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여름 성경학교 기도문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본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연약한 저희들을 더 이상 죄 아래 살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만한 은총 아래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더욱이 완악한 저희 심령 속에 늘 변화를 주시어 주님의 사랑을 시시 각각으로 깨닫도록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삶의 긴박함 때문에 얻었던 온갖 추하고 어긋난 생각들을 이 시간 깨끗이 회개하게 하시고, 넉넉한 여유와 은총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행복한 대화를 나누는 예배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직 저희 마음 속에 주님만 계시는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이 시간 한 주간 동안의 삶을 더듬어 보면서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다 보니 죄의 종이 되어 주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몸이 되었습니다. 늘 저희에게 구원의 길을 밝게 비추셨지만 저희는 그릇되어 파멸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이 어리석음을 고백하옵고 주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죄악을 기억하지 아니하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다시금 소망을 얻은 저희들이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비를 베푸사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일상 생활 속에서 저희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승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도 이 전에 나와서 주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저희들 가운데 삶에 지치고 시달린 심령도 있을 줄 압니다. 원치 않는 질병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심령도 있을 줄 압니다. 힘든 일이나 직장 생활로 힘겨워하는 심령도 있을 줄 압니다. 여러 모양으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저들의 심령을 주님께서 친히 위로하여 주시옵고, 그 어떤 상황하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든든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게 하시옵고, 능력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시옵소서.

능력의 주님!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 교회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예배하는 주의 백성들이 넘쳐나게 하시고, 주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죄 많은 세상을 향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고, 그 어떤 영혼이라도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지고 변화받는 축복의 동산이 되게 하시옵소서.

이제 교회가 여름철 행사로 교사 강습회 이후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준비하는 교사들에게 피곤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고,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어린 심령들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다짐과 고백이 넘쳐나는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새롭게 하시는 주님!

계절적으로 무더운 여름 날씨이기에 육신이 지치고 피곤하여 신앙 생활에 게을러지기 쉬운 가운데 있사오니, 게을러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있는 신앙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들고 단 위에 서신 목사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붙드시고,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저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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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부모님의 참된 사랑

 

 

 


제목 : 참된 부모님 사랑
말씀 : 출20:12


충북 제천 출신으로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로 판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곱사등이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데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도 술과 도박에서 벗어나려고 손가락까지 절단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시 노름을 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정 형편이 어떠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오더니 또다시 어머니에게 노름 밑천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어디서 노름 밑천을 가져오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버지가 홧김에 어린 아들을 마당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 바람에 그만 척추를 크게 다쳐 곱사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면 철없는 아이들이 놀려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에 열중하며 그나마 자신을 반겨주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결국 명문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하였고, 판사가 된 이후에는 다른 여러 형제들도 있었지만 자기 집에 모시며 극진히 섬겨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정말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부모가 무지해서 제대로 못해 주었어도, 심지어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어도 그래도 부모니까, 그래도 날 낳아주신 분이니까 섬기고 공경하고 모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하셨는데 하물며 부모님이야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길러 주신 부모님, 설령 만에 하나 그렇지 못했을지라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잘 공경하고 섬김으로 부모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이유

