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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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
여기 주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두 젊은 믿음의 종들이
거룩한 혼인을 하기위해
영굉 스러운 자리에 섰나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주님과의 사랑을 고백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복된 가정을 이루려고
거룩한 성전에 서있습니다..

그동안에
경건하게 선하게
자라개 하시고
신랑과 신부로 만나도록
섭리 해주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여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되게
키워 주신 자상한 배려에
감사로 경배를 드립니다.

앞으로 결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형통하고 평탄한길 가게 하소서..

이들의 가정에
복을 주실뿐 아니라
넘치는 복을 받아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마르지 않는 축복의 샘터가 되게 하소서.

사는 날 동안
영적으로 더욱더 성숙케 하시고
내면이 주님과 같이 부드럽게 하시고
관용하며 온유한 가정이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깊은 신앙도 주시옵소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는것이
어렵고 힘든일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
말씀에 뿌리 깊은 삶을 살아
속사람이 강건하게 하시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여
몸을 주심같이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행복하고 은혜로운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평생에 육체의 강건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지혜로 명철로 인도하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히시고
진리의 길로 바로 인도하는 가정이게 하소서..

주의 나라를 위해
거룩한 도구들로
힘있게 쓰임 받게 하시옵소서

앞으로 이가정에
훌륭한 후손들이 많아지게 하시고
덕스러운 일이 계속 일어나게 하시고,
이 사회 이 민족을 위해 공헌하며
봉사하는 창조적인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가정을 세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
신랑에게 책임감있고 사려 깊으며
평생토록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축복을 많이 받는 사람이게 하소서...

신부는 진리안에서
지혜롭고 현숙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덕스러운 아내가 되도록 도우시옵소서,

어느곳에 살던지
누구를 만나던지
부부가 연합하여 손을 펴서
궁핍한 자를 돕게 하시고
약하고 억눌리고 의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님의 싱정으로 뭇영혼을 섬기게 하소서..

사랑의 하나님
이 가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가
널리 전파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이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셔서
이들이 맺은 언약을 순결하고
변함 없는 애정으로 지켜가게 하옵시며,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으니
이제 성령을 두 사람에게 보내시어
이 거룩한 장소에서 맺은 약속이
평생동안 지켜질 수 있도록
다스리시며 도와주옵소서.

이제 이 두 사람 속에
당신의 사랑을 닮은 청순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내시어
이 험악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사랑의 힘으로써 이기고
남음이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동안 경건하고 선하게
키워주신 부모님들께
효도하게 하는 가정이게 하시고
부모의 은혜를 잊지않고
기억하게 하시 옵소서..

오늘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모든 하객들에게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소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한 두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와
부모님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주님 이제
이 두사람 한몸되어
세상으로 나갑니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거친 바람 막아주는
큰 산처럼 다소곳이 서있게 하시고
가만히
고요히
모든일들을
주님 손에 올려 드리는
기도의 가정으로
우뚝 서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가정에
온갖 보화가 가득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하소서.
.
늘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복된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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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주일 예배 대표 기도문

 

언약을 은혜로 이루어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믿음이 연약함에도 예배를 통하여 만나 주시고 위로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자를 기뻐 찾으시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의로 세워주시고 새 생명으로 살려주셔서

아름다운 예배를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의 날 거룩한 자리에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고 찬송의 입술로 드리는

예배를 열납하시어서 우리 형제 자매들의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시옵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심령으로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함으로 피곤한 육신이 치유 받는 예배의 시간이 되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불순종을 자각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죄악을 회개하게 하시옵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게 하시어서 정결한 마음으로 겸손과 감사가 넘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찬양을 하게 하시옵소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제 몇일 후에 우리 민족의 명절이 설날이 다가옵니다.

민족의 설날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우리들이 부모 형제들에게

서로 인사하며 우애를 나눌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혼탁하고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설날의 명절을 통해

서로 하나 되는 가족이 되게 하시고 화평한 가족들의 만남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월절 주님의 보혈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주신 것처럼

이 설날에 잘못된 형제 자매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의 만남에서

가정의 평안을 찾게 하시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말씀에 따라 사는 가족이 되게 하시옵서.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나라를 치리하는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게 하시옵고,

이웃 일본은 아직도 침략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문제를 일으키고 있사오니

저들의 만행을 잠재워주시옵기를 간구합니다.

