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설교-대강절 <은혜받은 성도>

 

 


제목 : 은혜를 받은 자여

말씀 : 눅1:26-38

오늘 대강절넷째주. 대강절(待降節) 혹은 대림절(待臨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혹은 임하신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절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그토록 기다려야 하고 준비해야 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기뻐하며 전파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오직 예수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요즘 새벽 시간에 계속 여기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수, 기독교의 핵심을 다시한번 살펴보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명한 믿음과 분명한 확신을 가지며 그래서 더욱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기쁨을 나누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란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말그대로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아니시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없다. 안된다. 인간은 하나같이 죄인이고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아무리 선해도,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죄인은 죄인이다. 그런 인간으로서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같이 물속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건져주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에게 빛이 있어야 남에게 빛을 비추지 않겠는가? 자신이 알아야 가르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주지 않겠는가?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오실 수밖에 없었다.

2.구속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육신하신 그 자체가 엄청난 사랑이며 엄청난 구원의 행위이시기지만 거기서 끝나면 소용이 없다. 이제 구체적으로 구원을 위한 액션을 취해야 한다. 생각해보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 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기껏 구조대가 와서는 그저 구경만하고 있다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제 본격적으로 구조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물론 많다.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셨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지엽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진짜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였다. 마지막으로 하신 일 곧 십자가의 죽음의 진짜 그분의 사역이었다. 그것만이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져주는 그러니까 진정한 생명을 줄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죄가 문제다. 죄가 인간에게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저주와 증오와 갈등을 가져다 주었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를 가져다 주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주범은 인간의 내부속에 도사리고 죄된 본성이다. 그것이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문제의 해결도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다만 임시 덮어두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저주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래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도 할수 없다. 해서도 안된다. 해도 소용이 없다. 자격도 능력도 사랑도 권한도 아무도 없다. 오직 성육신하신 하나님께만 있다. 아무리 인품이 훌륭해도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안된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가 살리지 못하는 주제에, 자기도 죄인인 주제에 누가 누구를 살리고 용서하고 새 생명을 주겠는가?

3.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역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다. 그 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질때 구원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성육신하셔서 이땅에 오시고 우리 죄악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런데 만약 죽고서 그것으로 끝이라면 이 역시도 구원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도 죽음으로 끝나버렸는데 누구를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사망의 권세에 지고 말았는데 누구를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줄수가 있단 말이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온갖 고통과 멸시와 저주를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무덤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가 당한 저주와 멸시와 고통과 죽음은 단지 우리가 받을 저주와 고통과 죽음이었을 뿐이다. 그분은 결코 그와같은 어둠의 세력들을 당해야 될 이유도 없었고, 거기에 억눌려 있을수도 없는 분이셨다. 다만 우리의 죄과를 담당하기 위하여 당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인류의 구원의 위한 아픔과 저주와 죽음을 당하신 후에는 그것을 이기시고 나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죄와 죽음의 세력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만천하에 알리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시다.

그렇다. 이 세가지 기독교의 핵심을 잊지말라. 성육신,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이 세가지 인류를 구원했다. 이 세가지 사역을 하신 분도, 하실 수 있는 분도, 하셔야 했던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한분 뿐이셨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하여 이땅에 오실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말한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러자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묻는다. 아니 저는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요. 이 무슨 말씀입니까? 약혼은 했지만 아직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다시 말한다. 마리아야 걱정하지 말아라.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네게 임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네 태속에 생명의 주실 것이다. 인간에게서 온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네 태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어주셔서 네가 잉태를 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란다. 그분께서 영원히 왕노롯하시며 그분께서 세상을 구원해 주실 것이란다.

