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 죽음과의 랑데부   왜예수를믿어야하나  

 

 


제 목: 죽음과의 랑데부   왜예수를믿어야하나    
 

(히브리서 9:27~29)

세계 제일차 대전때 어느 시인이 "죽음과의 랑데부(rendezvous:약속된 시간이나 장소에서 만난다는 뜻)"라는 시를 쓰고 전사한 일이 있습니다. 요몇일전 일본 여객기(보잉747)가 추락하여 520여명이나 떼죽음을 당했는데, 엇그제 영국 여객기(보잉747)가 이륙하다가 엔진에 불이 나서 50여명이나 죽었습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 청년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서 장례식을 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된다면 죽음과 랑데부를 가져야 합니다. 죽음은 갑자기 들이 닥치기도 하고 천천히 다가 오기도 합니다.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찾아 오고 야 맙니다. 건강 상태가 아주 좋은 사람이 몇일 안에 죽는 수도 있고 병원 침대에서 다 죽어가던 사람이 10년, 20년 오래 사는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란 신비스러우면서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 공동묘지나 무덤은, 죽음은 반드시 찾아 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에덴동산 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그 문에 들어 갈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너는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따 먹어도 좋지만, 한가지만은 먹지 말라. 만일 그 나무와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 셨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그 금지된 열매를 따 먹고, 그 순간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육신적으로도 서서히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다 비슷한 과정을 밟습니다.

하나님은 아담부터 노아까지 아홉 사람의 이름을 적으셨는데 그 들 중에 한분이 에녹입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어 갔습니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죽었다."는 말이 계속되는데 이 기록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실현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열왕기에도 보면 "어느 왕이 살다... 치리하다... 죽었다. 살다... 치리하다... 죽었다."는 말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네가 죽을 때가 다가온다"고 말씀하셨고, 에스겔에게는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히스기야 왕에게는 "너는 네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이사야 38: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죽음에 관해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한 거지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웠다고 말씀하시고, 한 부자는 죽어 지옥으로 떨어진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6:13-31). 또한 어리석은 한 농부에게 오늘밤 잠잘때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2:13- 21). 또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죄악중에 죽으리라(요한복음 8:24)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성경은 많은 무리의 죽음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왕과 그의 군대가 홍해바다에서 죽은 사실(출애굽기 14장)과 산혜립의 군대185,000명이 하루밤에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죽은 사실 도 말씀하고 있습니다(열왕기하 19:35-36). 성경은 아마겟돈 전쟁때 수백만의 사람이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계시록 16,19장). 그리고 세례요한이나 스데반 같은 사람은 용감하게 죽은 것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어 언제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관한 말씀은 성경 장장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실때 우리가 살아있게 된다면 우리는 죽음을 보지않은 채,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홀연히 변화되어 들리워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옆에 참여하는 성도는 얼 마나 영광스럽겠읍니까?

1.죽음의 기원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죽음은 죄로부터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첫번 사람이 범죄한때부터 죽음은 모든 후손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입니다. 사실로 죽음은 모든 인간뿐 아니라, 모든 자연까지도 오염시켰습니다. 꽃은 피었다 죽 어버리고, 나무의 푸른 잎도 말라 죽습니다. 모든 동물도 죽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몸 속에 죽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뼈는 부서지게 되고, 치아는 썩어가고 있으며, 머리는 희어지고 또 빠져 없어지고 있습니다. 시력은 점점 약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암이 퍼져 가고 있고, 심장의 근육은 점점 약해지고 잇으며, 혈압은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너무 강조하는 분은 우리가 건강치 못한 것은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완전한 건강을 갖기 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병들면 병원에 갑니다. 안경도 쓰고, 보청기를 씁니다. 그리고 이가 아프면 치과에도 갑니다. 결국 죽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서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손을 묶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 림할 때까지는 결코 완전한 몸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죽음의 운명적인 시간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비행 기 사고, 자동차 사고, 익사사고 등으로, 또한 질병으로 죽고, 자살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건축업자들이 기억해야 될 말이 있는데, 즉 "모든 문과 계단은 큰 관이 들어올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정복 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죽음은 구원 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가 끝나게 합니다. 지금이라도 죽음이 우리 앞에 성큼 나타날지 모릅니다.

2.죽을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①스리스도인이 죽을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몸은 무덤으로 갑니다. 그 무덤은 공동묘지일 수도 있고, 바다 밑일 수도 있고, 사막의 모래일 수도 있고, 산 꼭대기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썩어서 에수님이 오실때 까지 남아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공중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인의 몸은 다시 부활하여 예수님의 몸 과 같이 되어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몸은 부활하지 못하고 천년을 더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영혼도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고린도후서 5:8)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1:23-24에서는 "내가 그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리라"이 말씀에서 우리의 영혼, 즉 진정한 자아는 죽는 순간 올라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 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영혼도 잠을 잔다면 1,900여년전에 죽은 바울은 아직도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잠잔다는 근거가 될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그의 몸은 무덤으로 가지만 그의 영혼은 올라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한 우리의 영혼은 빛의 세계로 날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강도가 회개하며 죽어갈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말씀 해 주셨습니다. 내일이 아니고 천년후가 아니라 "오늘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읍니다. 오직 저주의 세상에서 행복한 하늘 나라에로 이주(translation)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준비할 필요는 있습니다. 어느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의 공적이 시험을 받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가 없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업적은 심판 의 불을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천국에는 들어갈 수 있으나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너 받을 상급은 없느니라"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함께 사라져 없어질 것을 위해 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위와 재물과 쾌락을 얻는데만 생애를 허비하는 이가 있습니다. 마침내 자기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위해서는 아무 한것도 없이 빈 손으로 주님앞에 서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이런 삶을 산다면 죽을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빈 손으로 주님을 만나게 이제부터라도 그를 위해 바쁘게 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죽음이 닥쳐 오면 더 이상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 다. 사랑하는 자식을 구원하지 못한채 죽지는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9:4)고 했습니다.