이 복잡하고 혼란과 혼돈이 가득한 이시대에

청년들의 생각과 마음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아름다운 심령으로 거듭태어날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아멘으로 읊조릴 수 있도록

믿음의 귀를 열어주시옵고 물위를 걸으라 명하신

예수님 앞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물 속에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의 모습이 아닌 오직 위만 쳐다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시옵소서.

비록 연약한 모습이지만 믿음으로 굳게 세워지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 뜻을 깊게 알게 하시고 더욱 큰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일에 크게 쓰임받으시는 아버지의 종이오니

필요한 건강과 지혜와 능력으로 덧입혀 주시어서

우리 모든 양들을 이끌고 가시는데 부족함이 없는

목사님으로 세워주시옵소서.

 

오늘 찬양과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심신의 위로와 용기를 얻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고

육신의 병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한 형제 자매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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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신년감사예배설교 / 교회가 서야 할 자리(딤전3:14-16)

 


제목 : 교회가 서야 할 자리

말씀 : 딤전 3:14-16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개체이든 집단이든 간에 각각 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구분되는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높은 도덕성과 풍부한 감정, 그리고 지적인 능력과 영적인 요소등이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가지고 있는 지정의라고 하는 인격적인 요소들과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영적인 요소들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요소들중에 어떤 한 요소들이 결여된다면 참다운 인간으로서 누려야 가치와 의미를 온전히 누리기는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도 역시 똑같습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올바르게 할 수 있으며, 교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누려야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이란 여러번 말씀드린바 있지만 외적으로 근엄하다거나 단정하고 깨끗하고 장중한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이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물론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었기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사상과 다른 목적과 다른 가치와 다른 사명과 다른 삶의 양식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 존재하는 목적이나 해야할 사명이나 살아가야 할 모습이나 가져야 할 목표가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어떤 공동체들은 영리가 그 목적이자 사명입니다. 또 어떤 공동체들은 친목이 그 목적입니다. 또는 지식의 전달이나 혹은 인격의 수양 혹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집단도 있고,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세워진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영리도 아니고, 친목도 아니고, 자선사업도 아니고, 질서유지도 아니며, 지식의 전달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격의 수양도 아닙니다. 교회의 목적은 죄가운데 빠진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인간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영혼이 누려야 할 참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어지면 결국은 세상의 다른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영리라든가 친목이라든가 질서나 자유, 자선사업등등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서 세상의 다른 공동체들과는 다른 인간 구원의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떤 기초위에 서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사실은 그 자신의 존립조차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겉모양이 그럴듯해도 기초가 든든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너져 내립니다. 아무리 높이 높이 쌓아 올려도 기초가 분명하지 못하면 곧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작업을 해도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하면서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도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초를 제대로 하지 않고 모래위에 지은 집 같이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해 놓으면 쉽사리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비유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기초가 잘 잡혀 있어야 합니다. 공부도 기초가 잘 잡혀 있어야 하고, 인생도 어릴 때부터 기초를 잘 닦아 주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잘 되어 있어야만 어떤 상황이나 조건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참된 가치를 누리며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의 기초는 무엇이겠습니까?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3장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23절에서는 교회를 가르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으며, 오늘 말씀에서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영과 육과 정신에 있어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완전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위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교회는 무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떠난 교회는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 공동체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교회는 모래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진리의 말씀위에 터 잡지 않은 교회는 앙꼬없는 찐빵이요, 태양없는 지구요,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이요, 단맛을 잃어버린 설탕이요, 구멍난 풍선이요, 김빠진 콜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 선생은 그의 불후의 명저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진정한 교회의 으뜸가는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우리가 비록 무지렁이 같지만, 우리가 비록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벧전2:9에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세상속에서 빼내심을 받고 구별된 백성입니다. 비록 연약하지만, 비록 정말 하나님앞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때도 많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거룩한 사람들이요,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똑똑해서, 거룩해서, 선하고 의로워서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나약하지만, 미련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편에 속해 있고, 진리에 속해 있고, 그래서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로 다짐하고 소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귀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큰 영광으로 채워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별된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기초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따를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의식속에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하니까, 의롭지도 못하니까, 거룩하지도 못하니까,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주로 아내는 질문을 던지고, 남편은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여보 여보, 오늘 김집사님이 입고 온 그 멋진 새옷 보았어요? 아니. 그럼, 이집사님이 입고 온 그 밍크 코트는요? 아니. 그럼 성가대에 앉아 있던 박집사 얼굴 화장이 이상하던데 그것은 보았지요? 아니. 그럼 목사님의 넥타이가 삐뚤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보았어요? 아니. 오늘 목사님이 찬송 부를 때 음이 엉망이었죠? 몰라. 그러자 아내는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당신은 교회가서 그런것도 못보고 도대체 무엇을 보고 왔단 말예요? 나! 목사님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고 왔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올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새해 첫날 KBS 아홉시 뉴스를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정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경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그리고 한참 있다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뉴스가 끝난 다음에는 스포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올해에는 경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국민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하여, 의욕을 주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위하여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뉴스를 들으면서 대단히 서글펐습니다. 좋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다 입니까? 그게 정말 인간을 참다운 인간이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정말 인류에게 온전한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입니까? 그것이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참되고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가운데 참다운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축복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것이 그들이 한계니까요. 그것이 죄가운데 빠진, 무지 가운데 빠진 우리 인생의 어리석은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그런줄 번연히 알면서도 저는 정말 서글펐습니다. 언제나 저 텔레비젼 뉴스에서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언제나 저 공영방송에서 참된 진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언제나 저 아홉시 뉴스에서 인생의 참된 생명의 문제에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정말 아쉬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텔리비젼 너무 많이 보지 마십시오. 보시더라도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보십시오. 그것을 보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돌아가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분별하며 보셔야 합니다.