그러자 마리아는 말한다. 저는 다만 주님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다만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국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참으로 이 엄청난 사실을, 이 놀라운 사실을 일찍이 듣고 깨닫고 믿고 오늘까지 따르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마리아가 하신 말씀을 보라. 28절에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30절에서 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얻었느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주의 계집종이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오늘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자. 우리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순종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 구속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영접했다. 이 엄청난 생명의 진리를 알았다. 믿었다. 구원받았다. 이보다 놀라운 은혜는 없다. 선물도 없다. 엄청난 사건도 없다.

이제 대강절 절기를 맞아 새롭게 영접하자. 깨닫자. 준비하자. 감사하자. 영광을 돌리자. 찬양하자. 기뻐하자.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누리자.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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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활절주일예배설교

 

 

 

말씀 : 고전15:1-8

제목 : 부활의 증거들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의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만해도 그렇습니다. 이성적, 논리적, 과학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법칙에 의하면 세상에는 그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나거나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물질도 생명도 질서도 절대로 저절로 생겨 날 수 없습니다. 저절로 생겨날 수 없다면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나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과학적으로는 절대로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과학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저절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세상의 어떤 것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저절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대답은 하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니 모든 이성이나 지혜나 과학이나 질서나 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과학과 지성과 이성과 경험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상식과 이성과 경험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행2: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결단코 사망권세아래 억눌려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의 부활은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도 이성과 경험안에 갇혀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1)성경과 예수님이 증거입니다.

 

부활이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3,4절을 보겠습니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은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3:5절에서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6:10절에서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즉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고하였고,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이 뭐가 되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허무맹랑하고 휘황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정신 이상자가 기록한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희대의 거짓말장이요, 과대망상자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만큼 강조해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성경의 증언과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거짓된 소리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성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나는 죽을 거다. 살아날 거다 말씀하셨는데 성인으로 믿는다면 따라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과대망상주의자, 정신이상자로 몰아가야 정상 아닙니까? 또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성경이 어떻게 200여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수십억권이 팔린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하여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따르든지 아니면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있는 허무맹랑하고 거짓말투성이인 쓰레기 같은 것으로 여기든지........

지난 주일에 전도를 하다보니까 윗마을 버스 정류장 밑에 집 할아버지가 자기네 가문에서 사회로 진출했으면 판검사는 넉넉히 하고도 남을 제일 똑똑한 두 놈들이 하필이면 목사가 되었다고 한탄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십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다시 오신다. 예수님 믿어야 죄용서받고 천국간다. 당신네들은 그걸 미친소리라고 하는데 그 똑똑한 두 놈이 바보 멍청이 천치라서 그걸 믿고 그걸 전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분명히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진정 유일한 부활의 주님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시오, 심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빈무덤이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무덤이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지냈을 때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다가 감춰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릴 것을 우려하여 무덤입구를 큰 돌로 막은 다음에 바위와 무덤 양쪽 벽에 밧줄로 여러 번 동여매고 진흙을 발라 인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을 세워 단단히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밧줄 아니라 쇠사슬로 백번천번만번을 묶어놔도 소용없고, 진흙 아니라 쇳물을 부어놔도 소용없습니다. 경비병 아니라 경비병 할아버지를 세워놔도 소용없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는 무덤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임으로 무덤에 갇혀 있을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28: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천하없는 사람이라해도 다 무덤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망권세 앞에 그 어떤 조그마한 저항도 한번 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80세에 식중독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져 무덤에서 끝났습니다. 공자는 곡부성의 사수언덕에 안장되어 커다란 무덤을 남겼습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멧은 62세에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무덤을 박차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무덤이 성소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덤의 권세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서는 생명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 스스로 무덤에 갇힌 자가, 사망 권세에 진 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셨기 때문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무덤에 집착하지 마세요.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연속극에 보면 무덤 앞에 가서 막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부질없는 짓입니다. 거기 뭐가 있습니까? 생기가 있습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썩어 냄새나는 시체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만 생명과 희망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천하없는 것이라해도 다 무덤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진정한 생명과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모시고 살아가면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어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무덤과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래서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만해도 16번이나 됩니다.