1)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셨느냐와 관계없이 생명을 주신 것 그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고 공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고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이 아름다운 땅위에 태어나 먹고 입고 자는 기본적인 행위를 비롯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수고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고 기도하며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이 모든 생명의 활동이 얼마나 귀하고 신비롭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생명이 누구에게로부터 왔습니까? 물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 가정을 통하여 이 위대한 생명체가 태어나게 하시고 대대로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대대로 전수시켜주는 위대한 생명의 창조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낳아 주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을지라도 이 너무나 소중하고 위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인생길 살다가 어렵고 힘들고 답답하고 낙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공경하며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때에 부모님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여러분에게도 더욱 은혜가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며 공경해야 하는데 더더구나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25사변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아기를 등에 업고 피난민 대열의 제일 후미에 쳐져 피난을 가다가 그만 가슴에 작은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지만 엄마의 가슴은 피로 범벅이 되었고, 사람들은 아기 엄마가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저마다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가고 결국 다 죽어가는 엄마와 아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엄마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젖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엄마는 출혈이 너무 심하여 의식이 몽롱해져 가면서도 피범벅이 된 젖꼭지를 아이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엄마의 가슴에서 나오는 피를 빨아먹게 되었고, 결국 몇 시간 후에 엄마는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군인들이 지나가다가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아기를 구해 주었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피를 먹고 이틀 동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좀 덜할지 모르지만 저와 같은 세대만해도 가히 부모의 피를 먹고 살았다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정말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하며 자녀만큼은 조금이라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던져서 수고하고 헌신했던 분들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셨듯이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 주신 그런 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삼하18:33절 하반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것은 다윗이 셋째아들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며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압살롬이 누구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했던 패역무도한 자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궁에서 쫓겨나 도망가게 되었는데 이를 뒤쫓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던 이 패역무도한 자식의 죽음 앞에서 차라리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더라면 하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을 던져서,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며, 자식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은 굶어도 자식이 굶은 것은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멸시천대를 당해도 자식이 멸시천대를 당하는 꼴은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어찌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자녀 여러분, 이와같이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나아가 그야말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우리를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공경하고 섬김으로 하나님과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을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1)힘에 겹도록 섬겨야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출20:12절을 보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여기서 공경하라는 말 db'K;(카바드)는 ‘무겁다, 힘겹다, 짐이 되다, 존경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공경은 힘에 겹도록 즉 최선을 다해서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섬기며 영화롭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힘에 겹도록 해야 그게 진정한 공경이고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형편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안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쓰고 남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기 전에 먼저 따로 떼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볼일 다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볼 일을 보기 전에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볼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공경이고 그게 섬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시간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돈이 남으면 하는 게 그게 무슨 섬김입니까? 물론 시간이 남아도, 돈이 남아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러나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섬김이나 헌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님이 정말로 나에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요, 나아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 분이요, 그래서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이나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행동의 일차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다하고 나머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하고 그리고 그 나머지로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섬김이요 공경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 원리를 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생명의 은인이요, 내 존재의 근거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래서 하나님과 부모님이 내 모든 행동을 제어하는 근거가 되어 먼저 공경하고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부모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럴 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 공경의 또 다른 자세는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이 곧 공경한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고 인정한다면 상대방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상대방이 부모님이건 하나님이건 그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혹은 그 지혜와 그 능력을 인정한다면 그 분을 높여 드리고 영화롭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어찌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엡6:1절을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다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문에서 옳다는 말은 ‘준수하다, 의롭다, 법을 지킨다, 의무를 이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고, 도리이고 그래서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시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양육해 주신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보면 한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일까지 순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우주만물의 최정점에 계신 최상의 어른이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뜻에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기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교회를 가야하는데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으셔서 못 가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공손하고 정중하게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를 인내심을 가지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설령 부모님이 노를 발하셔도, 심지어 매를 든다고 해도 끝까지 참고 공손하게 말씀을 드리고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모든 영역에서는 백배 천배 더 순종하고 더 공경하고 더 섬겨야 합니다. 자신이 정말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부모님도 그 자녀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또 꼭 신앙문제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님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때로는 적절치 못한 말씀이나 행동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일단은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공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항변하고 무시하는 자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일단은 공손하고 겸손한 자세로 경청한 다음에 말씀이 다 끝나고 나면 공손하게 자신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이 좁혀지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정말 공경하고 섬기면서 기다리다가 기회를 보아가며 공손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부모님도 자녀의 뜻을 받아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부모님의 권위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정상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물론 이려니와 혹시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지 않거나 일상생활에서 불합리한 말씀을 하신다 할지라도 결코 대항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언제나 존중히 여기며 공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함으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축복도 함께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모님들은 뭔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는 자녀를 위하여 온갖 헌신과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점점 작아집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워집니다. 바로 이럴 때 모든 자녀들은 이제 거꾸로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고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으니 부모님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힘들 때는 이제 거꾸로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어떤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2년에는 노후에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67% 정도였는데 10년이 지난 2012년 그러니까 작년에는 35%정도만이 자녀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아무리 대세라고 할지라도 결코 올바른 가치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며,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배은망덕입니다.