②잃어버린 죄인이 죽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기는가?

누가복음 16:2-23절에 "부자는 죽어서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라고 한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이 죽을 때는 고통을 의식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몸은 무덤으로 가고 그 영혼은 고통의 장소로 가게 됩니다. 후에는 몸이 부활하여 영혼과 다시 합쳐지는 때가 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죄인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불못에 던지워져서 극심한 고통이 시작됩니다.

3. 죽은 후에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가?

그 해답을 결단코 "아니요"입니다. 전도서 11:3에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구원 받았던지 멸망 받았던지 영원히 그대로 있게 됩니다. 죽은 후에는 회개 할 기회가 없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없고 긍휼울 베푸는 자도 없습니다. 죽은 후에 불신자에게는 심판과 저주와 고통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 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 도 없게 하였느니라"(누가복음 16:26)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구와 태양사이를 9,300만 마일의 간격을 두셨습니다.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 죄인은 천국과 지옥사이의 구렁에서 지옥편에 영원히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간절히 부르고 계십 니다. 죽은 후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습니다.

4. 죽는 자리에서 한 회개는 어떤가?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믿는지 아닌지가 문제입니다. 죽기 전에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면 침상에서 한 약속대로 사는지 안사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예수님 잘 믿고 교회에 잘 다니겠다"고 약속한 대로 퇴원하고 나서 교회에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어떤 이는 철석같이 약속하고 퇴원한 후에는 전혀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대로 살지 않고 여전히 교회에 안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구워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다급할 때는 예수님을 찾다가도 평안해지면 변해 버리는데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확실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 항상 있는 죽음의 가능성

죽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갑자기 당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자살, 강도, 전쟁, 심장마비 등 모두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런 죽음이기 때문에 살려 달라고 고함도 못치고, 회개할 기외도 없이 죽어 준비없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워받지 못했다고 원망하거나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산지 지방에 교회가 있고, 성경이 있고, 서적이 있습니다. 복음은 강단에서, 라디오와 TV에서도 전파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사람들은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잠언 29:1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 하고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와 구원 받으시기 바랍니다.

6. 죽음을 정복한 사람

우리 주 예수님은 요셉의 무덤에서 부활 하실때 나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음을 정복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셨으므로 우리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할 때까지 무덤에서 잠을 자게 될지라도 우리의 영은 죽을 때 그의 계신 곳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움으로 사로 잡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올테면 오라고 하십시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비웃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죄악된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면 가장 훌륭한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찬물을 건너는 것도 아니며, 차디찬 손으로 목을 누르는 것도 아니며, 얼굴에 어름같이 찬 기울을 불어 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슬픔과 실망의 끝 입니다. 염려와 근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이니라"(빌립보서1:21)고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면 죽는 것은 유익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그러면 죽음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를 줍니까? 모든 기회의 종말입니까? 아니면 축복의 시작이 됩니까? 위로 올라가게 됩니까?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까? 천 국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선택은 여러분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천국이 되든지, 죄와 지옥이 되든지 말입니다. 한 작은 소년이 바닷가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모래로 한 도시를 건설합니다. 그안에 집도 짓고, 가게도 만들고, 예배당도 짓습니다. 그러면서 해가 지는 줄을 몰랐습니다. 잠시후 조수가 밀려와서 그 도시를 다 쓸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소년은 물결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 소년의 큰 형이 달려나와 실망한 동생을 안아다 안전한 곳에 놓고 또 집으로 데겨 갔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시간이라는 모래위에 놀고 있는 것입니다. 장난감 집도 짓고, 세상을 위해 짧은 생애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해서 죽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해서 죽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음이 와서 우리와 우리들이 여러 해 걸려서 쌓아 올린 것들을 일순간에 쓸어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큰 형님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가 내려와서 능역있는 팔로 우리를 안아서 밝고 빛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단,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고 그를 위해 살아야 됩니다. 죄가 하나도 없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르르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의 가족, 친척, 우리 이웃에 아직도 멸망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세계에 복음을 듣지 못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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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죽음을 이기신 예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고전 15:1-26 )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 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 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 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먼저 죽음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나누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제법 잘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운동세포 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모리라는 노(老)교수, 이제 죽음의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그에게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인생을 논하는 내용을 담은 글입니다. 그 글 가운데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는, 의표를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는 수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무어 그렇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가 있을 때 예수 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 엄청난 기쁨이요, 소망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밤이 되면 자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1998년도 한 해에 우리나라 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25만 명으로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한 해에 25만 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랑의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서초구의 전체 인구가 40만 명하고 몇 백 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25만 명은 서초구에 사는 사람들의 60%에 해당합니다. 1년에 서초구 인구의 60%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의교회만 해도 하루에 한 명 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통계상으로 보면 1년에 365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랑의교회 교인 전체로 따지자면, 거의 100명에서 120명중에 하나가 날마다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우리가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진지하게 직시해야 될 실체입니다.