오늘 본문 5-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심어는 500여명이 모여 있는 곳에도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확인하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러다가 500여명의 문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분명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고, 귀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산증인이 되어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제자들의 삶이 증거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만 해도 두려움과 낙심에 빠져 하나같이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일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분안에 있는 생명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바쳐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고 증거하다가 하나같이 다 순교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바보가 거짓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요새 말로 총 맞았습니까? 안 그래요? 혹시 돈이나 한보따리 안겨 주든지 무슨 큰 권세나 하나 준다면 몰라도 돈이나 명예는커녕 환난과 핍박과 죽음만이 돌아올 그 일을 위해서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래서 잠시 잠깐 있는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더 소중함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부인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닙니다. 내가 믿지 못한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 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알량한 이성과 지식과 경험속에 갇혀 거짓말이다, 환상이다, 신화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연 정말 부활할 수 있을까하면 의심하거나 잘 믿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죽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걸어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가 있지? 어떻게 물이 갈라져 벽처럼 설 수가 있지? 여러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이성과 경험의 한계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주님의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절망과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 모든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나 그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 죄의 권세,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를 다 이기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의 촉구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내 작은 이성과 지식과 경험의 틀을 깨트려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부활의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약한 것들, 부족한 것들, 어려운 것들, 죄된 것들 다 이기시고 영원한 승리자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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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 부활절주일설교,부활의 소망

 

 

 

제목 : 부활의 능력

말씀 : 고전15:12~15

 


1.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시고 살아나셔서 예수님이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주신 날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죄사함의 은총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새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참종교의 조건입니다. 제아무리 고상하고 수준높고 지적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철학적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없으면 헛일입니다. 영원한 생명, 이게 있어야 진짜고 이게 있어야 생명이 있는 종교이고, 이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이나 과학이나 철학이나 도덕도 흉낼 낼 수도 없고, 흉내 내지도 못한 놀랍고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법칙과 질서와 이성과 과학과 경험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의 부활을 잘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1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여기서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이란 고린도교인 중에 일부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물론 다 부활을 믿으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안 하십니까? 여러분,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성경에 누누이 예언되었던 사실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일입니다. 눅9: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그리고 물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마28: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대로, 예수님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걸 믿으셔야 합니다. 이걸 믿지 못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게 없으면 제아무리 고상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능력이 있고 지식이 있어도 빈 쭉정이입니다. 생명이 없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경험과 과학의 법칙을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죄와 무지와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생명의 주님이심을, 그 안에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맞이하여 더욱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안에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부활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서 모든 죄와 어둠과 사망의 권세와 모든 상황과 환경과 약한 것들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사망과 마귀사탄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려 버리고 승리하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사망권세보다 큰 권세가 없습니다. 사망은 모는 것을 삼켜버립니다. 사람은 물로 돈도 권세도 과학도 삼켜버립니다. 지식도 능력도 아름다움도 젊음도 사랑도 모조리 삼켜 버립니다. 제아무리 잘나도 똑똑하고 지식과 권세가 있어도 사망권세 앞에 대항할 자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세를 가졌다해도 사망권세가 한번 내리치면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힘이 대단합니다. 미국의 무인우주선이 시속 약2만km로 약4개월 동안 비행하여 화성에 착륙하여 사진을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니 참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심지어 마음만 먹는다면 복제인간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인간이 참 대단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능력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입니다. 아무리 수억 수조 Km를 날아가는 우주를 탐사해도 생명과 죽음의 문제는 속수무책입니다. 제 아무리 인간이 기술이 좋고 과학이 발달해도 쌀 한 톨 만들어 낼 수 없고, 하찮은 벌레 한 마리도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명체를 가지고 어떻게 조금 변형시키고 장난을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을 창조할 수도 없고,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죽었고, 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도 죽음 앞에서는 쪽도 못썼습니다. 그밖에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나 그 어떤 유명한 과학자나 정치가나 사상가나 영웅호걸이나 할 것 없이 죽음 앞에서는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망권세 억눌려 있으실 수 없었던 주님은 사망 권세,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사망의 권세, 마귀사탄의 권세를 이기시는 생명의 주가 되심을 만천하에 명백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전에도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소녀야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소녀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며 잔잔하라고 말씀하시자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모든 사건들은 그 분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어둠의 권세, 악의 권세를 이기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 모두가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승리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인류 최대의 적인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 사탄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신 분이 우리에게 어떤 승리인들 못 가져다주겠습니까?

