의 기독교라는 꽃을 우리가 즐기고 누릴 수 있기까지는 이 광복을 기다리고, 사모하던 많은 어르신들의 소망과 기원과 노력이 담겨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광복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일제의 강점 36년이 참 길었는데, 우리 민족의 분단 상황은 반세기를 넘어 이제 회갑이 되어갑니다. 우리 민족은 통일을 맞이하기까지는 참된 광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분단국가, 우리는 이 민족의 고난을 오히려 은혜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은 단지 남과 북의 통일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화해와 일치와 공동 번영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단의 고난을 허락하신 줄 믿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소명을 감당할 때 고난도 은혜가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장학 주일로 지킵니다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 자녀들, 학생들 고난을 은혜로 바꾸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형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겸손해 지며, 그 가운데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을 찾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장학 헌금을 내시는 분들은 우리 평화교회 내 식구 내 자녀들의 어려움을 은혜로 바꾸는 일에 동참함을 감사하시며 헌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이 때로 우리가 만나는 고난 속에서도, 고난을 은혜로 여기며,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 나가고, 고난 가운데서도 나의 사명을 찾아 나가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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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시 축도(benediction, 祝禱)의 바른 이해 

 

 


오늘날 예배 때 행해지는 축도는 예배라는 틀 속에서 빠져서는 안 될 제의적 요소로 되어 있다.

축도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행한다.
기록에 따르면 1958년부터 일반 예배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축복하는 기도로 사용하였다.

축도는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의 바울의 축도와 민수기 6장 23절- 26절 아론의 축도를 사용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민 6: 23-26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고후 13:13

그러나 원문의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교통이 아니고)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아멘.” 여기까지이다.

고린도후서의 헬라 원문에는 ‘있을찌어다’가 없다.  그리고 교통하심이 아니라 교제하심이다.

하지만 한국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기원적 의미인 “있을지어다”를  “있으라”의 명령적 의미로 받아들여서 축도자를 하나님의 대리인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축도할 때에 축도자가 자신이 축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는 대리인인양  양 손을 펴고 양 팔을 들어서
강단 아래 교인들을 향하는 것이다.

본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여 주심으로 지체 간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서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실 것을 기원한 것이다.

‘축도’의 의미를  기독교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 한다.

"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

그리고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하여 사제는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한다."

문자적으로는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고 한다. 의미는 좋게(bene), 말하다(dicere)의
라틴어 합성어로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서신서 말에 있는 축원을 축도로 오해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편지의
끝인사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편지나 말로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후서 13: 13절의 말씀이나 유다서 1:23-24절의 말씀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구체적인 편지문 가운데 그 마감어로 사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은“축원”을 “축복”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막 8:6) “축사하시고”를 “축복”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한글성경이 안고 있는 기본적 문제 중의 하나이다.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역사 속에서도 “원(願)합니다. 사(謝)합니다”의 앞에 축(祝)자를 붙이는 중국인들의 어휘 구성에서
온 오해인 것이다.

“축원”이라는 어휘는 성경에 없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기를 간구합니다!
기도합니다! 기원합니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축원”이라는 어휘는 불교 혹은 토속종교에서 쓰이는 어휘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한국교회는 목사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토속종교에서 가져온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축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 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8)는 말씀은 목사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일반적인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약엔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하나님께서 부여하셨다.
(레 9:22, 민 6:22-27).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오늘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축복기도는 중보의 기도로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기 때문에 행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대제사장(히 3:1, 히 4:14)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딤전 2:5).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히 6: 19-20),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딤전 2:5),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신 것이다(요일 2:1).

오히려 우리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형제이다(히 2:11, 마 23:8).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한다면 누구도 축도를 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회나 성공회나 루터란 교회의 모든 전례 의식서에서 두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임마누엘)" (The Lord be with you!) 하는 기원의 표시이고,
이윽고 회중들이 "목사님(신부님)에게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 (And also be with you)하고 응답할 때는
신부(목사)는 자기의 두 손을 자기 가슴 위에 모아 합장하는 것이 전형적 방법이다.