우리가 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낍니까? 왜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무덤을 갖고 있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 고상하게 대답을 하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는데 다 이해한 체 한다면 본심을 숨긴 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더 인간적인 대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여러 권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가 쓴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굉장히 감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정말로 옥 목사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왜 부활의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마음이 끌렸는지에 대하여 그는 퍽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인간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기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람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귀가 번쩍 뜨이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해 안에 자기 친구 셋을 잃은 슬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 친구는 나이에 비해서 일찍 은퇴를 한 사람 인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와 더불어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를 타려다가 '윽' 하고 쓰러지더니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친구는 40대 부인인데, 믿음이 아주 좋은 부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모이는 선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개가 짙게 깔려있는 길을 드라이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던 유조차가 앞에 있는 차를 못 봤던지 들이받아 차에 화재가 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건장한 친구인데, 미시건 호수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해에 졸지에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셋씩이나 잃어버리는 기막힌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되자, 그의 마음 속에서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고 싶은 욕구, 죽음이 마지막 이라고 하는 말에 저항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고 비판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친구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기대감이 마음에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 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하며 귀여 워하던 어린 딸이 죽었습니다. 그 딸의 시체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 아니겠 습니까? 어느 누구라도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부활을 믿고 싶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을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요,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어 놓는 놀라운 복음 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 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 백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한 예로 시편16편 10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다윗은 자기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빗대어서 장차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자기가 부활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다에 빠지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고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큰 고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3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12:40) ' 인자도 무덤에서 사흘 동안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요나가 사흘 후에 살아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있는 요나의 사건마저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앉혀 놓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는다.

그러나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구원 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 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 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 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린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섹을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 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 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 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그 다음부터 바울은 숨만 쉬고 있었지 제 정신이 아니었 습니다.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 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입니다.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확실하게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혜택에 대해 논하라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몇 가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믿도록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상당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 해도 여러 명입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든지, 야이로의 딸이라든지, 나사로라든지, 이렇게 여러 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렇지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절대로 다시 살지 못한다는 사상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도 비록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부활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절에는 바울의 엄중한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것이 헬라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있게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3절부터 17절까지 비슷한 말씀을 반복함으로써 이것을 논증합니다. 이 구절 안에는 유명한 오중주의 '욱'(uk)이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어 (not, nothing)로 쓰이는 단어가 '욱'입니다. '아니요', '없으면'하는 뜻입니다.

13절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이것이 '욱'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리라.' 비슷한 형식을 17절까지 5번 정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골자는 이것입니다. '왜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죽은 자라도 살 수 있다. 무엇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을 보면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죽은 자가 다시 살 수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절대 살리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아라.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까?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이 진리를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감격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맹숭맹숭하다면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진리에 매료되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굴복한 사람인가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이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할렐루야! 세상 빅 뉴스 가운데 제 1면에 대문짝만하게 큰 글자로 나올 수 있는 뉴스가 있다면 '죽은 자는 살 수 있다.' 하는 뉴스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부활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 중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 믿음도 헛되고' 믿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는 하나도 용서받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했다면 우리 보다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믿음을 가지고 떠났더라도 다 소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 가서 있을지 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19절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 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벌써 더위 때문에 힘이 드는데 왜 여기 와 앉아 있습니까? 모두 다 오염이 되어서 갈 때도 마땅치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아름다운 인생의 꿈도 서로 나누면 좋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여기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을 듣겠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괜히 재미있는 일도 못하고 한 생을 보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 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부활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성경 27권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언급한 성경이 17권이나 되고, 나머지 10권은 간접적으로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빼고서는 신약의 말씀이 성립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해 준다.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20절부터 24절까지 보면 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흔들면서 요제를 드립니다. 요제란 흔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 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 구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합니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 구원을 주십니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습니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 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에릭 사우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성도의 부활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개의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멋진 말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믿으면 죽음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긴 하지만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않습니다. 죽음이 불쾌한 것이긴 하지만 저주스러운 것으로보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이 마침표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배짱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놓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와 같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지금 여든 세 살 정도 되십니다. 그분이 쓴 글을 최근에 보았더니 참 인상 깊은 말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주소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 자체를 흔히 말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이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죽음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 미국의 한 때 유명한 설교자였고 목회자였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 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것과 같구나.' 우리가 죽습니까? 그러면 문 딱 닫아 놓고 '내부 수리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주님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부활의 날까지 내부 수리중 팻말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우리 몸은 정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마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일지 모릅니다. 얼마나 비통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허무합니까? 사랑의교회에 어떤 자매가 있었는데, 그 자매 남편이 30대에 암이 걸려서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다. 라고 그랬더니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끝까지 안 갔습니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다는 것, 소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단히 어렵습니다.며칠 전에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우리목회자의 사표가 되는 어른이었 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빈소 앞에 가서 한참 동안 앞에 있는 큰 사진을 쳐다보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 사진은 아마 그분이 한 80세 정도 되었을 때 찍은 것 같았습니다. 깊게 파인 주름살이 잔뜩 덮여 있는 얼굴, 이목구비의 모든 균형이 다 어그러진 얼굴, 생명의 빛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얼굴, 이것을 쳐다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마당에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정말 허무하네, 허무해.' 그 목사님의 친척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눈물은 안 나오겠지만 당장 이런 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 허무하네. 빌어먹을 세상, 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다가 죽어야지. 마지막이 저 모양인데 잘 살겠다, 의롭게 살겠다, 이런 소리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그 목사님의 그 사진을 보면서 제 마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지금은 저렇게 추한 모습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엄청난 미남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시겠지.'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먼저 떠난 내 아버지도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먼저 떠난 우리 어머니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나보다 먼저 떠난 내 남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 눈물을 쥐어짜면서 세상을 떠난 내 아들, 내 딸 반드시 부활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불구의 몸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몸 안에 있는 질병을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며 그 부활을 바라볼 때마다 '그 날이 되면 나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몸을 입고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소망을 가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을 통해 완성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시다.