저는 가끔 방송을 보다가 또 한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공영방송에 무슨 그렇게 잡다한 연예인들 이야기가 판을 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호화판 쇼나 춤판을 벌리고, 주연상이니 조연상이니 올해의 톱 가수니 하면서 휘황찬란하고 요란맞게 난리를 치는 것을 보면 저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우리 인간의 삶에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불만인 것은 그렇다면 이 사회 각 계층에서 그 만큼 공헌 안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농민들만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에 공헌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 농민들이 그래 그까짓 연예인들에 비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농민들을 위한 행사는 그렇게 호화판으로 화려하게 해주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또 연예인만 못하단 말입니까? 아니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들만 못하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올바른 가치와 목적을 알 수 있고, 그래야 온전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롬12:2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세상이 돌아가는대로, 세상 풍조를 따라 휩쓸려 다니다가 보면 결국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둠의 세력들에게, 사단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터위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엡6:14에서는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4:24에서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6:7에서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전당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진리의 터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진리의 터위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의 터위에 굳게 서서 교회는 이 세상에서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공동체도 이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젼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경찰도 이 진리를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국회에서도 정당에서도 다른 어떤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에서만이 거룩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직 거룩한 무리들인 저와 여러분만이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서지 않으면 우리는 줏대없이 이리저리 세상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기둥으로 버티어져 있지 않으면 마귀사탄의 공략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지 않으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터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심지어는 아무리 사랑이 넘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없이도, 하나님없이도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없이도 얼마든지 재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없이도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 없이도 화려할 수도 있고, 인격수양도 할 수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랑도 하고, 부귀영화도 누리고,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기도 하고, 인생을 나름대로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 누각입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입니다. 환난과 풍파가 몰아 칠 때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세상 끝날 주님의 심판대앞에서 그것들은 아무런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것들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거룩한 백성들은, 우리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들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의 기초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 온혜교회는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세워져야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온혜교회의 1999년도 표어는 「진리의 터위에 굳게 서는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거룩한 성도는 거룩한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성도인 우리는 성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함과 동시에 그 권리를 올바르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우리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삽니다. 그럴때만이 이 또한 이 사회가 삽니다.

