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찬송가: '예수는 나의 힘이요' 93장(통 93장) 
신앙고백: 사도신경 
본문: 디모데후서 2장 1~6절 

말씀: 오늘은 3·1절입니다. 돌아보고 싶지 않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있습니다. 민족의 아픈 기억인 36년간의 일제시기에 충성되고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민족 전체에 자유의 혼과 해방의 용기를 불어넣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엔 크리스천이 민족의 2%에 불과했습니다. 성경 본문은 세 종류의 삶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첫째, 좋은 군사입니다. 군인의 삶은 명령에 죽고 삽니다. 명령에는 거절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는 거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마 16:24). 오직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을 뿐입니다. 고난도 감수해야 합니다. 군인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혹독한 훈련을 겪어야 하며, 전쟁 시에는 생명을 내놓고 국민을 위해 싸우는 신분입니다. 영적 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교를 각오해야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롬 8:18). 

디모데후서 2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디모데도 바울의 순교 후 투옥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악과의 싸움이므로 많은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고난의 극복을 통하여 성숙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둘째, 경기하는 자로서의 충성입니다. 세상은 경주장과 같습니다. 인생이 태어나는 순간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경기에 참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운동경기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전력투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규칙을 지키는 일입니다. 규칙을 어기게 되면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규칙을 지켜야 하는데 그 규칙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죄의 삶을 벗고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롬 13:12). 

셋째, 농부로서의 충성입니다. 우리는 씨 뿌리는 농부요, 이 세상은 밭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씨앗을 많이 뿌려야 합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되 눈물을 흘리며 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며,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기 때문(시 126:5∼6)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저를 복음의 농부로 사용해 주옵소서. 세상의 헛된 것에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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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가정예배 평화의 마음   비대면예배기간  가 정 예 배     
  
찬송 : '물 위에 생명줄 던지어라' 500장(통 25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사무엘상 19장 1~7절 

본문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 왕과 친구인 다윗의 대립 가운데서 난처할 수밖에 없는 '제3자 요나단'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제3자의 입장에 설 때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강요받기도 하며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진리의 편에서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첫째, 사울 앞의 요나단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세운 두 번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끝납니다. 사울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던 보이지 않던 죄의 모습은 두 번의 실패로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고 급기야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는 그의 노력이 잘못되었음을 직고합니다(3∼5절). 요나단은 자기가 이어받게 될 왕위를 다윗이 차지할 줄 알면서도 그에 대한 우정을 배신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구출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분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인내를 요구하거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이런 상황에서 차분히 사울이 생각을 바꾸도록 돕습니다. 

둘째, 다윗 앞의 요나단은 평화의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과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힌 사울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단순히 '선택'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민은 어떤 방법으로 다윗을 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초점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생명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음모를 알고 있던 요나단은 다윗에게 찾아가 모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지혜로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두 사람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긍정의 상황을 만들려는 요나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고민하면서도 다윗을 도운 이유는 평화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의 생명을 구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사울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운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 앞의 요나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볼 때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며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기뻐하며 그를 돕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왕위를 이을 사람처럼 여겨질지라도 그는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겸손히 받아들였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가정도 요나단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관계를 회복시키고 평화를 이끌어내는 믿음의 처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 하나님, 말씀을 따라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평화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의 잘됨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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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는 삶
   
찬송 : '예수 더 알기 원하네' 453장(통 506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에베소서 4장 14∼16절 

말씀 : 인간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몸이 성장하면서 건강해지고 강해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썼습니다. 이 말은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것에서 벗어나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는 삶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돼야 성숙하고 장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면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되는 삶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지식을 얻습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것과 증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는 알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믿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일치되는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삶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행하지 않고 예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사랑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우선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 어려움보다 상대방의 안위를 중요시 여깁니다.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숙한 사랑을 행하는 자는 남을 이해하고 너그럽고 이타적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사랑의 자세를 가지고 진리를 전합니다. 이것이 장성한 믿음입니다.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셋째, 서로 성장을 도모하는 삶입니다. 본문 16절은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절)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과 사랑의 성장은 함께 이루어지며 이것을 토대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숙은 혼자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숙은 상호 영향을 줍니다. 다른 사람의 성숙으로 나도 성숙하게 되고 나의 성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서로 도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 : 하나님!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는 깊은 신앙의 가정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서로 말하고 전함으로써 이웃과 상생하는 소명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 소명을 품고 지내는 가정이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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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큐티 오늘의 큐티 

