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말씀  : 주일오후설교 인생의 등불

 

 


제 목 : 인생의 등불

말 씀 : 잠6:20-23

잠언의 말씀속에서 정말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말씀안에서의 삶이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도 그렇지만 잠언서에서는 말씀을 더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씀에 대하여 지혜나 진리나 율법이나 법도 혹은 법이나 훈계나 명령 등의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지만 모두가 사실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지혜라는 말이 무려 122번이나 나오고, 훈계라는 말이 24번, 법이 8번, 진리가 8번, 명령이 8번, 율법이 4번, 그래서 말씀안에서 살것에 대한 말씀이 무려 176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잠언서가 31장까지 있으니까 한 장에 대략 여섯 번 정도 말씀을 언급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거기에 복이 있고, 거기에 은혜가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3: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즉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그 명령과 규례를 따라 살면 평강과 장수의 복과 아울러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너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는 죽으나 사나 말씀가운데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말씀안에서 살라.(20,21절)

 

1)말씀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20절)

본문 20절을 보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 어미의 법이라고하여 표현은 부모님의 명령과 법을 지키고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명령과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 개인적인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법으로 훈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소위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6:4-9절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엡6:4에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23절에서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명령, 법, 훈계가 생명의 길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빛,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비의 명령을 지키라고 했을 때 지킨다는 것은 [지킨다, 보호한다, 경계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돈이나 향락이나 권력이나 욕심이나 하여튼 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을 앞서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무엇이라고해도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공간에 간직한 다음에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도 말씀의 위치를 빼앗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을 때 떠나지 말라는 말은 [~한 상태로 놓아두거나, 맡겨버리거나, 버리거나, 허락하지 말라는 말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예를 들면 이럴 때 사용한다. 즉 땅을 묵히거나(출 23:11) 농작물의 추수를 보류함으로써(느 10:31[32]) 땅을 버려둘 때, 혹은 동물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때, 먹고 남은 음식이 버려질 때 등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방치함으로써 그 말씀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더라도, 말씀이 아무리 빛이라해도 내가 그 말씀을 좇아가지 않고 말씀 따로 나 따로 있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좋은 음식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리 좋은 차라도 내가 이용하지 않고 들 한가운데 방치해 둔다면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꼭 기억하자.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상황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이성이나 향락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만들지 말라.

그리도 말씀을 방치해두지 말라. 말씀은 그저 교회속에서나 있고, 말씀은 성경책속에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일상적인 모든 삶속에서 말씀이 나와 가장 가깝게 만들라.

 

2)말씀을 목에 매고 살라.(21)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에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말씀을 지키고 떠나지 말라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화된 말씀수호 명령이다. 그렇지 않은가? 새긴다는 것은 말그대로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철필로 새겨 넣으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 공모하다]는 의미로 완전히 말씀과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묶여져서 절대로 떠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 목에 매라고 하셨는데 목에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겉으로 완전히 들어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너와 함께 있음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가 그 말씀을 떠나지 않게 되고 범죄의 유혹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울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에게 들었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옆에서 갑자기 어떤 차가 끼어 들었다. 깜짝 놀라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겨우 접촉사고를 면하기는 하였지만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다시 옆차선으로 가서 그 차옆에 대고는 [야! 이 놈아, 운전 좀 똑바로 해]!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운전석앞에 성경책이 놓여 있더란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추고 얼른 성경책을 치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심령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데는 외적인 요인들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행동들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외적인 요인들이 내적인 것을 통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양복을 쫙 빼 입었을때와 작업복을 입었을때의 행동이 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모두가 행동이 제멋대로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사실 교복이나 제복도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학생들도 아무래도 교복을 입으면 그 교복이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게 만들며, 군인도 멋진 군복을 쫙 빼 입으면 웬지 걸음걸이도 절도 있게 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목사도 제복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나 승려는 제복이 있어서 언제어디서나 그 제복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 스스로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을 의식해서라도 아무래도 행동에 조심을 하는데 목사는 별도의 제복이 없어서 때로는 행동이 너무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말씀을 목에 매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너의 목에 매달고 다님으로써 그 말씀으로 너의 행동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더욱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말씀을 목에 달고 다닌다고 해서 성경 말씀을 적어서 목걸이처럼 매고 다니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너를 보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그런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새기고, 마치 목걸이를 목에 다님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의 생활을 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2.말씀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23절)