올 한해는 정말이지 나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진리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의 기둥과 터인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세워지는 우리들 모두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저와 여러분과 우리들의 가정과 우리 온혜교회가 이 지역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참으로 은혜와 기쁨과 참된 생명의 풍성함이 넘치는 축복된 삶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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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을 지킨 생활
본문: 디모데후서4:6-8

회갑의 의미 - 사람의 장수를 기념하여 축하하는 잔치를 수연 이라고 하는데 61세 되는 돌을 가리키는 말을 환갑, 회갑, 화갑, 주갑 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은 내가 부음이 되고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였으니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1.건강을 지킨 것을 감사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재주와 뛰어난 역량이 있어도 몸이 약하면 재주와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없습니다. 건강이라는 복을 받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자기 직책을 감당할 만한 튼튼한 몸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숙자 권사님을 사랑하셔서 지금까지 건강의 복을 주셔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사회에서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2.필요한 사람으로 산 것을 감사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사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같이 살고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세종류의 인생이 있다고 합니다.하나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둘째,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 그 다음은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정숙자 권사님은 믿음의 가정에 태어나셔서 결혼하여 충청도 양반 중에서도 양반이신 이규홍 총각과 결혼하시고 그를 믿음으로 이끄셔서 도안제일교회 안수 집사님이 되게 하는 일에 밑거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슬하에 두 남매를 두셨으나 역시 믿음으로 잘 기르셔서 결혼하여 좋은 가정을 이루고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60평생이 헛되지 아니하고 참으로 필요한 자리에서 필요하게 열심히 사셨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선한 싸움을 싸워 이긴 것을 감사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자만이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회갑을 맞으신 정숙자 권사님은 어려울 때나,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꾿꾿이 믿음을 잘지켜 오늘까지 이르게됨을 감사드립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깥으면 60까지 산것만도 대단한 장수 였지만 요즘은 인생은 60부터라고 해서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건강을 지켜주시고, 필요한 사람으로 살게하시고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게 하심을 감사하시면서 앞으로 남은 모든 인생노정도 더 아름답게 마무리 하시기를 축원하오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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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대강절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 절기별 설교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Epiphany),사순절(Lent),오순절(Pentecost),대강절(Advent) 등이 있으며,그 중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절기는 대림절 또는 강림절로도 불리는 대강절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탄절을 4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待降節)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그 '오심'(降)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번째 의미 즉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나신,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현실이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이 그렇게 쓰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천년 동안은 그러한 뜻으로만 지켜 왔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典禮用語)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사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의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의 합성어로서,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실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이러한 점에서는 재림에 더 무게가 실리고,오심의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실에는 해당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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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설교. <새벽을 깨우리로다> | 절기별 설교

 