제목 : 사탄의 유혹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틴 루터 목사님이 부흥회 중에 자주 사용하던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부하들을 불러서 성과를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가 말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콜로세움의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게 어쨌단 말이지? 죽은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 가있지 않느냐?”
두 번째가 말했습니다.
“저는 선교사들이 탄 배를 침몰시켜 모두 죽게 만들었습니다.”
역시 사탄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그건 조금 효과가 있구나. 그러나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건 변함이 없지 않느냐!”
세 번째가 말했습니다.
“저는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한 한 성도를 골라 사업이 잘 풀리게 하고 많은 돈을 벌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여가생활에만 관심이 쏠려 이제는 교회도 잘 나가지 않습니다.”
사탄은 세 번째의 보고를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사탄의 유혹은 내가 하나님을 삶의 우선 자리에 놓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그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을 최고로 섬기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늘 깨어있게 하소서!
물질적인 문제보다도 믿음의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365김장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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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한 가정예배 중요성 : 고상한 그리스도인

찬송 :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289장(통 208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도행전 17장 10∼15절

말씀 :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베뢰아 사람들의 신실함을 통해 새로운 용기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신사적이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모습이 고상한 그리스도인 아닐까요? 어떤 사람들이 고상한 그리스도인인지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시선이 변해야 합니다. 바울이 베뢰아 사람들에게 신사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의 시선이 세상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상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바라보는 대로 살아갑니다. 믿음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은 믿음대로 가고,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가는 사람은 긍정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통해 마음 문이 열리고 하나님 말씀에 수용적인 자세로 나아간 베뢰아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고상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발견하여 이를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행동을 통해 영향을 줄 때 비로소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둘째, 표현이 변해야 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은 표현이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잘 표현해야 100% 내 것이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사는 인생은 표현이 달라지며 삶이 변화됩니다. 분노를 표현하며 사는 사람은 분노의 사람이 됩니다. 반면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며 사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감사와 기쁨이 넘쳐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표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백이 풍성한 사람이 고상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셋째, 마음의 방향이 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마음의 방향이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했고, 그들 삶은 강건해져서 어떤 고난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고백하는 우리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표현이 달라져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에 매어 있는 삶으로 행함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매일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기도 : 하나님,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더욱 거룩해지게 하옵소서.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르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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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코로나 19와 가정예배 진실된 믿음 

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신앙은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은 바로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진실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잘 보이게 된 것은 그의 순종 체질화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첫째,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할 때 떠났습니다. 그곳은 본토요, 아비 집, 친척들이 있는 곳입니다. 부동산이 있는 곳입니다. 생활의 안정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떠나라 할 때 떠났습니다.

둘째, 번제를 드리라고 할 때 순종했습니다(창 15:9∼11). 시키는 대로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번제를 드리라 할 때 드렸습니다. 순종했던 것입니다.

세째,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실 때 순종했습니다(창 17:9∼14).

넷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 할 때 순종했습니다(창 21:9∼21). 

다섯째,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할 때 일언반구의 불평도 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모리아 산 까지 가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독자를 바치는 일까지 순종하는 것을 보고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 22:12)고 했습니다.

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16∼18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는 최선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은 가장 정성스럽게 드리는 믿음의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바치라 할 때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다 부모가 키워주고, 입혀 주고, 다 부모가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 달라고 해서 받으면 마음이 흐뭇할 것입니다. 사탕을 한 봉지 사 주고, 다시 그 사탕을 나도 한 알만 달라고 해서 받으면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사탕을 한 봉지 사주고, 하나만 달라고 하는데도 안 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선 우리의 믿음을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 믿음으로 드리는 봉헌, 믿음 안에서의 교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가족 모두 믿음으로 삽시다. 

믿음으로 봉사합시다.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믿음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으로 잘 보이는 개인, 가족이 되길 기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고, 예배 중심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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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주의 피로 이룬 샘물’ 266장 (통 200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한복음 4장 6∼19절

말씀 : 데이비드 홉킨스는 그의 연구를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원동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기운이 빠지게 하는 것,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을 쭉 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심, 무기력증, 슬픔, 두려움 등이라고 합니다. 