여러분, 오늘 정말 얼마나 왜곡된 가치가 판을 치고 있는 우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분별해야 합니다. 요즘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그게 정말로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대세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대법관 아홉명 중 여섯명이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도 적극적으로 간통제 폐지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좀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유를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간통죄는 사람들의 범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거예요. 법감정이란 쉽게 말해 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즉 옛날 사람들은 간통을 큰 죄로 생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별로 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없애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놈의 법입니까? 잘못된 가치관이나 왜곡된 생각들을 바르게 잡아주는 게 법이지, 선이든 악이든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법입니까? 그럼 다수의 사람들이 도둑질을 죄로 느끼지 않으면 도적질도 처벌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까? 여러분, 다수가 선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대세가 진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진리는 오직 1%만 따라가도, 아니 아무도 안 따라가도 진리이고, 99%아니라 100%가 따라가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우리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의 잣대로 삼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안강에 나갔더니 길가에 현수막이 하나 붙어 있는데 거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 떡하니 ‘안강성당’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안강성당에서 석가모니가 온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세상의 대세입니다. 불교에서 ‘축 성탄’하면서 성당에 축하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성당에서 ‘축 불탄’하면서 화답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멋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다가오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성경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신 우상에 불과한 것이요, 사람을 속이는 사탄의 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이 자녀들이 부모님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엡6:2절을 보십시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공경이라는 말은 ‘평가하다, 존경하다, 경의를 표하다, 상을 주다, 가치를 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생명을 주시고 온갖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양육해 주신 부모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헌신을 인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경의를 표하며 몸과 마음과 물질까지 드려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자녀들의 본분이요, 책임이요,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부모님을 평상시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힘없고 약할 때에 더욱 봉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생명을 주신 부모님,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양육해주신 부모님께 정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나머지 찌꺼기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모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상시에도 그래야 되지만 특히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약하고 힘들 때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도 풍성하게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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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성령의 열매

 

 

 

제목 : 성령의 열매

말씀 : 갈5:16-24

1.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는 뭡니까? 성령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성령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지혜자나 능력자라해도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무한히 크고 넓고 깊은 하나님의 능력, 지혜, 권세, 사랑, 거룩하심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의 너무나 미약하고 그 미천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 지식과 경험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심령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아 알 수가 없고, 믿고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고 참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2: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영이신 성령의 조명하에서만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을 받아 생명을 얻고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해서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여러분의 심령속에 성령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진정한 구원의 은총과 큰 기쁨과 감격과 은혜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은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이 온전히 우리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당연히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지만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우리 인생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양심에서는 안된다 안된다하면서도 때로는 행동이 그 안되는 일을 좇아갈 때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행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고 싶습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살라야지 하면서 다짐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자꾸만 세상의 것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해도 아직도 우리에게는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있는 부분이 남아 있어서 마음은 어두워졌고, 지혜는 제한되어 있고, 육신도 의지력도 연약해 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세상적인 지식과 이성과 가치관들이 굳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쪽으로 가려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됩니까? 물론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비록 완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하늘 나라에 가서야 완성되겠지만 어쨌든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고민하며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조금씩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께서는 정말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가실때에 구원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즉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옛것을 자꾸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앞부분 17~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우리 육신의 욕구는 자꾸만 진리와 생명과 은혜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보다 자꾸만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 등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뜻대로 살기보다는 세상 뜻대로 곧 마귀의 뜻대로 살기가 쉽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부분에서는 육체에 속한 것과 성령에 속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왜 육체에 속한 것들을 거부하고 성령에 속한 것을 따라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육체에 속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19~21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이 중에 한가지라도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저 육신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학식과 명예와 권세가 있는 것 같고 아주 대단한 것 같아도 그래도 별거 아닙니다. 다 이런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직도 우리들 속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못된 본성들이 남아 있어서 자꾸만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아오려고 하니까 우리는 어쩔 수없이 자꾸만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러한 죄된 본성들이 고개를 들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것들은 자꾸만 쇠약해져가고, 성령께서 주시는 품성들은 날로 강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열매는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열매를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사랑과 의와 희락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열매가 당연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기쁨을 누리고 은혜를 누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러한 것들이 우리 모든 인생들의 삶속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어찌 세상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어찌 우리들의 삶이 빛과 빛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들이 우리를 삼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무릎 꿇으며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며,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는 것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실 때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여러분 자신도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리시고 여러분으로 인하여 이 땅위에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는 세상이 펼쳐지게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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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