 


바울보다 좀 앞선 시기에 살았던 유대인의 축도는 에쎈파 사람들의 쿰란문서, 그들의 공동체와
관련된 규칙들을 모은 "Serek ha-Yahad"라는 문서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내용은 축도와 저주가
한 쌍을 이루고 있고, 그에 따라서 두 무리의 사람들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든 길을 온전히 거닐고 있는 하나님의 운명의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쎈파 사람들이 자신을 지칭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축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에센파에 가입하지 아니한 사람들 모두를 가리켜서는 "벨리알의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 부르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 대신에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다.

죄인 된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공로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이로써 "성령에 참여함"이 허락되었다는 바울의 축도 이해와 차이가 나는


것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축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손을 들고 기도하던 관습(시 63:4, 119:4)에 따라 말한 것 뿐이고 다투기보다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권면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경건한 풍습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회당이나 교회가 모이는 장소에서 바울의 서신서 등을 거의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그 성경을 읽어주는 자가 듣는 자들을 상대로 간단한 해설을 곁들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읽어가면서 보통 서신의 맨 나중에 나오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부어 주시는 복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언약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이 어떤 것인지를 기록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하심이 너희 (교회) 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고후 13:13)
하고 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축도는 오로지 교회로 모인 성도들의 예배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상속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표징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우 상 축도를 하도록 배려하는 식의
관행은 크게 잘못 된 것이다. 축도는 말씀을 낭독하거나 강설하는 것의 연장이며 마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인 양 본질적으로 크게 오해되고 있기 때문에 축도를 장황하게 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도록 축원하노라.'든지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지어다.' 등의 용어를 사용함으로 축도하는 목사 자신이 그럴 만한 권한을 위임받은 것으로 오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축도를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봉사’로 이해하였다.
즉 축도를 기도가 아니라 설교의 한 형태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축도는 설교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가 아니고 설교자라고 한 이유는 설교한 사람이 축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 들은 말씀을 듣고 ~~하기를 진심으로 결심하는 자들에게"라는 구절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은 언약적인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데, 축도는 바로 그러한 언약 공동체를 이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결심이나 결단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축도는 결코 축복기도가 아니며, 교인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백성으로서 무리를 이룬 성도들 (교회) 가운데 확인되는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와 수용이다.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에 '축복기도' 란 특정 사람이나 특정한 일을 위해 복을 빌어 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 후에 말씀을 맡은 자가 하는 축도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축도의 시간은, 설교자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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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죽음을 이기신 예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 15:1-26 )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다.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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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주일 설교]예수님은 누구신가?

 

 


제목 : 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 : 마1;18~25

 


우리는 지금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 4주를 정하여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대망한다는 뜻에서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최고의 절기이고 성탄절이 되면 전 세계 모든 교회에서 성탄을 축하하는 행사와 예배를 드립니다.

크리스마스 축제와 성탄예배가 없는 곳은 북한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그분의 성탄을 이처럼 축하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고 하는데 여기서 백성의 반대말은 임금 즉, 왕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는 나라의 통치자를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하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수상의 임기와 권력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왕정국가의 왕은 죽을 때까지 통치할 수 있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모든 백성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9장 6절을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의 이름은..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마땅히 축하하고 감사해야 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본문 21절에는 “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는 천사의 말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인데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정말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한가지마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죄와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인데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 어떤 구원보다 크고 고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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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향기로운 신앙인격

 

 

 

 

 