본문 23절에서는 말씀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 곧 빛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율례를 말하며, 법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말씀은 이웃 사랑에 대한 포괄적 말씀으로 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마5장에 나오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등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하나님의 명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 모두가 곧 등불이고 빛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삶에도 등불이요, 빛이며, 인간의 세부적인 삶의 모습들에 있어서도 역시 등불이요 빛이아른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만이 인간의 모든 영역을 환하게 비춰주어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다. 유일한 빛이다. 완전한 빛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밝혀주는 유일한 빛인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살아숨쉬면서 활동하는 개개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역시 빛이요, 등불인 것이다.

이것은 같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며,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개개의 삶을 통제하고, 인간 개개의 삶을 인도하는 빛이라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매우 둔감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맞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렇게는 인정을 하지만 어떤 구체적인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면 그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나의 생각이나 나의 경험이나 나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되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마6:33절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세상의 것들로도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그것을 인정을 하면서 막상 어떤 구체적인 상황속에서는 어떤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것이 과연 나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될 인가, 세상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할 때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하는 등등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말씀이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은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말씀을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는 유일한 빛이니까 오직 그 말씀따라 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만이 모든 인간의 모든 영역을 비춰주는 진정한 빛이니까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이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빛이니까 그 빛을 따라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3.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릴 은혜(22절)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누리게 될 은혜에 대해서는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례이다. 그러니까 말씀안에서 말씀을 지키며 떠나지 말며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고 다니는 사람은 말씀이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은 이끌다, 인도하다, 안내하다는 의미로 말그대로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의 삶을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준다는 말이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라. 무엇이 나를 인도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것인가? 도적이 나를 인도하면 도적이 된다. 사기꾼이 나를 인도하면 사기꾼이 된다. 마귀가 나를 인도하면 나는 어둠의 사람이 된다.

물론 말씀을 마음판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말씀이 나의 생각을 통제하고, 나의 말을 통제하고, 나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나를 인도하여 나는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보호한다는 말은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간수)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를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셔서 우리를 거짓과 어둠과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이 지켜준다는 것도 역시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인도한다는 말씀과 대동소이한 말씀이겠지만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하는 것이 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나를 지키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된다. 진리가 나를 지키면 나는 진리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악한 것이 나를 지키면, 거짓이 나를 지키면, 어둠의 세력이 나를 지키면 나는 보나마나 어둠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 비록 선한 것이 나를 지킨다해도 별로 힘이 없는 것이 나를 지키면 그것도 별 것 아니다. 아무리 선하다해도 힘이 없으면 자기보다 더 강한 악이 덤벼들면 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키면 혹은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지키면 나는 가장 선한 길, 완전한 진리의 길, 완전한 생명의 길로 안전하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닐 때, 잘 때, 깰 때는 꼭 문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닐 때, 잘 때, 깰때는 인간의 삶의 모든 행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을 간직하고 말씀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을 간섭함으로써 그 삶을 인도하고 보호하며 은혜의 길로 안내해 준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은 오직 유일하고도 완전한 생명의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어떤 것이 유혹을 하고 공격을 해온다고 해도 빼앗기지 않도록 마음판에 잘 새겨넣고, 그 말씀들이 항상 우리 안에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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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하나님을 신뢰하면

 


 
제목 : 가장 안전한 길

말씀 : 잠3:5,6

 


사람이란 어차피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젊음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하튼 나는 그냥 내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참람한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련한 중에 미련한 인생이요, 불쌍한 중에 불쌍한 인생이다. 그까짓 주먹이 세면 얼마나 셀까? 오래가면 얼마나 오래갈까?

대통령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라야 고작해야 5년인데 5년 임기가 끝남과 함께 그가 의지하는 것도 사라진다.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돈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돈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나 과학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다. 가장 큰 능력 자, 가장 지혜로운 자, 가장 사랑이 충만한 자, 가장 인자한 자, 가장 영원한 자 이런 자를 의지해야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1.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오늘 5절 말씀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가장 복된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인가?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依賴하여야 한다.