 

 


제목 :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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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생명의 풍성한 은총 ( April Sunday Sermon )

 

 

 

말씀 : 마13:3-9

제목 :  생명의 풍성한 은총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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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영광의 면류관


 

 

 
제목 : 영광의 면류관을 향하여

말씀 : 고전9:24~27

 

1.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미국의 농구 코치 중 꽤 유명한 커튼 피시먼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치 노릇을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못해서 유명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람이 맡은 팀마다 계속해서 하위권에서 맴돌고 꼴찌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코치가 한번은 시합에 임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단단히 일렀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져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항상 이겨왔다. 오늘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이겨서 챔피언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게임에 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리고 코치와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로 게임에 임했습니다. 그 게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겼다고요? 미안하지만 또 졌습니다. 그래서 코치가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이겨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게임을 합니까?” 이때 한 선수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코치님, 그냥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실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정신력이나 마음의 자세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체력과 실력이 딸리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공부도 안하고 난 시험을 잘 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는다고 시험을 잘 칠 수 있겠습니까? 농구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농구선수들에게 덤벼든다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훈련과 노력과 투자를 통해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덮어놓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없는 등의 특별한 상황에서는 기도만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건 말 그대로 특별한 경우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적 이성적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열심히 노력할 때에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1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끊어버릴 것은 너희가 끊어 버려라. 너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가라. 그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칫하면 이래서 저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못합니다. 하면서 변명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끊을 것은 내가 끊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동원하여 힘써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달려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2.귀하고 복된 일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훈련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은 귀한 일에 쓰임 받겠다,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한 삶을 위하여 힘쓰게 되고, 나아가 그런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다가와도 잘 참고 견디며 마침내 승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할 만한 귀한 인생이 되겠다는 열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하고 귀한 일에 열심도 낼 수 없고,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며 무사안일 속에 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왜곡된 가치 속에 휩쓸려 다니며 잘못된 길로 가기 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야 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별볼일없는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최대한 동원하고 활용하여 가치있고 의미있고 고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고 그래서 자신도 남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풍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 안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때 부와 명예를 얻어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했을 때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으나 주님께 부름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였을 때 사도라고 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는 사도 바울을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말씀은 버림받아 천국에 못가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설망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천국에 못갈까봐 두려워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충성스럽지 못한 종이 되어 주께서 넌 더 이상 사도로서의 자격이 없다. 넌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으니 그 직분 내놔라. 그러실까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일을 만나는 것보다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넌 더 이상 쓸모없어. 가치가 없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반대로 당신은 정말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교회에서 너무너무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바로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 정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어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사람들에 유익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에 쓰임받고 싶어요.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요. 이런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앞에 귀히 쓰임받는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그저 자신의 안일함과 물질적 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곳 그곳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겠다는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싶다는 그런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때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 받고 귀히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가장 귀하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망을 가져야 하는데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열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5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목적을 두고 썩어없어질 것을 위하여 정열을 바치지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썩지 아니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을 주는 영원한 면류관을 바라보며 힘써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는 또 말씀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물론 상을 받는 사람이 여럿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같이 달리기를 해도 다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최선을 다한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주님께 목표를 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최선을 다해야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요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나 소망이나 목표가 아닙니다. 무조건 열심히 해서 단순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 소망과 목표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소망이고 목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서도 진정한 평안과 은혜와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과 목표를 가지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졌어도 또 그것을 향해서 아무리 힘써 달려갔어도, 그래서 혹시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어도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빈 쭉정이 인생이 되어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거나 혹은 아예 버림받는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최종적인 목적을 두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소망, 영원히 쇠하지 않고 썩지 않을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실 때에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나아가 저 영광의 나라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영원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다음에는 그 열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일에 열망을 가졌어도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말씀 그대로 나는 지금까지 방향도 없이 달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주님이 주신 사명을 향해 힘써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달리기 선수가 출발 총성을 듣고 힘껏 달려가는데 도착점을 향하여 달리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권투 선수가 주먹을 열심히 휘두르는데 계속 허공을 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어라고 뛰고, 죽어라고 주먹을 휘둘러봐야 말짱 도로아미타불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인생의 경주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이나 목적지도 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달리기는 달리는데 썩어 없어질 것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헛고생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은 다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혹시 사람에 인정받는다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자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진정하고 영원한 소망도 열망도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세상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어리석은 삶이 되디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 귀하고 온전한 소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말고 혹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면서 주저 앉아있지 말고, 주께 엎드려 기도하며 주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선한 역사에 힘써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아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즌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 그것은 절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망을 가지고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설령 열심히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루 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파리 한마리가 달콤한 냄새를 맡고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꿀단지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핥아먹던 파리는 달콤한 맛에 정신이 팔려 점점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실컷 배를 채운 다음에 만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려고 날개를 파닥였지만 날개가 꿀 속에 잠겨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나방 한 마리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꿀단지 속에 들어가면 그럴 줄 몰랐더냐? 욕심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나방은 보란 듯이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잠시 후에 이 나방은 파리가 발버둥치고 있는 꿀단지 속으로 추락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나방이 환히 빛나는 등불을 향해 날아가 주위를 맴돌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가는 바람에 한쪽 날개가 불에 타서 추락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파닥거리는 나방을 보고 파리가 말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나방아, 불에 가까이가면 그렇게 될 줄 몰랐더냐? 네 불장난이 너를 죽게 만들었구나!” 그리고 결국 파리도 나방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과 유혹이 파리와 나방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힘써야 하지만 자신을 잘 다스려 유혹과 욕심을 물리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좋은 운동선수나 음악가나 정치인도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직업인이나 직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잠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일하고 언제 훈련을 하겠습니까? 또 실컷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다음에 진탕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면 공부하고 일하고 훈련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것 다 놀고,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가고 싶은 곳 다가면서 언제 예배드리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언제 헌금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설령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밖에 가서 실컷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논다면 기껏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25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자신을 잘 다스려 모든 유혹과 욕심과 욕망을 이겨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나쁜 것을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좋은 일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여 영혼과 육신과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음식도 좋은 것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몸을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을 빼앗기게 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한답시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입니다. 맨날 철야기도 한다고 직장에 가서 졸고 앉아 있다면 이것도 책망 받을 일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올바른 목표와 열망을 가지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끊을 것은 끊고 삼갈 것은 삼가고 피할 것은 피하고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에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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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예배설교] 생명의 말씀