향기로운 신앙인격 


성경/(삼하1:1-16).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런 향기를 주위에서 맡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향기가 되어서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주 짙은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 중이었고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직접 이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멀리 시글락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도중에 사울 왕과 아들 요나단이 전사 하게 됩니다. 한 아멜렉 소년이 다윗에게 달려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보여주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슬퍼했고 이를 본 백성들도 함께 슬퍼하며 울고 또 금식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조가를 지어 저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1. 관용의 향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왕의 시종이 되어 왕궁에 들어가게 되면서였습니다. 악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울 왕을 위해 주의 신에 감동된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처음에 좋은 관계로 시작이 되었습니다(삼상16:14-23).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전쟁마다 승리하면서 백성들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사울의 질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삼상18:7-8). 사울은 다윗에게 딸 미갈을 줄테니 블레셋 사람 백명의 양피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다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백 개 뿐 아니라 백 개를 더 가져왔습니다. 할 수 없이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심각한 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지만 번번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로인해 다윗은 10여 년간 사울을 피해 기나긴 유랑생활을 고단하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제 고달픈 도피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울었고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했지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뒤쫓고 있는 사울을 적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타인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참고 또 참아야 했습니다. 관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향기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절친한 친구 사이지만 다윗은 새로운 왕으로 부상하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였고,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변함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삼상 20:1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자기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이 일로 사울이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도록 다윗을 지켜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을 진정한 친구로 대했습니다. 삼상 20:41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가 숨어있던 곳까지 와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절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크게 울었습니다. 정말 힘들 때 다윗은 요나단을 의지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조가를 지어 이렇게 애통해 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상하 1:26). 다윗은 왕이 되자 요나단을 생각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불구가 된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자기 자식처럼 자기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했고, 종과 일군들을 붙여주었고, 사울의 재산도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향기로운 우정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진실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요나단과 다윗 은 우정을 맺을 수 없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서 진실한 우정을 나눴습니다.
둘째,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요나단은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입니다. 왕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섬기는 마음으로 권세에 대한 탐욕을 뛰어넘어 우정을 맺었습니다.
셋째,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처음 만날 때부터 수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요나단이 죽은 뒤에도 그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우정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상황이라는 장벽, 이해타산이라는 장벽, 그리고 시간이라는 장벽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이 언제나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겸손의 향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전사 소식과 그의 왕관과 팔찌를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큰 상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우연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블레셋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다쳐 자기에게 죽여 달라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 청을 받고 자기가 사울 왕을 죽였고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소년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다윗이 자기의 공을 인정해서 큰 상을 내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소년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1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삼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혼자 잠자고 있던 사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겉옷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존중한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죽인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중하는 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의 권위는 그들의 인격이나, 그들의 능력이나 또 그들의 도덕적 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을 존중하되 그들을 보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보고 그것 때문에 존중한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허물이 있어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심지어 나와 입장이 달라도 그래서 나를 비난해도 그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기뻐하며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동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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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성령의 능력

 

 

 

 