여러분, 눅11:21,22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앞의 강한 자는 사탄입니다. 뒤의 더 강한 자는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인류의 범죄이후에 마치 사탄이 우리의 주인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 육신과 물질과 시간과 능력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며 제멋대로 사용하도록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능력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사탄이 제멋대로 사용하던 것들을 빼앗아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모든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우리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삶으로 원위치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시험과 유혹이 오든지 고난이나 핍박이나 가난이나 어려움이나 그 밖에 그 어떤 어둠의 권세가 대들든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8:35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그런 것들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굴복시키고 무릎 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지킴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가장 강한 자를 이기신 예수님, 그래서 완전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신데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낙심하고 절망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물리치신 예수님,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신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물질이 부족해도, 혹시 육신이 좀 건강치 못해도 혹시 자녀가 뭔가 좀 문제에 직면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원망 불평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활의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고, 그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 완전하고 영원한 승리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 안에 모든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안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낙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평 불만 원망 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분명히 승리가 있는데, 예수님 안에 분명히 생명의 은총이 있는데 우리가 소망과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자 아닙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망과 위로과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살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요, 소망일 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자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능력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866년 글래스고우 대학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헌신적인 활동을 한 데이빗 리빙스턴 목사님께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학위를 받기 위하여 강단으로 나오는 리빙스턴 선교사는 갖은 고초로 겉모양은 수척 할대로 수척해져 있었고, 사자에게 물린 왼팔은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선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감사와 기쁨으로 힘 있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아프리카에서 지낸 세월을 희생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그저 조금이나마 갚으려 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미력하나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저들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걸 어찌 희생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맹수와 질병과 혹독한 기후와 야만인 가운데서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저 감사할 것 뿐이었습니다.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갈 것입니다. 거기가 내 삶의 자리이고 거기에 내 인생의 보람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헌신하다가 60세의 나이에 아프리카의 한 오지의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다가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쁨과 보람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백한 대로 부활의 주님을 믿었고 그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로 그리고 주님앞에 설 날에 대한 소망으로 그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에게는 분명 이런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16:22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염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볼 것이다. 즉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기쁨을 찾을 것이요, 그 기쁨은 그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었을 때 감사와 기쁨으로 제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런 승리를 주셨습니다. 죄로부터 건져주시고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는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심으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환경 모든 여건 속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감사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셔 들이고 부활의 주님과 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능력과 소망과 위로 가우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런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어둠과 모든 약한 것들과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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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부할주일 설교 :: 부활의 첫 열매

 

 

 

제목 : 부활의 첫 열매
말씀 : 고전15:20-28


부활의 첫 열매   (고전15:20-28 )

제가 영국에 있을 때에 런던의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를 관람한 일이 있습니다.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소망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의기소침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다음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초대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고 부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가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던 사도들이 하나 둘 순교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전15:12)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헬레니즘의 사고에 따라 이원론을 받아들여 예수의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혹은 정신적인 부활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바울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애써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 교회에도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생명을 걸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려던 사도 바울에게 부활 신앙에 대한 회의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은 부활을 자칫 신화적인 이야기로 간주해 버립니다. 반대로 이상한 신비주의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부활을 환생의 교리로 뒤바꿔 놓기도 합니다.