본문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풀어 말한다면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중심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 어느 한 영역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성, 우리의 육체, 우리의 능력 등 하여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총동원하여 그 어느 부분이라고 빠짐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떤 영역을 남겨놓고 어떤 부분은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하면 이것은 무언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는 온전한 믿음의 관계속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오류속에 살때가 많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감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인 것과 이성적인 부분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긴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아무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과 시대의 흐름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그야말로 갓난아기가 하나님만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이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자.

2)人間에 대한 信賴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너무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마6: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지식이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다. 하나님은 권능자이시지만 인간은 약하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도 깊이 되새기며 나보다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3)凡事에 하나님을 認定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 말씀도 정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정말 깊이 묵상해보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범사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과연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말을 따르는가?

여기서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이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어가야 할 모든 길, 인생항로의 전체, 인생길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안다면 그 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말 이해하는가? 이 사실을 정말 아는가? 정말 인정하는가? 그러면 맡기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깨닫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자.

범사라는 말을 다시한번 주목하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우리는 범사에 그를 올바르게 알고 오직 그 뜻만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하나님을 依賴하는 자가 받는 福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하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다.

여기서 지도하다는 말은 「평탄하게 하다, 곧게하다, 똑바르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 능력, 경험, 이성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평탄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것들을 평탄하게 하셔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현실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똑바르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전지자이시다. 사랑과 능력의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 그 분만이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자.

우리의 알량한 명철도 의지하지 말라. 경험도 의지하지 말라.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한 것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을 의지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지하라.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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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

 

 


제목 :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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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섬기는자의 자

 

 


제목 : 섬기는 자의 자세

말씀 : 엡4;11-16

 


1.제직의 의미

제직이란 교회의 직원을 가리키는 말로써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전도사, 장로, 안수집사, 서리집사를 제직이라고 부른다. 그중에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항존직이라고 부르며, 전도사나 서리집사는 임시직이라고 한다. 제직 중에 목사와 전도사를 교역자라고 하며, 제직이라 하면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제직이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을 말한다. 즉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게 하기 위하여 각각의 달란트와 사명을 따라 직분을 맡겨준 사람들을 말한다.

에베소서 4:11-12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붕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기록된 말씀은 교회 직분의 주된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말은 일이나 사람을 자신의 위치에 올바르게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로 교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존재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인도하며, 보살펴서 완전한 성도를 만들어주는 것을 말한다.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하여 교회와 가정과 사회를 위하여 보상없이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 제직이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제직의 삶이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자는 결코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직위가 아니다. 무슨 서열이나 계급이나 신분을 나타내지 않는다. 도리어 교회의 직분은 종의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를 말한다. 그래서 집사(deacon)라는 말은 일꾼(minister) 또는 종(servant)을 뜻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Diaconsos)에서 왔다. 즉 종과 같은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받은 직책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집사 땄다. 장로 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집사, 권사, 장로가 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두렵고 떨림으로 맡아야 할 것이 교회의 직분이다. 그야말로 종으로 섬기기 위하여 맡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직분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 물론 이것은 직분자들만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래야 한다. 교회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이 세상 가운데서 따로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면 마땅히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2.제직의 정신적 자세

(1)청지기정신을 가져야한다.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을 맡아 주인의 지시대로 그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영어로는 스튜어드(Steward)라고 하는데 이것은 집사, 청지기, 사환, 여객 계원, 접대역, 간사 등을 의미한다. stewardess는 여객선·여객기 등의 여자 안내원을 말한다. 요즈음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이 굉장히 인기가 있고, 경쟁률도 높다고 하는 본래 그 의미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썩 명예로운 직업은 아닌 것이다.

어쨌든 교회의 제직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교회의 청지기로써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곧 제직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청지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인 우리는 언제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져야 한다. 내 뜻을 관철시키고 내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청지기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야 한다. 청지기란 직분 자체가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므로 먼저 주인의 일을 생각하여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개인적인 이익과 안일함과 욕망을 앞세운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창 1:28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마 24:45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2)충성을 다해야 한다.