 

 

 

제 목 : 생명의 말씀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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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예배는 신앙의 기본

 

 

 

제목 : 예배는 신앙의 기본

말씀 : 대하29:25~30

1.예배란?

어떤 사람은 뭐 맨날 예배나 드리면 장땡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는 신앙의 기본이다. 예배생활하지 않으면 설령 아무리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소용없다. 왜? 예배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배하며 찬양하여 영광을 돌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안 그런가? 하나님을 안다면 어떻게 엎드리지 않을 수 있나? 어찌 경배 드리지 않을 수 있나?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래서 요4:2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러므로 예배는 철저히 드려야 한다. 그것도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리는 목적으로 드려야 한다. 쉬기 위해서, 좋은 말씀 듣기 위하여, 그저 기도하고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님 하나님,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의 올바른 태도이다. 그리고 그런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목표로 예배를 드리자. 사람을 동원하고 시간을 동원하고 물질을 동원하고 성가대를 동원하고 찬양대를 동원하여 예배를 드리자.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도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나 넘치는 삶이 되자.

2.히스기야 왕의 예배의 회복

1)예배를 폐지시킨 악한 왕 아하스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가 왕 위에 오른 뒤 성전을 청결케하고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다. 히스기야 전 왕 아하스는 아주 악한 왕이었다. 그것은 대하28:24,25절에 보면 잘 나타나 이다.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세상에 이런 무지막지한 인간이 어디 있는가? 결국 나라는 에돔과 앗수르와 블레셋에 의하여 고통을 당한다. 그 자신도 불명예스럽게 죽는다.