또 우리 자신이 부활할 그 날을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럴 때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관한 가능성을 길게 변증한 사도 바울은 끝으로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57절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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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신앙인격 


성경/(삼하1:1-16).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런 향기를 주위에서 맡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향기가 되어서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주 짙은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 중이었고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직접 이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멀리 시글락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도중에 사울 왕과 아들 요나단이 전사 하게 됩니다. 한 아멜렉 소년이 다윗에게 달려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보여주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슬퍼했고 이를 본 백성들도 함께 슬퍼하며 울고 또 금식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조가를 지어 저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1. 관용의 향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왕의 시종이 되어 왕궁에 들어가게 되면서였습니다. 악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울 왕을 위해 주의 신에 감동된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처음에 좋은 관계로 시작이 되었습니다(삼상16:14-23).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전쟁마다 승리하면서 백성들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사울의 질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삼상18:7-8). 사울은 다윗에게 딸 미갈을 줄테니 블레셋 사람 백명의 양피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다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백 개 뿐 아니라 백 개를 더 가져왔습니다. 할 수 없이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았지만 사울은 다윗을 심각한 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지만 번번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로인해 다윗은 10여 년간 사울을 피해 기나긴 유랑생활을 고단하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제 고달픈 도피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울었고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했지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뒤쫓고 있는 사울을 적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타인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참고 또 참아야 했습니다. 관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향기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절친한 친구 사이지만 다윗은 새로운 왕으로 부상하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였고,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변함없이 순수한 사랑으로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삼상 20:1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자기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이 일로 사울이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도록 다윗을 지켜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을 진정한 친구로 대했습니다. 삼상 20:41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가 숨어있던 곳까지 와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절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크게 울었습니다. 정말 힘들 때 다윗은 요나단을 의지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조가를 지어 이렇게 애통해 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상하 1:26). 다윗은 왕이 되자 요나단을 생각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불구가 된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자기 자식처럼 자기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했고, 종과 일군들을 붙여주었고, 사울의 재산도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향기로운 우정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진실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요나단과 다윗 은 우정을 맺을 수 없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서 진실한 우정을 나눴습니다.
둘째,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요나단은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입니다. 왕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섬기는 마음으로 권세에 대한 탐욕을 뛰어넘어 우정을 맺었습니다.
셋째,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처음 만날 때부터 수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요나단이 죽은 뒤에도 그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우정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상황이라는 장벽, 이해타산이라는 장벽, 그리고 시간이라는 장벽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이 언제나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겸손의 향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전사 소식과 그의 왕관과 팔찌를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큰 상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우연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블레셋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다쳐 자기에게 죽여 달라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 청을 받고 자기가 사울 왕을 죽였고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소년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다윗이 자기의 공을 인정해서 큰 상을 내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소년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1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삼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혼자 잠자고 있던 사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겉옷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존중한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죽인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중하는 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의 권위는 그들의 인격이나, 그들의 능력이나 또 그들의 도덕적 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을 존중하되 그들을 보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그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보고 그것 때문에 존중한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허물이 있어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심지어 나와 입장이 달라도 그래서 나를 비난해도 그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향기를 맡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기뻐하며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동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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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설교 / 감사할 줄 아는 인생

 

 

 

