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예배설교 - 내 집을 채우라

 

 

 

제목 : 내 집을 채우라

말씀 : 눅14:15-24

 


*금일 오후예배는 황수관박사초청천국잔치 설명회를 겸하여 열림.(설교는 10분정도, 30분정도 천국잔치 설명, 황수관박사천국잔치 개요 소책자 활용)

천국 : 말씀, 찬양, 사랑, 평화, 교제, 기쁨이 있는 곳.

천국잔치 - 바로 그러한 천국의 은총을 이웃과 함께 누리는 축제라는 의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오늘 말씀. 잔치를 배설하신 하나님. 그러나 죄와 무지로 천국잔치에 무관심한 인간들. 그러나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강권해서라도 데려다 채우라.

좀더 구체적으로보면,

1.큰 잔치를 배설하신 하나님.(16)

가장 큰 잔치, 세상의 어떤 고관대작이 모인 성대한 잔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잔치. 세상에 어떤 간치가 이에 비교하겠는가? 진정한 생명, 자유, 기쁨, 은혜, 평화, 안식. 단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단 하나도 어둠이 없는, 그것도 영원히 지속되는, 모든 어둠, 고통, 사망권세 완전히 정복된. 그 큰 잔치를 배설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잔치를 마련해야 한다.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잔치집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잔칫집 마당이 되어야 한다. 이번에 천국잔치가 그런 잔치다.

2.사랑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님(16,17)

잔치상만 차려놓고 자기 혼자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부르신다. 사람들은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 부른다. 다 초대할 수도 없다. 다 줄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초대하신다. 그만한 완전한 사람과 능력이 있으시다.

교회도 그래야한다.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 불러모아야 한다. 어찌하든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초대장을 보내야 한다.

3.나름대로 핑계대고 오지 않는 사람들(18-20)

그러나 죄가운데 있는 인생은 오지 않음.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댐. 그저 세상적인 관심만 가지고 있음.

①밭을 사서 가보아야 하겠다. 말도 안돼. 사기전에 보았어야. ②소 다섯겨리를 사서 시험해야 한다. 역시 말 안돼. 미리 해보고 샀어야. ③장가들었으므로. 역시 이유 안돼. 장가들었다고 잔치집에 갈 시간이 없을까?

한마디로 무지해서, 세상적 관심으로, 육체적으로 관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해서 천국에 대한 무관심. 세상이 바로 그렇다는 것.

4.아무나 데려다 강권하여 채우라(21-24)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양하자 예수님은 말씀. 밖에 나가 소경, 저는 자, 불구자들, 가난한 자들을 데려오라. 즉 갈급한 심령들을 데려오라.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는 자들을 데려오라. 종들이 그렇게 함. 그래도 다 차지 않음. 그러자 길과 산울가를 다니며 아무나 데려오라. 강권하여 데려다가 채우라.

오늘 말씀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엄청난 잔치자리를 예비하고 계시다.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미련한 인생은 어둠속에서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데리고 와야 한다. 강권해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천국은혜 누리지 못하고 지옥의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잔치를 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늘 해야 하지만 특별히 이런 행사를 통하여 한번 온 교회가 힘을 모아서 잔치마당을 준비해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을 어찌해서든지 데려와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 협력하여 금번 정말 큰 천국잔치가 되게 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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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저녁찬양예배설교] 천상의 찬양소리 

 

 

 


제목 : 천국의 찬양 소리

말씀 : 계19:1~8

 


여러분,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찬양은 말씀과 기도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찬송하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 영혼이 찬양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 사랑, 선, 의, 거룩, 은혜를 알면 찬양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13: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보십시오.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매순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도와 보호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과 은혜를 고백하는 신앙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찬양이 신앙의 고백이고 예배입니다. 우리 육신이 밥과 물과 공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듯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없으면 우리 영혼이 생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식어지면 그 영혼은 빈사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계속 찬양을 촉구하며 또한 계속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나서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출15장) 다윗은 사울의 손에서 구원받고 찬양하고(시18편), 심지어는 블레셋으로 도망하였다가 위기가 닥치자 미친 체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구원하였을때도 찬양하고(시34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안치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찬양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과 목자들이 찬송했고(눅2장),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찬양했습니다.(눅2장) 바울과 실라는 실컷 두드려맞고 차꼬에 채워져 감옥 갇혀 있으면서도 찬양했습니다.(행16장) 요한계시록에서는 오늘 말씀을 비롯해서 계속해서 천국에서의 찬양이 소개되어 있습니다.(4장, 5장, 7장, 15장, 19장...)