물론 부활은 분명 우주 안에 속한 법칙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한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사건이었기에 예수의 부활이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 이 땅에 사는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다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과거보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십 노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인간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과 의학은 많은 연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에 대한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사꾼이 손해보면서 장사한다는 말이요, 둘은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고 마지막은 노인이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말이랍니다. 비록 우스개 소리이지만 누구든지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자명한 일입니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지 이처럼 존재하지 않은 불로초와 영생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인류의 최대 비극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배가 얕은 바다에 있을 때는 눈으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만 깊은 바다에 있을 때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다른 것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죽음은 그 누구도 속시원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그 누구도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리가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랴"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죽음의 사약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고전15;22)는 본문의 표현처럼 모든 인류는 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2. 예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독일에 '죽은 자와 잠자는 자'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거미가 내리고 밤이 어두워오자 잠의 천사와 죽음의 천사가 밤을 지새고자 어느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 사람들은 어느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의 천사는 이제야 자기 할 일을 찾았다는 듯이 이 집 저 집 다니며 잠의 씨를 뿌리고, 다시 죽음의 천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식간 마을은 고요 속에 잠들고, 할머니도, 아기도, 그리고 외양간의 소도 모두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죽음의 천사와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을 보던 잠의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것 봐 ! 모두들 잠이 들었어. 이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내일 하루도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모두들 나를 고맙게 여길거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야." 잠의 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천사는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처럼 즐거울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싫어해. 모두들 내가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간다고 말해."

이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해졌던 잠의 천사가 죽음의 천사를 바라보며 이렇게말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장차 하나님께서 베푸실 부활의 날에 잠에서 깨어날 사람들을 생각해봐. 아마 그들은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니 너와 나는 모두 같은 사명을 맡은 천사가 아니겠니?" 이 말을 들은 죽음의 천사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잠의 천사와 함께 평안한 미소를 띄울 수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하늘 나라에서는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인 것으로, 장차 부활의 아침이 이르면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것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 이 후에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만 그 순서와 성격이 다를 뿐 죽은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처음은 예수의 부활이요, 그 다음은 예수의 재림 때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는 영광의 부활이요 마지막은 믿지 않은 람들이 일어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의 부활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사람들의 부활은 비참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에게 죽음이 엄습했는데 마찬가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수입의 모든 곡식을 바친 것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도 모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의 몸된 교회와 성도의 부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라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만 하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죽음을 해결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의 그늘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빠져나와 예수와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자는 없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예수께 순종해야 합니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 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여,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라고 울부짖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자매가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던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 버려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주님을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매는 너무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지니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리라는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잠자는 이들이 일어나고 우리는 영화로운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 주님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24절)입니다. 곧 주님이 재림 때 모든 악한 권세 곧 사탄의 권세, 죄악의 권세를 멸하시는 때입니다. 이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예
수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와 연관을 가진 성도들은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인내하며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만이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쓴잔을 서슴없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행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니"(히11:3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활을 얻고자 갖은 수모와 결박, 옥에 갇힘, 궁핍, 심지어는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부활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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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설교 / 사순절 주일예배설교 설교 :: 용서의 힘

 

 

 