청지기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충성심이다. 신실함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어도 충성심과 신실함이 없으면 청지기로서는 부적격이다. 청지기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맡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일차적인 자격은 주인을 위한 충성도인 것이다.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주인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자만이 주인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고, 주인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다.

*마24:45-51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고전 4:1,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청지기들은 주인이 있든지 없든지,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어떤 상황가운데서 충성스런 개처럼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자이어야 한다.

(3)감사와 기쁨으로 일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중학교때 일인데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부르더란다. 그래서 내가 무얼 잘못 했나하면서 교무실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도시락 가방을 주면서 집에 갔다놓으라고 하였단다. 그런데 그 날 뿐이 아니라 매일 학교에 갈때에도 선생님의 집에 들러서 도시락을 가져다 교무실에 들어가 선생님 책상위에 놓고, 집에 갈때는 또 교무실에 들러 선생님의 도시락을 가지고 선생님집에 갔다 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사실을 잘못된 일이고, 그것을 시킨 선생님도 그다지 잘한 일은 아닌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신이 나더라는 것이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집과 교무실을 매일 드나들면서 선생님의 도시락 가방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게 생각을 했단다. 물론 요즈음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당시로는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여겨진다. 그때만해도 선생님하면 정말 하늘처럼 여겨지던 시대니까. 그런데 그 하늘 같은 선생님의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니다니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사실 만약에 지금 대통령이 불러주어 대통령 가방을 들고 다니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늘 대통령 가까이 있어서 대통령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입장에 있다면 비록 종의 입장이긴 하지만 아마 대부분은 어깨에 힘주며 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우리는 어떨까? 말그대로 하늘이신 하나님이시다. 무한히 영광스럽고, 무한히 크시고, 거룩하시고 지존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이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청지기가 된 우리는 얼마나 무한한 영광인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에 이보다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 주셨고, 생명과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은 본질적으로 감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받은바 은혜가 이같이 클 진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진정 감사함이 있을진대 어찌 기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골 2:6 -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4)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당신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당신의 피로 우리의 생명을 사신 것이다. 그러면서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고 하셨고,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곧 생명의 역사는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세상의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형태로든 헌신을 통해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세상속에서 생명의 역사, 진리의 역사를 이루려면 주님앞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우리의 헌신은 시간, 물질, 재능, 육체 모든 것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요 12: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마 16:24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5)봉사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맡은 자들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한다.(벧전4:1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셔서 이 우주만물을 맡기셨다. 그중에 특별히 우리를 부르시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충성스런 봉사를 통하여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봉사란 말그대로 대가없이 일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보상을 바라고 일하는 것은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받은바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죽도록 충성해도 그 은혜 다 갚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하는 것이다.

*고후 9:11,12 -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엡 4:11,12 -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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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 거듭남의 의미

 

 


말씀 : 요1:9-14

제목 : 거듭남의 의미

오늘부터 오후예배 시간에는 어떤 주제를 택하여 시리즈로 설교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주일오후에 살펴보았던 사도행전의 말씀들은 수요밤예배로 옮겨 계속 강해를 실시할 것이다. 왜 이런 결정을 하였느냐하면 우리가 전도에 대하여 살펴보며, 또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대하여 늘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은 거듭남에 대한 체험이며,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은혜와 기쁨과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전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거듭남을 체험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지만 그러나 몇분의 초신자들도 계시고, 교회생활 오래하였지만 아직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신 것 같아 거듭남에 대하여 몇시간 동안 말씀드릴 때 아직 체험하지 못한 분들을 이번 계기를 통하여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기를 바라고, 이미 체험하신 분들은 더욱 확실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논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그 중에서 어떤 곳에 보니까 개신교인들은 그래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천주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얼마 안된다는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대한 천주교인들의 답변은 자신들이 선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천국에 간다고 장담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보내고 안보내고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들은 그저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신교를 비판하기를 개신교인들은 행동에는 별 관심이 없으니까 쉽게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행동은 하지않고 자기 나름대로 믿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여 구원얻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교만이라고 반박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 천주교인들이 말하는 것에도 일리는 있다. 진정한 믿음이란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반박이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자기가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소리에 현혹되지 말라. 오히려 천주교의 주장이 교만이고 불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겸손인 것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교만이요, 동시에 불신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확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100% 완벽하게 그대로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신이고, 교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거듭남이란 물론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론 육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지식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났다고하는 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에 대하여 보다 확실한 의미를 살펴보려면 요3:3절의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a[nwqen(아노덴)은「위로부터, 처음부터, 다시, 새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말은 위로부터 났다. 처음부터 새로 났다. 새롭게 태어났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의미는 위로부터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라는 것은 물론 하늘을 가르키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므로 결국은 위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듭이라는 말속에 이미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났다는 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사람의 지혜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도덕적 삶이나 종교적 철학적 사색이나 탐구나 수양이나 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물질적 기여나 혈통적 계승에 의해서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이견도 필요없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은 너무나 많다.