시편 46:1~7, 57:8

요즘에 우리 기독교 교회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하게 듣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Again 1907"입니다. 이 말의 뜻은 1907년에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한국 교회의 첫 번째 부흥 역사가 있은 지 금년이 1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그러한 부흥 운동이 100년 만에 또 다시 이 땅에서 일어나도록 하자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은 100년 동안에 꾸준한 성장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었고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교회 성장 보다 많은 신자의 수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선교 국가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가장 위험했던 때는 핍박의 때가 아니고 교회가 부흥되었던 때였습니다. 부흥된 교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교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내리막길을 걸었습니다.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이 핍박의 시기에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교회를 다니려는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었지만 권력의 보호 밑에 있을 때는 오히려 신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던 역사를 기억합니다. 또 교인들이 가난했을 때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GNP 1만 불에서부터 교회 부흥이 멈추기 시작하더니 GNP가 2만 불이 되면서부터 서구의 교회들은 급격하게 교인들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서구의 그 많은 교회들은 관광용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예배당들은 교인들이 가난했을 때 헌금해서 건축한 교회들로서 교회 건축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한지 유럽 여행하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럽 여행의 대부분이 예배당 건축물 역사를 보러 가는 관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성전을 건축할 때보다도 비교가 안 되는 부유한 생활들을 하면서도 선조들이 가난했을 때 건축한 교회에 다니지도 아니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텅텅 비어있는 그 장엄한 예배당은 관광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허다합니다. 대한민국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절대 없기 때문에 "Again 1907"을 외치면서 이 나라에 영적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주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구약 성경 가운데 있는 40명 왕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셨던 왕, 다윗 왕과 히스기야 왕 때에 쓰였습니다. 시편 46편은 히스기야 왕의 통치기간 중에 생긴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던 것을 노래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의 도움은 새벽에 나타날 것을 조명했습니다. 또 57편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아굴람 동굴 속에 숨어있을 때 고백한 시입니다. 사울이 3천명의 정예 부대를 풀고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그를 찾아다닐 때 아굴람 동굴 속에서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고 하나님의 구원이 새벽에 나타날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Again 1907"을 외치는 우리는 어떻게 1907년에 그러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음의 시작은 지역적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복음을 들고 최초로 찾아온 것도 대동강이며 교회들이 처음 세워진 곳도 평양이고 최초의 신학교도 평양에 세워졌습니다. 1907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 전 1906년 평양에서는 한국 교회의 새로운 영적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새벽 기도 운동인데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영적 사역입니다. 장대현 교회의 길선주, 박치록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새벽에 나가서 기도합시다래." "그러지요. 나오시오." 그래서 둘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본 다른 집사님들, 교인들이 "아니, 두 분이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시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우리도 나가자." 그래서 장대현 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거룩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웃 교회가 무엇을 잘하면 샘이 나서 못 견딥니다. "우리도 하자."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경쟁적 새벽기도가 1906년에 이루어지더니 일 년 후인 1907년에 대한민국 최초의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고 대한민국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gain 1907"을 원하는 영적 운동은 바로 새벽 기도의 회복이라고 판단이 되었기에 금년 갈보리교회의 표어를 "새벽을 깨우리로다." 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객관성 있는 이유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종교성! 우리 한국인들은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니까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쉬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그 당시 조선은 주변국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환경이 서구 사회에게 어떤 구원의 기대감을 갖는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이 땅을 찾아온 서구의 선교사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고 하는 사회적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과거 종교로부터의 실망감입니다. 당시 불교와 유교의 나쁜 형향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어려움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한 암흑기에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자기의 모든 소원이나 억울한 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오게 되었다는 객관적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외부적인 조건으로 분명히 도움은 되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한국 교회 부흥의 첫째 이유를 저 같은 목회자에게 묻는다면 세계 어떤 나라 어떤 교회도 하지 않은 영적 운동인 새벽 기도 운동이 한국 교회 성장에 가장 기초적인 밑거름이 되었다고 답변합니다. 대한민국 교회와 같이 이렇게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세계 어느 교회를 다녀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않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세계 교회의 역사의 성장 기록에 유래 없는 기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성경에서 밝힘으로 2007년 이 해가 "Again 1907"이 되도록 방향을 잡아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에게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인간 구원 사역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파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마태복음 4장 17절에 보면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비로소" 라고 하는 이 말은 그 전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였다."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말로서 '비로소' 하시기 전에 하시던 일을 살펴보면 됩니다. 바로 40일 금식기도였습니다. 예수님도 금식하고 기도하신 후에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라는 순서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무장을 하신 후에야 비로소 복음 전파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보면 제일 먼저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는 법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찬양하는 기술을 가르쳐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지혜는 기도문까지 작성해서 가르쳐 주셔서 지금까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정의할 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정의하셨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내 아버지께 기도하라."