제목 : 성령의 능력

말씀 : 창3:1-7

1.죄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여러분, 식충식물 아세요? 곤충 잡아먹는 식물 말입니다. 식충식물들은 잎이나 꽃으로 곤충을 잡아먹는데 이들은 먼저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여 곤충을 유인합니다. 곤충이 이 향기를 맡고 꽃으로 접근하여 앉으면 미끄럽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게 있습니다. 그 웅덩이 속에는 곤충을 녹여버리는 강력한 소화액이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은 그것도 모르고 향기에 취해 웅덩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들어가면 꽃잎이 닫혀 버리고 곤충은 그 안에서 녹아버려 식물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마귀가 인간을 사냥할 때 쓰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뭔가 향기로운 냄새를 보냅니다. 아름답고 편하고 즐겁고 향기롭고 기쁘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뭔가 맛있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호기심이 발동되어 자꾸 가까이 가게 됩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가다가 그만 풍덩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다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귀의 수작에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유혹에 속습니다. 성과 향락과 쾌락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갑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과 놀음의 유혹에 속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안일함과 편안함의 달콤함 유혹에 속습니다. 그런 달콤한 유혹의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일날 일하면 그 만큼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행복할거라는 유혹의 덫에 걸려 주일날 교회도 못나오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 안하면 더 부자가 되어 더 행복할 줄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십일조 생활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니나노 먹고 마시자 하면 무슨 기쁨이나 행복이 있는 알고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뭔가 한 방에 될 것 같은 달콤한 유혹에 빠져 노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뭔가 황홀하고 쾌감이 느껴지는 기분의 유혹에 빠져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을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면 행복할 줄 아는 유혹의 덫에 걸려 남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세요. 거기는 혹시 죄된 육신과 생각으로 맛있고 재밌고 넉넉한 삶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과 안식과 자유가 없습니다. 참된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존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기는 고통과 상처와 죽음뿐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상) 보세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먹어도 괜찮다.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좋아진다.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까 먹어라. 그래서 나무의 실과를 보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에 탐스러웠습니다.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덜커덕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하고 지혜롭고 평안과 기쁨과 가치와 의미와 보람이 넘치는 삶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축복의 동산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종신토록 수고해야 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질병과 수고속에 살다가 마침내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혹에 속으면 안됩니다. 사기꾼에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가짜에 속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먹이에도 진짜가 있고, 가까가 있습니다. 진짜는 양식이 있고, 가짜는 미끼입니다. 양식은 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만 미끼는 똑같이 먹는 것이지만 먹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귀가 던져놓은 아주 맛있게 생긴 미끼가 너무 많습니다. 돈의 미끼, 권력의 미끼, 향락의 미끼, 명예의 미끼, 편안함의 미끼, 자기 중심의 미끼, 지식의 미끼 등 수많은 미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언가 우리 앞에 그럴듯한 것이 있으면 이것이 양식인지 미끼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병들게 하고 고통받게 하고 마침내 죽게 하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인지 우리를 죽게 만드는 미끼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게 유혹인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음성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아무리 달콤하고 그럴듯하고 보기 좋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면 단호히 거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달콤한 마귀의 소리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런 인생에게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보람과 의미와 가치와 존귀함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귀하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교묘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미끼를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유혹의 장소를 멀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먼저 마귀가 주는 미끼가 널려 있는 곳을 피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지뢰 전문가라도 지뢰가 널려 있는 지뢰밭으로 들어갔다가는 까딱하면 죽습니다. 세상에는 마귀가 묻어놓은 지뢰가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미끼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다니다가는 어느 순간에 낚시 바늘에 코를 꿸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유혹의 마수에 걸려들지 모릅니다. 어느 순간에 지뢰가 터질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마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장소와 시간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유혹을 당합니까?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으로 봄으로써 욕망이 발동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제 보게 됩니까? 죄의 장소에 가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서 보게 되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죄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자꾸 보고 듣게 되면 그게 점점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죄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으면 죄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죄가 성장하고, 생명 양식을 공급하면 생명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양식을 공급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죄의 양식이 뭡니까? 왜곡되고 악하고 죄된 것들을 가까이 하며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폭력, 절도, 강도, 간음, 향락, 도박, 술, 담배, 마약, 거짓, 미움, 증오, 원망, 불평 이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양식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까이하여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죄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의 욕망들이 점점 자라나 마침내 활활 타오르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와가 어떻게 유혹에 빠졌습니까? 그것은 그녀가 선악과나무 근처에 간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선악과 열매는 먹지 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 하였으면 그 근처에도 가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나무 근처에 갔고, 게다가 마귀와 다정하게 대화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습니까?