제목 : 용성의 힘
성경 : 눅23:32~38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마지막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형 틀’입니다. 인류 역사 상 인간을 처형하는 갖가지 사형법이 있었습니다. 참수형, 교수형, 단두대형, 총살형 등 ... 하나 같이 비참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다 당한 후 죽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고통도 그에 못지않게 큰 겁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부터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체포되신 후에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불법 재판을 받으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주먹질 당하고, 욕설을 듣고, ...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기다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치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쇠붙이가 살에 박히며 살점을 뜯어내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왕관처럼 만들어 씌운 겁니다. 그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 피범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매달릴 십자가를 몸소 메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장 언덕까지 1km 정도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무게는 대충 60kg 정도로 추산됩니다.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온간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은 계속 가다가 쓰러지고, 채찍에 맞으면 다시 일어나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 순례자들을 위해 기념하는 길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난의 길’ ‘슬픔의 길’)라 부릅니다. 맨몸으로 가도 숨이 가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셨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그 언덕 꼭대기가 바로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입니다. 멀리서 보면 꼭 해골같이 생겨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보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둘 다 같은 말입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이고, 갈보리는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라틴어 Calvaria, 영어 Calvary)
  골고다 언덕에 올라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십니다. 본문은 그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마지막 우리에게 최후의 일곱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놀라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고통의 한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그 자체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메시야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용서’입니다.
[1] 십자가 : 용서의 힘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그렇게 죽어야 했나?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조롱했습니다. 35절~37절 보면 백성들과 관원들(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심지어 로마 군병들까지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남도 구원할 테니 먼저 자신을 구원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능력해서 그랬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그들을 다 처치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사들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왜 묵묵히 참아내셨습니까? 약해서 당한 게 아닙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챔피언입니다. 골목을 지나가는데 그 존재를 몰라보는 꼬마들이 돌을 던지며 놀립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참습니다. 약해서입니까? 한 주먹거리지만 상대가 안 되니까 참는 겁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에게 그들은 전혀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서는 자기 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이 몹시 불쌍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린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말씀은 ‘단순한 기도 이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끌려와서 십자가 달려 죽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겁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값을 치르지 않으면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르고 심판 당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당당하게 아버지께 요구합니다. 죄를 대속했으니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이제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는 예수님이 약함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겁니다. 용서의 힘!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용서의 힘입니다! 
[2] 우리가 받을 용서의 힘 : 용서의 은혜
  십자가의 용서의 힘은 우리에게 먼저 용서의 은혜를 받게 해 줍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 죽을 인생이었지만 이제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① 영적인 자유 획득 :
  인간은 죄로 인해 속박을 받고 삽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양심을 갖고 있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엄청 큽니다. 의식하든 않든 양심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오래 전 신문 기사 내용입니다. 일본 시즈오카 縣 후지 市에서 한 은행원이 칼에 찔려 피살되었습니다. 경찰이 수사력을 집중했지만 은행 강도 잡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년 후 48세 된 남자가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그는 직장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는 상태였고 공소 시효도 지났지만 죽기 전에 정리하고 싶어서 자수했다는  겁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었습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죄값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날 때가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모든 인간이 크든 작든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용서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32:1~4 (다윗의 침회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간혹 어떤 흉악한 사람은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양삼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느끼는 게 아니라 못 느끼는 겁니다. 사람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대번에 “아이고, 무거워!” 합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서 그런 겁니다. 이런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아무 느낌 없이 더 큰 죄를 짓다가 마침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앞에 나와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양심의 자유, 영적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면 평안해 지는 겁니다. 이 영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자녀의 권세 획득 :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으면 이제 의인으로 인정됩니다.(이신칭의 以信稱義)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섰으니” 예수님의 이름은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잘 아시죠. 허랑방탕했던 탕자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 받은 후 그는 어엿한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새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잔치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온갖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 기도하고 응답 받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얻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보장받고 천국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제대로 알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천국 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부디 십자가 은혜로 이런 권세를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나눌 용서의 힘 : 용서의 실천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 은혜를 나눌 것을 요구하십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용서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용서의 실천입니다.