그러므로 절대로 예배를 폐하거나 방해하거나 소홀히 여기지 말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믿음으로 드리라. 설령 예배 다드려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로 그건 하나님을 만난 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러면 결국 망한다. 그러므로 예배생활에 성공함으로 정말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자.

2)히스기야 왕의 예배의 회복

①성전을 회복시키는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대하29:3~5절을 보라.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아버지 아하스 왕이 폐한 성전을 다시 열고 성결케 하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선한 왕 중의 하나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소중히 여기라. 성전을 내외적으로 사랑하고 청결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라. 가까이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②속죄제와 번제를 드림

이와 같이 성전을 정결케 한 다음에 히스기야 왕은 먼저 제사를 드린다. 앞부분 24절에서는 속죄제를 드리고, 오늘 27절에서는 번제를 드린다. 속죄제란 말 그대로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제사이다. 속죄제물이 내 죄 대신에 죽음으로 내가 내 죄로 말미암아 죽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예배 시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회개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동물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면 된다.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로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약하고 부족하여 또 범죄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범한 부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고 예배드릴 때 진정 주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배가 되는 것이다.

번제는 헌신과 희생과 봉사를 의미한다. 나를 완전히 드리겠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번제는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하면서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이다. 이런 진정한 드림이 없는 예배는 온전치 못한 예배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면, 주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내 죄가 속해졌음을 고백한다면 어찌 드림이 없겠는가? 어찌 엎드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안다면, 죽은 영혼 살리는 것이 얼마나 크고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인가를 안다면, 내가 구원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과 수고와 섬김과 드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찌 드리지 않겠는가? 어찌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이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전을 청결케하고 예배를 회복하라. 회개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예배드리자. 이런 진정한 예배생활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자.

③찬송을 드림

오늘 말씀에 보면 찬송은 예배의 핵심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27절을 보자. “히스기야가 명령하여 번제를 제단에 드릴 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번제를 시작하는 동시에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고 악기를 울렸다.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도 성가대의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한다. 그리고 예배의 기원을 하고 온 회중이 영광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찬양이 예배의 시작인 것이다. 찬양으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 28절에 보면 이 찬양은 번제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그러니까 한쪽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리는 동안에 회중은 계속해서 경배드리고 한쪽에서는 찬양소리와 나팔 소리도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제사를 마치자 거기 있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29절 말씀이다.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30절 말씀이다.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 그러니까 찬양으로 제사를 시작 하고 번제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나팔을 불고 찬양을 드리고 번제가 마치자 다 같이 엎드려 경배드리고 다시 찬양함으로써 번제를 마치게 된다.

곧 찬양이 예배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가장 핵심은 번제와 속죄제이다. 속죄제를 통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입고 번제를 통하여 헌신과 희생과 섬김과 복종을 다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것이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감사하고 헌신과 희생을 다짐한다. 메마른 영혼에 생명의 양식으로 채워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찬양으로 시작하고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찬양이 계속되고 끝날 때 찬양으로 마치는 것이다. 즉 제사와 찬양이 두축이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찬양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과 자비하심을 알고 그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찬양이 곧 우리의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엎드리지 않을 수 없다. 경배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헌신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 앞에 엎드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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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섬기는자의 자

 

 


제목 : 섬기는 자의 자세

말씀 : 엡4;11-16

 


1.제직의 의미

제직이란 교회의 직원을 가리키는 말로써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전도사, 장로, 안수집사, 서리집사를 제직이라고 부른다. 그중에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항존직이라고 부르며, 전도사나 서리집사는 임시직이라고 한다. 제직 중에 목사와 전도사를 교역자라고 하며, 제직이라 하면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제직이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을 말한다. 즉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하여 각각의 달란트와 사명을 따라 직분을 맡겨준 사람들을 말한다.