6절 상반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러니까 하와는 마귀가 유혹할 때 벌써 그 나무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 나무 아래 있으니까 마귀가 작전을 개시한 것입니다. 정말 저 열매를 먹으면 죽느냐고 했느냐? 그러자 하와는 친절하게 답변해 줍니다. 먹는 것은 물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자 뱀이 무슨 말이냐, 죽지 않는다. 죽기는커녕 눈이 밝아지고 지혜롭게 되어 하나님 같이 된다. 그러니까 마음놓고 먹어라. 그럽니다. 이 말에 솔깃해진 하와가 나무를 보자 정말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너무나 탐스러운 열매여서 그만 덜커덕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나무아래 간 것도 잘못이고 게다가 마귀의 유혹에 친절하게 대답한 것도 잘못입니다. 아니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 위험한 장소에 가기는 왜가며, 게다가 그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마귀의 말장난에 장단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뭡니까?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다윗도 보세요.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삼하11:2절을 보겠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여러분, 이 때는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 중이어서 온 군대가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여 여유가 있었던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편히 쉬며 낮잠을 즐기다가 한가롭게 지붕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만 보지말아야 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만치 하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의 권한으로 그를 데리고 오라 하여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말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윗은 있지 말아야 곳에 있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고, 결국 크나큰 죄를 짓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긴 그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까? 일부터 유혹이라도 하려고 했단 말입니까? 하긴 세상에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다윗은 그곳에 있지 말아야 했습니다. 설령 눈에 보여도 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 비슷한 게 보이면 빨리 집안으로 도망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었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큰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근처에 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눈에 띄어도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공연히 근처에 얼씬 거리다가 못 볼 꼴 보고 영혼을 도둑질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잠23:31에서는 말씀합니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포도주는 아름답습니다. 달콤합니다.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듭니다. 찰랑찰랑대면서 사람을 유혹합니다. 더구나 오색불이 휘황찬란하게 번쩍번쩍 거리며 빛나는 불빛 아래서 보면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며 유혹합니다. 그러면 침이 꼴꺽 넘어가고 그러면 결국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에 가까지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시고 싫어하시는 곳에는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마십시오.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싸우고 죽이고 하는 그런 장소나 시간에는 근처에도 기웃거리지 마세요.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마세요. 향락과 오락과 도박과 음주가무가 있는 그런 곳에는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가면 자칫하면 그 유혹의 웅덩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맨날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려도 유혹에 빠지는 판에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집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상황이 문제입니다. 죄의 장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의 장소에서 죄와 무지속에 살아가는 인생들을 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무지속에서 죄와 무지와 교제하고 그런 것들을 들으며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인생인양, 그것이 행복인양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식어집니까? 왜 강단에서 선포하는 말씀들이 오래가지 못합니까? 왜 천국과 지옥이 자꾸 의심이 갑니까? 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까? 세상에 발을 딛고 세상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 나라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소리를 몇 배 아니 몇 십배 더 많이 들으며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을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이 말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더러운 세상, 악한 세상 그러면서 산속으로 들어가 살라는 것입니다. 빨리 천국으로 가라는 뜻도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들에 물들고 끌려다니지 않도록 주님을 가까이 하고, 거룩한 장소를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은 절대로 세상의 죄되고 악하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유혹의 장소를 가까이 하지도 말고, 그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터전에서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수고하며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진리의 길, 생명의 길,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는 곳, 주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 성실하게 진실하고 열심히 그런 곳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유혹의 장소를 피한다해도 그래도 유혹은 다가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몸담고 살고 있는 한 죄된 세상과의 접촉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유혹이 있는 장소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안하고 승리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는 해야 합니다. 적이 공격해 오는데 변변한 무기하나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는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서만이 세상의 모든 유혹을 분별할 수 있고 물리칠 수 있습니다.

로마 공화정시대의 안토니우스는 황금의 혀를 가진 웅변가였고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최고의 장수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절세미인이었다고 하는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먼저 안토니우스와 함께 가장 유능한 장수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저를 유혹하여 결혼하여 케사리온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저가 암살 당하게 되고 그러자 어떻게든지 케사리온을 유리한 위치에 세우기 위하여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여 결혼을 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도 더 이상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이어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당대 최고의 장수도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능력과 용기와 의지와 지성 이런 것들 결코 유혹 앞에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오직 한가지 우리가 믿을만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여 말씀의 칼날로 물리쳐 버리는 길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면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더럽고 추하고 죄된 장소와 시간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곳을 혐오하여 멀리하게 됩니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엡6:13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경의 검 이런 것들로 무장하고 있어야 마귀사탄의 흉계와 유혹과 도전을 깨트려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능력으로 유혹의 장소를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장소에 서성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생명과 기쁨과 은혜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섬김이 있는 곳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죄되고 추한 곳에는 가지도 말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모든 유혹들을 바르게 분별하여 물리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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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예배 설교 - 복된 만남과 삶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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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 설교  은혜받은 자의 고백