라고 기도의 방법론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왜 안 됩니까?" 물었을 때 "기도 외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수 없느니라. 기도 많이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이렇게 기도는 끝이 없이 예수님의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또 기도하는 방법에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 많이 안 해도 괜찮다." 누가복음 6장에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산기도 가셨습니다. 또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철야기도 하신 겁니다. 고민하면서 기도하신 것이 겟세마네 동산이십니다. 얼마나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는지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어 떨어지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이 누가복음 22장에 나타났고, 안수기도하신 것이 마태복음 19장에 나타나있고,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 산 기도를 마치시고 그 다음에 제자 선택을 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도 기도로 끝을 내십니다. 누가복음 23장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금년에 이 기도에 가장 간절한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여기 현수막에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예수님이 바위에 엎드리셔서 애절하게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표현해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기도생활을 하셨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새벽 기도의 어려움을 체험합니다. 하나는 현대 문화권입니다. 현대 문화권에서는 특징적으로 밤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농경 문화권에서는 해만 떨어지면 잠을 잤는데 지금은 일찍 자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당합니다. 12시가 넘어서 잔다고 할 때 문화인같이 취급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좀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좀 늦게 일어나야 합니다. 밤에 하는 TV프로그램들이 심야 토론회 등 볼 것이 많게 만들어지고 있고, 지금은 24시간 영업도 얼마나 많아졌는지 모릅니다. 낮이나 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찍 잘 수가 없는 문화에서 자니까 새벽에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한 겁니다. 시간 관리는 누가 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해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우선순위에 놓고 생각해서 잠을 조금 일찍 자는 습관을 가진다든지, '열아홉 순정' 끝나면 바로 잔다든지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할 것 다하고 볼 것 다하고 언제 잠을 잡니까? 또 한 가지의 어려움은 바로 신체적 조건입니다. 사람이 잠이 든다는 것은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잠을 자게 되어 있는데 내일에 대한 걱정과 미래 불안, 오늘 해결하지 못한 고민도 있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으니까 단순 생활이 안 됩니다. 인간관계도 복잡해지고 머릿속에 해결해야 되는 문제도 많고, 그래서 몸은 누웠는데도 잠이 일찍 오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들로 끙끙거리다가 깜박 잠이 드는 시간이 새벽인 것입니다. 그 짧은 몇 시간 잠을 잘 자야만 이튿날 에너지가 생겨서 다시 활동할 수가 있는데 그 깜박 잠이 든 그 시간을 깨워서 나오려니 신체적 조건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도 밤늦게까지 심방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저도 여러분들보다 결코 일찍 잘 수 있는 문화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텍사스 휴스턴에서 미국 교회를 빌려 한국 사람들을 상대로 목회를 시작할 때 새벽기도를 하려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를 하는데 새벽 5시에 이 교회 건물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 큰 교회를 당신들은 아무도 안 쓰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실 하나만 주면 우리가 잘 쓰고 잘 정리하고 갈 테니 새벽 5시에 쓰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저를 쳐다보고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지금 새벽 5시라고 말했습니까, 오후 5시라고 말했습니까?" "새벽 5시입니다." "그러면 당신이 새벽 5시에 나오셔서 설교하실 겁니까?" "그렇습니다." "매일 나올 겁니까?" "매일 하겠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떡하시려고 그럽니까?" "안 죽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미국 사람들은 꼭 서류를 해서 오거든요? 미국 사람들 서류 보관하는 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안 버립니다. 무슨 서류가 들어왔든지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때가 되면 탁 내밀면 꼼짝 못합니다. 미국 사람들과 동업, 거래 관계 하는 거 한국 사람들이 지는 게 뭔지 아십니까? 서류, 메모 한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가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 내밀면 꼼짝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집니다. 나중에 가서 의논해서 당회에서 내가 요청한 것을 저는 말로 했던 것을 "서류로 하라."고 해서 서류로 만들어 사인해서 보냈습니다. "네가 요청했다. 그래서 주겠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여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문제는 네가 책임져라." 그런 것입니다. "책임지겠다." 그래서 당회에 서기가 가져왔습니다. 장로입니다. 나한테 허락한다는 서류를 주면서 한 말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Paster Lee! 새벽 5시에는 하나님도 주무십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시간이 제일 잠 잘 시간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이 새벽에 무슨 일을 하셨는가 보면 됩니다. 우선 오늘 성경 말씀에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여기에 왜 이 "새벽" 단어를 썼습니까? 대낮도 있고, 정오도 있고, 저녁도 있고 얼마든지 24시간 시간이 있는데 왜 새벽이라고 했습니까?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왜 그랬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홍해 사건이 나옵니다. 애굽의 군대가 무섭게 달려오고 있습니다. 앞에는 바다이기 때문에 갈 수가 없게 되자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아니,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물에 빠져 죽게 할 것이냐?" 며 원망을 할 때 말씀에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기둥, 구름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다시 회복된 것도 새벽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다 새벽 시간에 멸망을 당하고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모두 새벽에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히브리 민족은 여리고성을 함락시켜야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지방은 식량 생산이 가능한 땅으로서 그곳에서 식량을 생산해서 먹고 살아야 만나가 끊어지고 가나안 땅 정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쟁을 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그 좋은 땅을 뺏기겠습니까? 그래서 성을 쌓고 견고하게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시간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새벽입니다. "제 7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의 나라 이름은 야곱 개인의 이름입니다. 개인 이름이 영원한 국호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는데 천사와 씨름합니다. 야곱이 이겼습니다. 먼동 트기 전 천사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고 떠납니다.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영원히 되어버린 겁니다. 새벽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새벽별"이라고 했습니다. 왜 저녁별이 아닌 새벽별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내가 새벽별을 주리라." 