에베소서 4:11-12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붕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기록된 말씀은 교회 직분의 주된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말은 일이나 사람을 자신의 위치에 올바르게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로 교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존재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인도하며, 보살펴서 완전한 성도를 만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하여 교회와 가정과 사회를 위하여 보상없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 제직이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제직의 삶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자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직위가 아니다. 무슨 서열이나 계급이나 신분을 나타내지 않는다. 도리어 교회의 직분은 종의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를 말한다. 그래서 집사(deacon)라는 말은 일꾼(minister) 또는 종(servant)을 뜻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Diaconsos)에서 왔다. 즉 종과 같은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받은 직책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사 땄다. 장로 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집사, 권사, 장로가 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렵고 떨림으로 맡아야 할 것이 교회의 직분이다. 그야말로 종으로 섬기기 위하여 맡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직분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 물론 이것은 직분자들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한다. 교회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상 가운데서 따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면 마땅히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2.제직의 정신적 자세

(1)청지기정신을 가져야한다.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을 맡아 주인의 지시대로 그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영어로는 스튜어드(Steward)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사, 청지기, 사환, 여객 계원, 접대역, 간사 등을 의미한다. stewardess는 여객선·여객기 등의 여자 안내원을 말한다. 요즈음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이 굉장히 인기가 있고, 경쟁률도 높다고 하는 본래 그 의미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썩 명예로운 직업은 아닌 것이다.

어쨌든 교회의 제직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교회의 청지기로써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곧 제직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청지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인 우리는 언제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져야 한다. 내 뜻을 관철시키고 내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청지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한다. 청지기란 직분 자체가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므로 먼저 주인의 일을 생각하여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과 안일함과 욕망을 앞세운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창 1: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마 24:45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2)충성을 다해야 한다.

청지기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충성심이다. 신실함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어도 충성심과 신실함이 없으면 청지기로서는 부적격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맡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일차적인 자격은 주인을 위한 충성도인 것이다.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주인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자만이 주인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주인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다.

*마24:45-51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전 4:1,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청지기들은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어떤 상황가운데서 충성스런 개처럼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자이어야 한다.

(3)감사와 기쁨으로 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중학교때 일인데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부르더란다. 그래서 내가 무얼 잘못 했나하면서 교무실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도시락 가방을 주면서 집에 갔다놓으라고 하였단다. 그런데 그 날 뿐이 아니라 매일 학교에 갈때에도 선생님의 집에 들러서 도시락을 가져다 교무실에 들어가 선생님 책상위에 놓고, 집에 갈때는 또 교무실에 들러 선생님의 도시락을 가지고 선생님집에 갔다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사실을 잘못된 일이고, 그것을 시킨 선생님도 그다지 잘한 일은 아닌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신이 나더라는 것이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집과 교무실을 매일 드나들면서 선생님의 도시락 가방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게 생각을 했단다. 물론 요즈음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당시로는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여겨진다. 그때만해도 선생님하면 정말 하늘처럼 여겨지던 시대니까. 그런데 그 하늘 같은 선생님의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니다니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사실 만약에 지금 대통령이 불러주어 대통령 가방을 들고 다니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늘 대통령 가까이 있어서 대통령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입장에 있다면 비록 종의 입장이긴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어깨에 힘주며 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우리는 어떨까? 말그대로 하늘이신 하나님이시다. 무한히 영광스럽고, 무한히 크시고, 거룩하시고 지존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이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우리는 얼마나 무한한 영광인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에 이보다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셨고, 생명과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은 본질적으로 감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받은바 은혜가 이같이 클 진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진정 감사함이 있을진대 어찌 기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골 2:6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4)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당신의 피로 우리의 생명을 사신 것이다. 그러면서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고 하셨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곧 생명의 역사는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세상의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형태로든 헌신을 통해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세상속에서 생명의 역사, 진리의 역사를 이루려면 주님앞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우리의 헌신은 시간, 물질, 재능, 육체 모든 것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요 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 16:24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5)봉사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맡은 자들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한다.(벧전4:1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셔서 이 우주만물을 맡기셨다. 그중에 특별히 우리를 부르시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충성스런 봉사를 통하여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봉사란 말그대로 대가없이 일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받은바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죽도록 충성해도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하는 것이다.

*고후 9:11,12 -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엡 4:11,12 -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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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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