홉킨스는 이렇게 힘이 빠질 때에 다시금 회복할 수 있기 위해서 제3자의 도움, 즉 격려와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3자의 에너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영적 자존감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소개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나름의 열등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존감의 회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바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한 여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바로 만났을 때에 어떤 회복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유대로 가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피해서 돌아가는 것과 달리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셨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목적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경유하여 지나가기로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여인은 모두가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에 홀로 등장하여 물을 길러 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물가에 다른 여자들은 없고 이 사마리아 여자 혼자뿐이었을까요. 매일 쓸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당시 여자들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여자들은 아침저녁으로 물이 차가울 때 물을 길었습니다. 그때 서로 교재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더운 한낮에 혼자 물을 긷기 위해 나왔다는 사실은 그녀가 따돌림을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 하실 때에, 이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느냐고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혈통적 열등감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열등감을 갖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만나갈수록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날 때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등감이 회복될 때 이 여인에게 나타난 현상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둘째는 전도의 회복입니다. 예배에 대한 갈망과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여인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와 보라”고 외치는 회복의 역사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을 만날 때에 바로 영생하는 샘물을 마실 때에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기도 : 하나님을 믿되 바로 믿는 나의 삶이 돼 주님께서 주시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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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회복 :: 코로나19재확산과 가정예배 중요성 

묵상 :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에, 그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까?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삼상 3:8∼9)

2008년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목사님이 영국 올더스케잇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부르심을 새롭게 체험한 지 2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했던 한 사람의 변화는 영국 교회와 영국 사회의 변화의 불길을 인도해 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첫째,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어린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궤 가까이에 누워 잠을 청하던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양치기로 호렙산의 불타는 떨기나무의 환상 앞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둘째, 반복적인 부르심에 분명하게 응답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실 때 세번을 반복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부르실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 누군가를 죽음의 위기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사역의 현장으로 이끌어가는 힘은 어디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그 밑바탕에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셋째, 부르심에 응답하고 사명을 분명하게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내가 이 세상과 교회와 복음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자기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지만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중요합니다. 

기도 :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주여 내가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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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365::죽으면 죽으리이다 코로나19때 가정예배

 
찬송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580장(통 371)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에스더 4장 8∼17절

말씀 :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정부에서 현충일로 지정한 1956년 6월 6일은 때마침 망종(芒種)이었습니다. 망종은 24절기의 하나로 농경사회에서 곡식의 종자를 뿌리는 가장 좋은 때로 여겼습니다. 역사적으로 망종에는 나라를 지킨 영웅들에 대한 예를 지키는 행사가 진행됐다고 합니다. 현충일은 애국선열을 비롯해 한국전쟁으로 40만 이상의 국군이 순국한 것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시대의 징조에 무감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보면 하만의 계략에 의해 유다민족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이 위기를 왕비가 된 에스더에게 알렸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라고 결단하고 왕 앞에 나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유다민족이 전부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살리기 위해 모르드개가 했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에 4:13)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일수록 홀로 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하며 함께 힘을 합쳐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국민으로서 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욕심만 채워서는 안 됩니다. 국가가 어려울수록 함께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에스더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에스더는 유다인들에게 함께 금식기도를 할 것을 제안합니다.(16절) 어려울 때 함께 하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는 묶인 것을 푸는 열쇠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에스더와 유다인들의 금식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만의 흉악한 결박을 풀었습니다. 

셋째는 국가와 민족이 어려울 때 에스더의 용기를 본받아야 합니다.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은 평소에 4대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첫째는 무실(務實·진실을 실천하자)이며, 둘째는 역행(力行·스스로 힘써 행함을 보이자)이고, 셋째는 충의(忠義·옳은 일이면 내게 이롭건 불리하건 끝까지 성실하자)이며, 넷째는 용감(勇敢·용기가 있는 인간이 되자)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나라가 어려울 때 용감한 국민이 될 것을 강조했으며 본인 또한 그렇게 살았습니다. 에스더의 용기는 왕의 규례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용감함이 유다백성을 구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도 에스더처럼 죽음도 불사하는 호국(護國)의 용기를 잃지 맙시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 하나님, 대한민국의 위기와 고비마다 피할 길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애국선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날마다 이 민족이 하나 되게 하옵소서. 애국선열들의 가족과 그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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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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