요1:12,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보라!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혈통으로 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적 혈통적 관계에 의하여 거듭남이 계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정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말은 이성에 대한 것이든 물질에 대한 것이든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것이든 여하튼 어떤 것이라도 세상적인 욕망에 의하여 거듭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사람의 뜻으로나 나지 않는다는 말은 말그대로 종교적이든 아니면 철학적이든 아니면 윤리적이든 그 어떤 것이라해도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하여 구원의 은총이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명히 못 박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거듭나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물질적, 학문적, 지식적, 도덕적, 윤리적 의지나 노력이나 수양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엡2:8,9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거듭남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의 역사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것은 절대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와 선행과 철학적, 종교적 수양으로 되어질 수도 없고 되어져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보면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해석할만한 구절들이 몇구절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야고보서 2장이다. 예를 들면, 약2: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마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들은 일견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천주교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행위구원 혹은 공로구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야고보 2장에 대해서 보자. 야고보서 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배경을 보아야 한다. 이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1:1절에 있는 바와같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외적으로 많은 핍박에 직면해 있었고, 내적으로는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저 형식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믿는다고 여기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유대교의 형식주의, 율법주의, 외식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그런 형식적 신앙생활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다면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거기서 말하는 행위가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100% 완벽하게 선하게 옳게 바르게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이 말씀은 진실로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사람다운 행위를 위해 힘써야 하고 또 그 결과로써 어느정동의 믿음의 행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 말씀이 100% 완벽한 행위가 없다면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면 이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태초부터 세말까지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기에 심각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더 심각한 것은 만약 그런 의미로 씌였다면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100% 완전한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완전히 성화가 되어 완전한 행동을 행해야만 거듭난 사람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만약 거듭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천국 갈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믿으며 구원받는다는 말씀들도 공수표가 되고 말지 않는가?

그러니까 오해해서는 안된다. 야고보서에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하였다하여 이것이 100% 완전한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정말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가능한 최대한 실천하며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때에 어느정도의 믿음의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마7:21-23절의 말씀도 잘 읽어보라. 이것이 정말 100%행함이 없는 자들은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주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마7:15절 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주신 말씀이다. 거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시면서 겉으로는 믿는 자인체하고 더 나아가 선지자 노릇까지 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뒤로는 불법을 자행하며 다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22절에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기서 말하는 것도 역시 거짓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불법이란 우리가 나름대로 잘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주님뜻대로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그래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진실로 살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잘못하고 또 때로는 죄를 짓기도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행하는 불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설령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도 실제로는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그 주님의 뜻을 따를 의사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진정 주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으니 설령 겉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니 결국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고해서 이 말씀을 곡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100%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석한다면 역시 천국에 갈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말씀을 번복하는 것이 되게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무효하게 만드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라. 예수님께서는 분명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는가? 더구나 100%믿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물론 진짜 믿음에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100%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얻는 믿음은 100%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대속의 죽음, 그분의 부활을 통한 구속의 은총, 그리고 그분의 다시오심, 그로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가운데서 하나님앞에 엎드리며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 뜻대로 살기를 힘쓰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듭남의 의미와 그 방법을 되새겨보며 진정 구원의 확신가운데 살자. 우리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나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믿고,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그래서 그를 믿는 자엑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주어졌음을 믿고, 그래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 혹은 우리가 그분앞에 갈때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것을 믿지 않는가?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든 믿음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약속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온전히 믿으며, 믿는 자은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더욱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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