제목 : 감사할 줄 아는 인생

말씀 : 시103: 1-5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차를 운전하다가 그만 언덕 아래로 떨어지면서 몇바퀴를 굴렀습니다. 차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찌그러졌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 찌그러진 차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가갔을때 정말 뜻밖에도 그 다 찌그러진 차안에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기는 했지만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물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믿기 어려운 기적이라고 웅성거렸습니다. 목사님 아들 또한 정말 기적이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외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으로 갔을 때 아버지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정말 오늘 저는 큰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며 다시 한번 능력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 너보다 더 큰 기적을 체험했단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들은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얼마나 더 큰 사고를 당하셨길래요? 저보다 더 큰 사고를 당하셨는데 이렇게 멀쩡하시다니 정말 기적중에 기적이네요.」라고.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나는 아무런 사고도 당하지 않았단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런 사고없이 조그마한 타박상조차 없이 잘 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느냐,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별로 심감을 못 느끼시는 것 같네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일상 생활 전체가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가운데 살고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정말 큰 기적이고, 정말 감사하고 영광돌려야 할 일은요 다른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먹고 입고 잠자고 일하고 오늘 여기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이요, 가장 큰 은혜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전쟁이 난 후에야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평화시에는 평화의 소중함과 은혜를 잘 느끼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져 봐야 다리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비로소 확실히 압니다. 먹을 것이 없어져봐야 식량의 소중함을 압니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 있을때는 양식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병이 난후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눈이 어두워져 봐야 눈을 소중함과 감사함을 실감하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안계셔 봐야 부모님의 소중함과 은혜를 아는 거예요. 아내가 며칠 자리를 비워봐야 아내의 소중함을 압니다. 이웃이 없어져봐야 이웃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어져봐야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곳인지를 비로소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많은 핍박과 환난과 압제를 당해봐야 비로소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요, 은혜인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러기 전에 먼저 알아야 돼요. 없어지고, 약해지고,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그때 비로소 전에 것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참 억울한 일이예요. 있을 때 누릴 때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즉 우리는 오늘 이 시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요, 감사요, 은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더욱 은혜롭게 누리며 더욱 더욱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이른 곡식을 수확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과 은혜를 나누는 절기입니다. 요즈음에는 보리나 밀 농사를 많이 짓지 않아서 아직은 수확한 곡식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상반기를 돌아보면서 오늘까지 때를 따라 돕는 은총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우리에게 이러한 절기들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왜, 맥추절, 오순절,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규례를 주셨을까요? 그저 헌금이나 얼마 드리고, 감사에 대한 설교나 한편 듣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 이유는 조금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속에 젖어서 너무나 은혜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고 살다보니까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니까 기쁨도 만족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정말 너무나 많은 은혜와 기적속에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일상화되다 보니까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잊고 살다보니까 감사와 영광은커녕 도리어 원망과 불평을 하기도 하고, 실망과 좌절속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살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주어져 있는 복도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메마르고 왜곡된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서 감사와 은혜의 삶을 살게 하려고 일부러 절기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정말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때로는 별다른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고, 좀더 극단적으로는 별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k일상들이 정말 큰 기적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은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큰 은혜는 말할것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은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은혜, 이 아름답고 축복된 삶의 터전을 허락하신 은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변함없이 공급해 주신 은혜, 생각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신 은혜 등등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은혜들을 주셨고, 오늘도 변함없이 공급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은혜, 이웃의 은혜, 스승의 은혜, 국가의 은혜, 회사의 은혜, 종업원의 은혜, 농업인의 은혜, 상업인의 은혜, 공장의 은혜, 공무원의 은혜, 서비스인의 은혜, 고객의 은혜 등등 우리는 정말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로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쓰러트리고 배격하고 이겨야하고 심지어는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는 엄청난 과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잘못된 인간관계 때문에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 인생은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까? 필연적으로 서로간에 은혜를 주고받는 관계속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닙니까? 나는 너의 은혜를 필요로하고, 너는 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정말 행복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걸 잊어버리고 서로의 소중함을 모르고 비난하고 헐뜯고 속이고 싸우고 아프게 하고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필요로하는 존재들입니다. 서로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이웃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정부 조직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무질서와 혼란의 극치를 이룰 것입니다. 경찰조직이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기업가가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상인이 없다면, 농업인이 없다면, 과학자가 없다면, 노동자가 없다면, 공장이 없다면, 교회가 없다면, 병원이 없다면, 우체부 아저씨가 없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만약 나 혼자 살면서 빵 한 조각을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수고가 있어야 할까요? 먼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추수를 해야 겠지요. 그러자면 거기에 필요한 연장들을 만들어야 할테고, 그리고 나서 방아를 찧고, 또 거기에 필요한 도구도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가루로 만들고, 부풀게하는 약이나 설탕도 구해야 하고, 불을 지필 나무나 기타 연료를 장만 해야 하고 대략 20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각각의 단계마다 많은 도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빵 한조각을 먹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나가서 빵을 사먹을 수 있다는 것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약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좋은 옷들을 입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까요? 비행기를 타려면 어떨까요? 이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병들고 외롭고 슬플때는 어떨까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그저 별 생각없이 먹고 입고 잠자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그 모든 과정과 그 모든 일상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림과 동시에 언제나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보십시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니다. 그래서 모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이라함은 비단 육체적인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병이란 우리의 영혼의 병, 우리의 정신적인 병, 우리의 육체적인 병 등 인간의 전 영역에 걸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질병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우리 인간에게 찾아온 모든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치유해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날마다 좋은 것들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소망하는 기쁨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힘있게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듯이 우리가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운데 더욱 힘있게 저 높은 것올 향하여 달려가는 그러한 승리자로서의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주신 은혜를 말씀하심과 동시에 앞으로 주실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이미 그런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어여삐 여겨 주시사 더욱 더 큰 은혜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은혜와 능력과 기쁨속에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말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로 채워 주셨습니다. 삶의 터전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과 자유와 평화와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주시고 이웃을 주시고 나라를 주시고 태양과 비와 공기와 ...... 정말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신바 은혜들을 헤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누리고 있는 것들을 헤아리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감사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농촌경제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고달프기도 합니다. 때로는 별다른 고통이나 어려움없이 사치와 호화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은근히 시기심이 생겨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몇 달을 수고하고 나서 몇억씩 벌어들이는 사람들, 한편의 광고를 찍고 무슨 십억을 받느니 하는 것을 보면 좀 속이 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촌에서 이렇게 고생해봐야 별로 남는 것도 없는데 우리 같은 처지에 무슨 감사할 것이 그렇게 많으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일부 부유층이나 지도층이나 권력층이나 유명인사들이게나 어울리는 일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감사는 어떤 특별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감사는 어떤 특권층에나 어울리는 사치품이 아닌 것입니다.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또 누구에게나 감사해야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매튜헨리라는 사람은 도적을 맞고 나서 이렇게 감사하였습니다. ①지금까지는 도적을 맞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②내 생명은 도적 맞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③아직은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남겨주셨으니 감사합니다. ④그 무엇보다도 내가 도적이 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17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사상가였던 John Milton(1608~1674)은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2대 시인으로 꼽히는 사람이었으며 청교도 혁명에도 기여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44세 때에 완전히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1652).