모두다 새벽 단어를 썼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하다가 새벽 닭 소리를 듣는 순간 소스라쳐 놀라 영혼이 깨어나 통곡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무덤을 보려고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영광을 차지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부활의 메시지를 처음으로 설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에 보면 재림 주 예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새벽에 재림 주가 오실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모두가 새벽을 초점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도 무엇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새벽을 잘 처리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삼국 시대 역사를 보면 "신라 전성기 때 새벽마다 불국사 종소리를 일찍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에 박정희 대통령도 혁명 일으킬 때 대낮에 일으켰다면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벽 2시에 한강 다리 넘어오는 바람에 성공했습니다. 다 잠자고 있는 시간 아닙니까? 새벽을 이용해야 성공한다는 것은 마귀들도 알고 있습니다. 6 25 동란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미국 전쟁 역사상 최고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하와이 진주만 공격!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이 새벽 6시 그것도 일요일에 그 시간에 공격해야만 승리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확히 그 시각에 공격하여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진주만에 가보면 전쟁의 폐허상태 그대로를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재판하고 죽이고자 모의한 것도 새벽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절에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니" 마귀의 역사도 새벽을 이용할 줄 압니다. 오늘 성경 말씀 시편 46편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찬송가를 지어 독일 국민들에게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부르게 한 말씀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를 새롭게 한 사람이요 영국의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는 영국 교회를 새롭게 한 사람들인데 무슨 힘으로 했는가? 그들이 고백하는 말이 "나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하루에 새벽마다 2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회 역사에 최초의 새벽기도 교인은 백홍준이라는 사람입니다.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고 최초의 장로가 되었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처음에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올 때의 역사가 중국 심양의 로스 목사 사택에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여러 번 거기 가서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백홍준 전도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조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한국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공동 새벽기도 시작은 1906년 장대현 교회의 교인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마침내 그것은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는가 하면 그 기도의 영적인 힘이 그대로 전승되어서 오늘날까지 세계 어떤 교회도 하지 아니한 새벽기도를 대한민국 교회가 열심히 함으로서 세계교회 역사의 보기 드문 부흥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뇌의 기능이 최고의 역할을 할 때가 새벽 시간입니다. 또, 새벽에 죄 짓고 돌아다니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맑은 영혼을 가지고 가장 좋은 뇌의 역할을 가지고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께 나와서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와 형제들을 위해서 국가, 민족을 위해서 기도드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은 기도한 것은 절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다가 가장 필요한 시간에 나에게 응답하십니다. 성경에 보세요. "네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되었느니라." 기도는 하나님의 기억에 남습니다. 하나님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있단 말입니다. 젊어서 기도 많이 드린 사람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게 되어있고 자손들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과 맞붙어서 괜히 시비 붙지 않기를 권합니다. 합당하지 않으면 그 화가 내게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모르니까 그러는 겁니다. 청년들이 왜 새벽기도에 많이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거룩한 투자다. 네 생애를 가장 빛이 나게 만들어줄 것이다. 자신 있다." 저는 강조합니다. 어쩌다가 청년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며 울고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실연당한 청년들이 많이 나오고 그럽니다. 어쩌다 교인들이 새벽기도 나오면 무서운 꿈을 꾸고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새벽기도 강조하는 이유는 제 자신의 체험 때문입니다. 제가 계산해 보니까 50년 새벽 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가를 해보면 제 욕심으로 기도한 것은 안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 그것은 내 욕심의 기도였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좋은 길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은 내가 기도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모두 다 성취되었습니다. 제가 소명을 받았을 때 새벽기도하면서 제일 많이 쓴 단어가 "세계 선교"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제가 사춘기 때 그 단어를 가장 많이 쓰면서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그렇게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제가 11번 외국에 나가서 세미나와 부흥회를 했고, 금년에도 제가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고 내일 또 인도와 스리랑카에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어떤 때는 좀 힘들고 또 외국 나가면 음식 맞지 않아서 고생도 많이 합니다. 그럴 때는 속으로 '에이, 이번에는 좀 쉬면 어떨까?' 이런 생각하다가도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 "야! 네 입으로 말해놓고 왜 야단이야?" 하나님이 막 책망하십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최대한 제가 선교에 열심을 다합니다. 사실 만나보고 이야기해 보면 세계 선교의 열정에 대해서 저만큼 열심히 이렇게 하는 목사도 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나는 하나님과 약속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에서 제가 이렇게 열심히 합니다. 저는 아주 답답한 게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보화, 보물 덩어리, 보따리를 하나님이 이렇게 딱 갖다놓고 우리들보고 "네 손으로 풀어서 가져가라." 그러십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새벽 기도가 더합니다. 그런데 왜 그걸 풀지 않는가? 어휴! 답답해 죽겠습니다. 왜 안하시는 겁니까? 새벽 기도 열심히 드리십시오. 기도는 너무나 소중해서 내 기도를 천사들이 금 대접에 담아 하나님께로 가져다 상달시킨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Again 1907" 뭐가 "Again"이냐? 평양에서 일어난 새벽기도 운동이 대한민국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지 않았느냐? "Again 1907"은 바로 새벽기도 운동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금년을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정했으니 여러분 일 년 동안은 시간을 잘 관리하셔서 2007년 에는 "Again 1907"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모두가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우리가 게을리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역사에서 보아왔습니다. 새벽기도 운동이 세계 교회보다 앞서가는 교회를 만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저희들이 기억하면서 "Again 1907"은 다른 것이 아닌 새벽기도로 이루어가는 한국 교회, 그리고 나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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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 용서 †사순.고난,부활,자료