제목 : 은혜받은 자의 고백

말씀 : 요9:26~34

1970년대 아프리카의 우간다는 이디아민 이라는 독재자 밑에서 온갖 압제를 당하며 숨을 죽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간다 최대의 교회 목회자인 케파 셈판기 목사님은 이런 독재자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고 설교함으로써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항상 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부활절에 목사님이 주일 설교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괴한 5명이 뒤따라 들어오며 목사님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들은 비밀경찰로 반정부 인사들을 암살하는 무서운 살인자들이었습니다. 이때 셈판기 목사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나는 죽음은 두렵지 않소. 그러나 죽기 전에 당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으니 2분만 시간을 주시오.” 그러자 암살자들은 그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며 “주님, 저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이제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오니 주여 받아 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괴한들이 권총을 품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부에서 목사님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각별히 몸조심을 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담대함과 능력과 지혜를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절망과 낙심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줍니다. 성령께서 힘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심으로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얼마든지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눈을 뜨게 된 사건 이후에 있었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고 하며 이 사실에 대하여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맹이었습가 보게 된 사람을 불러 묻습니다. 네가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그러자 그는 예수님이 진흙을 바르고 씻으라해서 그대로 했더니 보게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 중 몇몇은 그런 일을 하였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니 죄인이라고 하며 그것이 확실한지 알기 위하여 그 부모를 불러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었던 그 아들 맞느냐? 그의 부모는 이 사람이 소경이었던 내 아들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모른다고 하며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재차 소경되었던 사람을 불러 ‘그는 죄인이다. 그러니 너는 그 사람을 두둔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소경되었던 사람은 ‘난 그런 건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소경되었던 내가 지금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다시 ‘그가 무엇을 하였으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은 ‘왜 다시 물어봅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를 욕하며 너는 그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경되었던 사람이 다시 말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당신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를 알지 못합니까? 하나님은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하는 사람을 들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셨는데 왜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그를 모르십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모릅니까?’

이에 바리새인들은 화를 내며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면서 소경되었던 사람을 내 쫓아버리게 됩니다. 즉 출교를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우리는 여기서 세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소경되었던 사람의 부모와 소경이었습니다가 보게 된 사람입니다. 이 세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는 어떤 쪽에 속하여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으므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물론 일부의 바리새인들은 죄인으로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인정하려들지 않고 혹 인정했다해도 안식일을 범했으므로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예수님을 이단자이거나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나름대로 열심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일조, 기도생활에 철저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형식주의 혹은 외식주의에 빠졌습니다. 우월감과 자만감에 빠졌습니다.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즉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규정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자로 여겨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에게 바리새인들처럼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배치될 만큼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율법주의, 외식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없겠지만 그래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자기 유리하게 해석하려 들지는 않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적용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진정 말씀을 따라 사는 삶보다는 종교적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작은 부분이라도 그런 모습이 있다면 빨리 벗어 던져야 할 것입니다. 정말 순수하게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진정 풍성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

이 사람들은 현실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여 즉 출교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모른다고 잡아 떼었습니다. 즉 이들은 현실적 필요에 의해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자초지종을 물을 때에 그가 우리 아들이고 소경이었는데 눈을 뜨게 된 것은 맞다. 그러나 어떻게 떴는지는 모른다고 잡아뗀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그러니까 알고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출교가 무서워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모른다고 잡아뗀 것입니다.

물론 출교는 거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유대공동체와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과 교제도 할 수 없고, 모든 상거래도 금지되며 함께 일 할 수도 없고, 예배도 함께 드릴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고향을 떠나 어디 이방 땅으로 가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두려운 일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그것이 예수님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 물질적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정말 예수님 편을 택할 각오가 되어 있을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일에 일하러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일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정말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앞세우고 주님의 말씀따라 살아갈때에 더욱 큰 은혜의 충만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3.맹인이었다가 고침 받은 사람

이 사람은 앞서 보았던 바리새인과 그의 부모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출교 당함을 각오하고 시종일관 예수님을 시인했던 것입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 고백합니다. 요9:17을 봅시다.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요9:33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게다가 이 사람은 예수님이 선지자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분명히 밝힙니다. 먼저 하나님은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며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듣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들으시고 그를 통하여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 분이 어떻게 죄인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면 하나님이 물리치시고 듣지 않으실텐데 그러면 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이 분이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났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일은 창세 이후로 한번도 없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분명 날 때부터 소경이었고, 이분이 시키는 대로 하니 눈이 떠졌는데 이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기본적인 법인 안식일을 마음대로 무시하는 죄인이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더구나 이 고백은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시인하고 따르는 자들은 출교가 결정된 상황에서 있었던 고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도 어떤 불이익도 그가 예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주님의 능력으로 분명히 고침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소경되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통하여 너무나 귀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 순종하고 고침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났다. 순종했다. 치유받았다. 증거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가 누릴 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이 사람은 그야말로 순교를 각오한 증거입니다. 물론 당연한 증거이었지만 사람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무언가 현실적으로 손해가 올 것 같을 때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기에 결코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바르게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과 혼과 육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경우라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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