그러나 신실한 청교도적 신앙인이었던 밀턴은 이 불행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더 신령한 눈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시선을 어둡게 하신 것은 오직 주님만 볼 수 있도록 내 심령의 눈을 더욱 크게 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그리하여 결국 그는 1667년 「실락원」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대서사시를 완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조건에서나 감사의 조건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감사할줄 아는 자만이 진정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감사할줄 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정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신 은혜들을 다시한번 헤아려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늘 기억하면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거기에 보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도 동시에 언제나 우리들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과 은혜를 주고 있는 우리의 모든 가깝고 먼 이웃들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또한 감사하며 보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우리 모두가 함께 서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더욱 큰 은혜를 주고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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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용성의 힘
성경 : 눅23:32~38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마지막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형 틀’입니다. 인류 역사 상 인간을 처형하는 갖가지 사형법이 있었습니다. 참수형, 교수형, 단두대형, 총살형 등 ... 하나 같이 비참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다 당한 후 죽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고통도 그에 못지않게 큰 겁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부터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체포되신 후에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불법 재판을 받으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주먹질 당하고, 욕설을 듣고, ...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기다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치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쇠붙이가 살에 박히며 살점을 뜯어내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왕관처럼 만들어 씌운 겁니다. 그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 피범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매달릴 십자가를 몸소 메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장 언덕까지 1km 정도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무게는 대충 60kg 정도로 추산됩니다.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온간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은 계속 가다가 쓰러지고, 채찍에 맞으면 다시 일어나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지금 성지 예루살렘에 순례자들을 위해 기념하는 길을 조성해 놓았는데, 그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난의 길’ ‘슬픔의 길’)라 부릅니다. 맨몸으로 가도 숨이 가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셨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그 언덕 꼭대기가 바로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입니다. 멀리서 보면 꼭 해골같이 생겨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보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둘 다 같은 말입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이고, 갈보리는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라틴어 Calvaria, 영어 Calvary)
  골고다 언덕에 올라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십니다. 본문은 그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마지막 우리에게 최후의 일곱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놀라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고통의 한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그 자체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닌 메시야임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용서’입니다.
[1] 십자가 : 용서의 힘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모습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이 그렇게 죽어야 했나?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조롱했습니다. 35절~37절 보면 백성들과 관원들(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심지어 로마 군병들까지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남도 구원할 테니 먼저 자신을 구원해 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능력해서 그랬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그들을 다 처치할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사들을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왜 묵묵히 참아내셨습니까? 약해서 당한 게 아닙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챔피언입니다. 골목을 지나가는데 그 존재를 몰라보는 꼬마들이 돌을 던지며 놀립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참습니다. 약해서입니까? 한 주먹거리지만 상대가 안 되니까 참는 겁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에게 그들은 전혀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서는 자기 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이 몹시 불쌍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린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 말씀은 ‘단순한 기도 이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끌려와서 십자가 달려 죽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던진 겁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값을 치르지 않으면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심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르고 심판 당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당당하게 아버지께 요구합니다. 죄를 대속했으니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이제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는 예수님이 약함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겁니다. 용서의 힘! 그렇습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용서의 힘입니다! 
[2] 우리가 받을 용서의 힘 : 용서의 은혜
  십자가의 용서의 힘은 우리에게 먼저 용서의 은혜를 받게 해 줍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 죽을 인생이었지만 이제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① 영적인 자유 획득 :
  인간은 죄로 인해 속박을 받고 삽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양심을 갖고 있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엄청 큽니다. 의식하든 않든 양심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오래 전 신문 기사 내용입니다. 일본 시즈오카 縣 후지 市에서 한 은행원이 칼에 찔려 피살되었습니다. 경찰이 수사력을 집중했지만 은행 강도 잡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년 후 48세 된 남자가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그는 직장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는 상태였고 공소 시효도 지났지만 죽기 전에 정리하고 싶어서 자수했다는  겁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었습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차라리 죄값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날 때가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사례지만, 모든 인간이 크든 작든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용서받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32:1~4 (다윗의 침회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간혹 어떤 흉악한 사람은 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양삼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 느끼는 게 아니라 못 느끼는 겁니다. 사람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대번에 “아이고, 무거워!” 합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인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서 그런 겁니다. 이런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아무 느낌 없이 더 큰 죄를 짓다가 마침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앞에 나와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러면 양심의 자유, 영적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나면 평안해 지는 겁니다. 이 영적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자녀의 권세 획득 :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으면 이제 의인으로 인정됩니다.(이신칭의 以信稱義)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섰으니” 예수님의 이름은 죄에서 구원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잘 아시죠. 허랑방탕했던 탕자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용서를 받습니다. 용서 받은 후 그는 어엿한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새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잔치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온갖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 기도하고 응답 받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얻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보장받고 천국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제대로 알면 세상에 두려울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천국 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부디 십자가 은혜로 이런 권세를 마음껏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가 나눌 용서의 힘 : 용서의 실천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의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 은혜를 나눌 것을 요구하십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용서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용서의 실천입니다.