왜냐하면 찬양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신앙의 고백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성도의 삶에 큰 힘과 능력과 은혜를 가져다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주님의 구원과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찬앙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고 춤추며 박수치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의 신앙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성도들과 혼인잔치를 하기 전에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천군천사들의 찬양을 보면 다음과 같이 몇가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1.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송함(1절)

먼저 1절을 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허다한 무리들이 찬양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늘의 천군천사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무엇을 찬양했느냐, 구원의 하나님, 영광스러운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일차적인 찬양의 이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 모든 피조세계의 유일한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인류의 구속주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완전하게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완전한 빛이며 선이며 의이시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안에는 조금도 어둡거나 부족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이 완전한 광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아무 공로없이 구원해 주신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찬양안하겠습니까?

이것만으로도 찬양의 조건은 충분합니다. 찬양함이 마땅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시147:1절을 보십시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설령 세상에서 많은 것을 주지 않았다해도, 무슨 큰 능력과 아름다움과 지식이 없다해도 이거 하나 만으로도 찬양함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한없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 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너무나 선하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심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나같은 죄인 부르셔서 구원해 주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삼아주심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비록 부자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여러분도 더욱 생명의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찬양함(2-5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영광스러움을 찬양한 다음에 천군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즉 공의의 판단으로 음녀를 심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녀는 계17장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붉은 짐승을 탄 여자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그의 몸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습니다.

즉 음녀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의 우두머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세상의 음녀가 사람들을 꾀에 파멸의 길로 가게 하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와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고,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들을 따르게 하여 결국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는 사탄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판해서 그런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우다가 순교당한 순교자들의 피를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우두머리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도록, 더 이상 성도들을 미혹하고 괴롭히지 못하도록 완전히 파멸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군천사는 이 완전히 공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그래서 악의 세력들을 징벌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실현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이루어진 사실로 인하여 감사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로 인하여 또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악을 제거하시고 선의 나라를 세우실 하나님, 모든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셔서 영광의 나라를 이루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히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해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심판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좀더 자유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의를 향하여 진리를 향하여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촉구하시며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날들이 무한정 연장 될 수는 없습니다. 곧 심판의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오면 의의 심판, 완전한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과 의와 지혜로 완전히 공정한 심판을 하십니다. 그 때 사탄의 세력은 완전히 결박되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에 갇히게 되고, 완전한 영광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완전한 승리자가 되어 완전한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찬양 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와같이 의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악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그야말로 완전한 선과 의과 자유와 평강과 소망과 기쁨과 생명만이 넘치는 의의 나라를 세워주실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그 높으신 이름앞에 영광을 돌리며 그 의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도 맛보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찬양함(6~8절)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구원을 찬양하고, 음녀의 심판을 찬양한 다음에 이번에는 그렇게 음녀를 심판하고 이루어질 혼인잔치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6~8절을 다 함께 보겠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쉽게 말씀드리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음녀를 심판하시고 나서 곧 하늘에서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에 혼인잔치가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혼인잔치란 그동안 비록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는 동안 완전히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 안에 있는 완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었는데 악의 세력이 온전히 제거된 다음에는 이제는 온전히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을 감사하며 축하하면서 열리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하나님이 완전히 통치하셔서 감히 어떤 어둠의 세력들도 준동하지 못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정말 멋있고 돈많고 사랑이 충만한 신랑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긴 했지만 아직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힘들때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와 평강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온전치 못합니다. 아직 악의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도전도 있고 유혹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악의 세력들은 진압됩니다. 완전히 결박당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때에 공식적인 혼인잔치가 열립니다. 그때에 우리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기쁘고 복되고 아름답고 황홀한 그 잔치자리에서 기쁨으로 주님을 뵙게 됩니다. 그 이후로 영원히 그 놀라운 천국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니 어찌 찬양 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힘써 구원과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악의 세력들을 심판하여 의의 나라를 세우실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아직 광야와 같은 세상이라서 때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악의 세력을 온전히 심판하시는 날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벌일 천국의 혼인잔치를 기억하며, 이후로 그 너무나 영광스러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누리게 될 그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과 영광을 기억하며 찬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지금 여기서도 천국의 은총을 맛보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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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 고난이 유익이라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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