  ① 용서의 실천 이유 :
i)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원한과 증오에 스스로 속박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용서하는 못하는 일로 인해 마음에 응어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 관한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크리스티 김,『인생의 응어리를 풀어라』, 규장.
  이 책에 보면 저자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 12가지를 열거합니다. 첫째,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둘째, 사탄이 틈을 탑니다. 셋째,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다섯째,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일곱째,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외롭게 삽니다. 열째,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누구보다 자신이 큰 손해를 본다는 겁니다. 마치 용서 못하는 것은 마치 금속에 녹이 스는 것과 같습니다. 녹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되지만 방치하면 금속을 다 부식시키는 것처럼 용서하지 못함으로 품는 원한은 인생을 망쳐버립니다.
  오래 전 미국 조지아 주의 한 도시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는 흑인 캘빈 존슨이었는데, 그는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배심원  전원이 백인이었고, 흑인 피고를 의심했습니다. 알리바이를 대도 무시하고 진범으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캘빈 존슨은 애매하게 복역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오. 나는 결코 진범이 아니요. 누명을 벗도록 날마다 기도할 것이요.” 그 후 16년이 지난 후 계기가 마련되어 유전자(DNA) 검사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진범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재심을 위해 법정에 나온 그의 손에는 신약성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무죄를 선고받은 그에게 기자들이 질문합니다. “존슨 씨, 당신을 16년간이나 감옥에서 썩게 만든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보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분노와 증오를 내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죽입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일자리나 구할 겁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얼마나 현명합니까?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 겁니다.
ii)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용서의 은혜를 입은 능력으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 좋다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18:23~35)를 보면 임금과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대강 환산해보면 수천억원에 달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그 종에 불쌍해서 탕감해 줍니다. 여러분, 그 종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좋아하며 길을 가는데, 중도에 동료를 만납니다. 그 동료는 그 종에게 100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1백만원쯤 된다고 했을 때 그냥 주기는 아까운 돈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진노하였고, 그 종을 잡아들여 투옥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iii) 용서하는 자는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축복을 받을까요?
  첫째, 용서하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 집니까? 행복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소유가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행복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관계가 좋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나빠지기 쉽습니다. 먼 사람은 차라리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원앙 부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원망과 앙심이 많은 부부’랍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가장 가깝고 다정해야할 관계지만 살다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원앙 형제, 원앙 친구도 있습니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요셉의 가정은 행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니까 온 가족이 호의호식해서 그랬나요? 아닙니다. 요셉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후에 그의 형들이 벌벌 떱니다. 혹시라도 복수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한 겁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말합니다. 창50:19~21 “ ...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그 후 온 가문이 화목하고 행복해진 겁니다.
* 용서하는 사람은 건강해집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원한과 증오는 독이 됩니다. 그런데 용서하고 나면 독이 제거되고 마음의 평안이 약이 됩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합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용서하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용서하면 실패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진짜 승리하는 겁니다. 스펄전 목사가 젊은 시절 설교를 했는데, 비판적인 청년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뭘 하고 있었나요?” 순간 그는 당황했습니다.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잠시 후에 하나님이 깨달음 주셔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용서의 힘을 주셨소!” 행7:60~8:1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추호 모습이 나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 ” 스데반은 무능력자가 아닙니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핍박자 사울을 바울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인해 세계가 복음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승리의 배후에는 스데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승리를 낳습니다. 
  ② 용서의 실천 방법 :

i) 성령 충만 - 용서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하나님의 신, 성령)으로 되느니라”
ii) 화해(용납과 사과) - 용서의 첫걸음은 용납하고 사과하는 겁니다. 용납은 남의 잘못을 받아주고 덮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잘했어도 인간관계란 상대적입니다. 한편에서 100% 잘못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화해가 이뤄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배보다 화해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형편 상 도저히 직접 만나서 화해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이미 죽었거나 멀리 있거나 상대방이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거나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iii) 섬김과 축복기도 - 더욱 성숙한 용서는 화해 이상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삶으로 행함으로 옮겨지는 겁니다. 상대방을 섬겨주고, 축복하며 기도하면 더욱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iv) 끝까지 용서 -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한두 번 용서하다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기껏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경우에도 계속 용서할 할 것을 권면합니다. 마18:22 “ ...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 이 말씀은 490번 하라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너무 많지만, 7은 완수로 무한히 용서하라는 겁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일지 모르지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하십시오. 끝까지, 무한히 하라는 것은 ‘한번만 더’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여러 가지 선행을 하고 ...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십자가는 용서의 힘이라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그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힘으로 용서를 실천하십시오! 그래서 누구보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하시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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