  ① 용서의 실천 이유 :
i)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원한과 증오에 스스로 속박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용서하는 못하는 일로 인해 마음에 응어리를 품고 살아갑니다.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 관한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크리스티 김,『인생의 응어리를 풀어라』, 규장.
  이 책에 보면 저자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불행 12가지를 열거합니다. 첫째,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둘째, 사탄이 틈을 탑니다. 셋째,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다섯째,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일곱째,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외롭게 삽니다. 열째,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누구보다 자신이 큰 손해를 본다는 겁니다. 마치 용서 못하는 것은 마치 금속에 녹이 스는 것과 같습니다. 녹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되지만 방치하면 금속을 다 부식시키는 것처럼 용서하지 못함으로 품는 원한은 인생을 망쳐버립니다.
  오래 전 미국 조지아 주의 한 도시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는 흑인 캘빈 존슨이었는데, 그는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배심원  전원이 백인이었고, 흑인 피고를 의심했습니다. 알리바이를 대도 무시하고 진범으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캘빈 존슨은 애매하게 복역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오. 나는 결코 진범이 아니요. 누명을 벗도록 날마다 기도할 것이요.” 그 후 16년이 지난 후 계기가 마련되어 유전자(DNA) 검사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진범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재심을 위해 법정에 나온 그의 손에는 신약성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무죄를 선고받은 그에게 기자들이 질문합니다. “존슨 씨, 당신을 16년간이나 감옥에서 썩게 만든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보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분노와 증오를 내 마음에 담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죽입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일자리나 구할 겁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얼마나 현명합니까?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 겁니다.
ii)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용서의 은혜를 입은 능력으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 좋다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18:23~35)를 보면 임금과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종이 임금에게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대강 환산해보면 수천억원에 달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임금은 그 종에 불쌍해서 탕감해 줍니다. 여러분, 그 종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좋아하며 길을 가는데, 중도에 동료를 만납니다. 그 동료는 그 종에게 100 데나리온 빚을 졌습니다. 1백만원쯤 된다고 했을 때 그냥 주기는 아까운 돈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은 진노하였고, 그 종을 잡아들여 투옥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iii) 용서하는 자는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축복을 받을까요?
  첫째, 용서하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 집니까? 행복의 요소가 무엇입니까? 소유가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행복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관계가 좋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나빠지기 쉽습니다. 먼 사람은 차라리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원앙 부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원망과 앙심이 많은 부부’랍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가장 가깝고 다정해야할 관계지만 살다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원앙 형제, 원앙 친구도 있습니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요셉의 가정은 행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니까 온 가족이 호의호식해서 그랬나요? 아닙니다. 요셉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후에 그의 형들이 벌벌 떱니다. 혹시라도 복수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한 겁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말합니다. 창50:19~21 “ ...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그 후 온 가문이 화목하고 행복해진 겁니다.
* 용서하는 사람은 건강해집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의 원한과 증오는 독이 됩니다. 그런데 용서하고 나면 독이 제거되고 마음의 평안이 약이 됩니다. 성경이 이를 증거합니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용서하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용서하면 실패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진짜 승리하는 겁니다. 스펄전 목사가 젊은 시절 설교를 했는데, 비판적인 청년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뭘 하고 있었나요?” 순간 그는 당황했습니다.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잠시 후에 하나님이 깨달음 주셔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용서의 힘을 주셨소!” 행7:60~8:1을 보십시오. 스데반의 추호 모습이 나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 ” 스데반은 무능력자가 아닙니다.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 능력으로 승리했습니다. 핍박자 사울을 바울 사도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인해 세계가 복음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승리의 배후에는 스데반의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위대한 승리를 낳습니다. 
  ② 용서의 실천 방법 :

i) 성령 충만 - 용서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하나님의 신, 성령)으로 되느니라”
ii) 화해(용납과 사과) - 용서의 첫걸음은 용납하고 사과하는 겁니다. 용납은 남의 잘못을 받아주고 덮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잘했어도 인간관계란 상대적입니다. 한편에서 100% 잘못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화해가 이뤄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배보다 화해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형편 상 도저히 직접 만나서 화해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이미 죽었거나 멀리 있거나 상대방이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거나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iii) 섬김과 축복기도 - 더욱 성숙한 용서는 화해 이상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삶으로 행함으로 옮겨지는 겁니다. 상대방을 섬겨주고, 축복하며 기도하면 더욱 좋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iv) 끝까지 용서 - 용서하는 것은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한두 번 용서하다 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기껏 용서했는데 상대방이 계속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경우에도 계속 용서할 할 것을 권면합니다. 마18:22 “ ...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 이 말씀은 490번 하라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너무 많지만, 7은 완수로 무한히 용서하라는 겁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일지 모르지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하십시오. 끝까지, 무한히 하라는 것은 ‘한번만 더’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성경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여러 가지 선행을 하고 ...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십자가는 용서의 힘이라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그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힘으로 용서를 실천하십시오! 그래서 누구보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하시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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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헌금십일조예물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칩니다.