찬송 : ‘그 참혹한 십자가에’ 269장 (통 211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성경 : 사무엘하 19장 21~22절

말씀 : 우리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성보다 감정이 훨씬 더 우리 삶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미움을 걷어내고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형들을 용서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고 빚진 자의 비유로 용서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의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스테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하나님께서는 죽을죄를 지은 우리들을 용서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시므이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다윗을 저주합니다. 아마도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승리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시므이는 급히 다윗 왕 앞에 나와 19∼20절에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라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를 본 아비새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21절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아비새의 말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22절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고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윗은 용서합니다. 우리는 항상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것이 십자가처럼 느껴지면 달게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기도 :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덮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살아갑니다. 그 사랑, 그 은혜 잊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하며 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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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누가복음 19장 41∼44절

성령으로 거듭나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물을 아는 중보자, 곧 예배자입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 부활 영광의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뀝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을 바라보시며 보좌 위에서 흘리는 하나님의 생명수(눈물)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 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환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우신 겁니다.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성은 수많은 사람으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을 나라를 세울 왕으로 오해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셨겠습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예루살렘성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왕 때부터 예배와 기도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죄를 회개하면 참자유와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십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속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재앙이 되어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 이 세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교수, 성도들의 모습에서 빛의 자녀로서 열매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살전 5:22).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그것은 변화 받지 못한 육의 사람과 변화 받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예수님은 이 땅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부터라도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립시다.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구별된 거룩한 성도가 되어 시대를 분별하고 생명을 선포합시다.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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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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