 

본문: 요한 1서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인디안 부락에서 선교하는 한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인디안 추장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추장은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선교사님, 주님께서 저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고저 이 사슴 가죽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선교사는 이 말을 듣고 조용히 대답해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슴 가죽을 쓰실 수가 없습니다.』 인디안 추장은 이 말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가더니 얼마 후에 한 마리의 백마를 가지고 와서 또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선교사님, 이것은 이 부락에서 나와 아주 중요한 사람들만 타고 다니는 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선교사는 이번에도 그 말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추장은 뼈로 만든 머리장식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추장의 상징입니다. 나 주장의 권위와 명예까지도 다 주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것마저 거절당하자 추장은 심히 낙심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바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나의 가장 귀중한 것을 다 바쳤습니다. 이제 제 생명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추장의 이 고백을 듣고 선교사는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그 생명을 원하십니다!』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펼쳐서 인디안 추장에게 이렇게 읽어주었습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신앙생활을 잘 하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들에게 헌금 내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500원짜리 동전과 1,000원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헌금하고, 하나는 네가 쓰도록 해라.』

어머니는 아들에게 늘 하나님을 우선으로 말했기 때문에 아마 아들이 1,000원짜리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온 아들에게 얼른 물어보았습니다. 『얘야, 얼마를 헌금했니?』 그랬더니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원래 1,000원을 헌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1,000원을 내는 것 보다는 500원짜리를 내는 게 제 마음이 훨씬 기쁘잖아요. 그래서 500원을 냈어요.』

이 어린아이에게서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기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드리는 것을 혹 사탄이 보고 웃는 경우는 없겠습니까? 헌금에는 정성과 지성이 필요합니다.

 

성경 마가복음 12장 41- 44절 말씀에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남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았도다 저희는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하였습니다.(눅21: 1- 4)

우리는 이 과부처럼 헌금을 할 때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고 아낌없이 바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리라』(고후9:7)

 

영국 정부가 중국에서 크게 전공을 세운 골든 장군을 포상하기 위하여 많은 상금과 직위를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모든 것을 다 거절하고 33회 교전이 기록된 금메달만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요, 그의 역전의 유일한 기록으로 그의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메달을 찾았으나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바에 의하면 흉년이 심하던 해 멘체스터에 보내 그것을 녹여 판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사주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메달을 보낸 날짜에 그의 일기장에는 『이 지상에서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마지막 물건을 오늘 주 예수께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 가장 귀한 부분, 가장 귀한 시간을 가장 귀한 분에게 바치는 것, 이것이 헌신입니다.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는 세상의 명예나 지위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그 무엇도 주님과는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분임을 나타냅시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별을 보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기쁘게 드렸습니다.(마2: 11)

막달라 마리아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막14: 3) 그들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무릇 서원한 것을 갚으려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든지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레 22:21)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51곡 합창은 헨델음악의 최고봉이라고 합니다. 메시야 중 가장 강력하고 절정에 이르는 합창을 보여줍니다. 마땅히 찬양받으실 그 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곡은 요한계시록을 배경으로 하는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는 어린양 예수만이 합당하다고 찬양합니다. 그것은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대신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 가운데 죽을 내 죽음을 대신한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기에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주님께 올려지는 영광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드리고 있습니까?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누군가를 모시고 살아가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와 미래를 위해 그 소중한 것을 어떻게 소비하고 계신지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여러분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받을만한 분에게 드리십시오. 그래야 그것이 가치 있고 빛이 납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그것은 가장 값진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드릴 때 주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찬송가 52장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1. 거룩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천하보다 귀한 생명 값도 없이 베푸시니 주님 위해 나의 생명 아낌없이 바칩니다.

2. 은혜로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가난하고 빈 마음에 하늘 보배 채우시니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 뜻대로 드립니다.

3. 자비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바치는 것 너무 적어 부족한 손 내밀어도 복 주시고 힘 주시니 이 생명도 드립니다.

4.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주님 주신 귀한 사명 우리에게 맡기시니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 위해 일합니다. 아멘

 

1987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에게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그만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집사님은 아들의 피해 보상금으로 200만원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그 가정에서 그 돈은 치료비이자, 지하 셋방에서 1층 전세방으로 옮기는 데 보탤 수 있는 전 재산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전액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장애인이 된 아들을 돈 200만 원에 맡길 순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예배당 건축 헌금으로 이 보상금 전액을 바치며 하나님께 아들의 인생을 맡깁니다.』

이 믿음의 헌금에 감동을 받아 많은 성도가 그 가정을 물심 양면으로 도왔고, 교회에서는 그 아이에게 의족을 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 아이는 신앙 안에서 잘 자라 유명한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분께 삶을 맡기는 이를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에서 건져 주시고, 어려움에 처할 때 도와주시며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자요 목자요 왕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안식과 기쁨과 능력과 소망과 영원한 천국을 주십니다.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무엇이든 아낌없이 드리는 성도가 되십시오.

 

* 기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신 주님,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시고 겸손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교회에 헌금할 때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진하여 즐겨내는 자 되게 하소서. 내 삶 전체를 드리오니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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