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가정들

 

1. 아담과 하와

 

가. 인간 최초의 가정 탄생(창 2:7-25)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친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과 식물을 다스리고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으로 그곳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깊이 잠이 들게 하고 갈빗대 하나를 꺼내고 갈빗대 자리에는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 즉 하와를 만듭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와를 일컬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인류 최초의 부부가 탄생을 합니다. 즉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룹니다.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밝고 온유하고 따스하고 평화로운 가정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갖고 있었으며 모든 인유의 축복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전인격적인 부부이자 죄가 없는 무균 상태의 온전한 부부요, 순전한 부부였습니다.

 

나. 유혹과 징계 (창 3:1 - 7)


하와가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따서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아 벗은 몸을 가립니다. 이들은 하나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에 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 명한 열매를 먹었냐?”고 물어보니 아담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한 하와가 주어 먹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또한 하와는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이때부터 인류 최초의 부부간에 변명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불신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저주를 내려 땅을 기어 다니게 하시고, 하와에게는 임신의 고통을 더 하셨고, 아담에게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옻을 지어 입히시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을 하십니다.

 

다. 최초의 가정폭력과 회복(창 4:1 - 8)


아담과 하와는 부부로서 동침하여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칩니다. 세월이 지나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양의 기름으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물은 선한 뜻이 아니기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가정폭력인 자기의 아우를 쳐 죽이는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추방합니다. 즉 가인은 인류 최초로 노숙자의 신세가 됩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아들인 셋을 낳게 하십니다. 허물어진 가정에 새로운 싹을 허락하시어 가정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라. 성경적 교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부부입니다. 이들 부부는 황송하게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과 거룩한 영으로 탄생한 축복받은 부부이며,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이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원죄를 저지르고, 아들 가인의 살인으로 가정이 파멸될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축복인 아들 셋을 허락함으로써 인류가 온 지면에 바다의 모래 알 수 보다도 많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축복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대우는 그저 아끼지 않고 퍼주시는 한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2. 야곱의 가정

 

가. 야곱의 결혼과 자녀 출산 (창 29:15 - 30)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차지하고 또한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에게 주는 축복까지 빼앗아 형 에서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어머니의 권유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품삯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요청을 받자 7년동안 라반의 일을 도와주면 둘째 딸인 라헬과 결혼을 허락하여 달라고 하고 7년을 섬겼습니다.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동침을 하게 되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가 자신 옆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한테 따졌더니 다시 7일을 기다렸다가 라헬과도 결혼을 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야곱은 라반을 7년을 더 섬깁니다.

 

레아와 라헬 두 자매는 야곱을 사이에 두고 시기와 질투, 미움과 경쟁의 팽팽한 관계가 계속됩니다. 누가 야곱에게 더 사랑을 받느냐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서로의 몸종까지 들여보내면서 힘을 겨룹니다. 한 남자와 네 여인의 가정은 결코 화목하다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두 자매와 두 명의 몸종으로부터 많은 자녀를 두게 되는데 레아에게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등 여섯 아들과 딸 디나를 낳았고, 라헬에게서 요셉과 벤냐민 두 아들을 낳았고, 레아의 시녀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 두 아들을 낳았고, 라헬의 시녀 빌하에게서 단과 납달리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이들 아들들은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나. 야곱의 재산 증식과 귀향 (창 30:25 - 32)

 


야곱은 레아를 위하여 7년 그리고 라헬을 위하여 7년 총 14년을 섬기고 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고자 하지만 삼촌 라반이 더 있어 줄 것을 요구하며 품삯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하라고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양떼와 염소떼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얼룩무늬 있는 것을 가려내어 멀리 떨어진 라반의 아들에게 보내고, 이후에 태어나는 양떼와 염소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얼룩무늬 있는 것은 자기의 품삯으로 해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껍질을 벗겨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서 양떼 및 염소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가 배게 하여 새끼를 낳은즉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이 됩니다. 야곱이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됩니다. 이렇게 라반의 집에서 6년 동안 지내면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아지게 됩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야곱이 생각하기에 라반이 예전과 같이 대우하지 아니하고 또한 요셉의 양떼가 많아짐에 따라 라반의 아들들의 불만이 점점 많아지며, 또한 하나님께서 ‘고향땅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고서 라반의 집에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레아와 라헬에게 조용히 일러 상황 설명을 해주니 두 명의 아내도 흔쾌히 동의하게 되어 라반이 양털을 깍으러 나간 중에 라반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낙타에 아내들과 자녀들을 태우고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을 가지고 고향 땅을 향하여 떠납니다. 야곱이 조용히 도망한 것을 3일 만에 알게 된 라반은 7일 만에 길르앗 산에서 야곱을 만나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호하시므로 별 다른 소득이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어 이기고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또한 귀향중에 그동안 감정의 골이 깊었던 형 에서와 서로 대면하여 형제간의 감정도 풀고 서로 화해하게 됩니다.

 

다. 야곱 가족의 치욕과 보복 (창 34:1 - 7)

 


야곱의 가족이 세겜성읍에 이르러 거기서 장막을 치고 살 때 디나가 밖에 나갔다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세겜이 디나를 사랑하게 되어 디나와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거짓으로 “너희 중에 있는 모든 남자가 우리같이 다 할례를 받으면 서로 결혼을 허락할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성읍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 제 3일에 그들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무척 아플 때 시므온과 레위가 성읍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가축과 모든 재물을 탈취하고 야곱의 가족은 벧엘로 올라갑니다.

 

라. 요셉에 대한 형제간의 시기와 음모(창 37:1 - 11)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라고, 또한 형들의 잘못을 낱낱이 아버지에게 고자질함으로써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며, 또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형들로부터 더욱 더 미움을 삽니다. 요셉이 말하기를 “내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는데 내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들은 내 단을 둘러서 절하더이다”하고 또 다른 꿈을 이야기 하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네게 절을 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들의 형제와 부모님까지도 자기를 섬기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루는 야곱이 요셉더러 형들이 양 떼들을 잘 치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요셉에게 말을 하니 요셉이 길을 떠나 도단으로 갑니다.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죽이기를 꾀하고 요셉을 보자 채색 옻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마침 이 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자 요셉을 이십개의 은을 받고 팔아 넙깁니다. 요셉은 이집트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립니다.

 

형들은 요셉의 채색 옻에 숫염소의 피를 적시어 아버지한테 가서 말하기를 ‘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니 야곱이 슬피 웁니다.

 

마. 요셉의 이집트 생활 (창 39:2 - 41:36)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므로 보디발이 집의 총무를 삼아가 보디발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우므로 보디발의 아내가 동참하기를 날마다 요구하게 됩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자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하여 요셉을 옥에 갇히게 만듭니다. 옥에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므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아 옥중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됩니다.

 


옥중에 있던중 이집트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옥에 갇히게 되는데, 하루는 이 두 사람이 동시에 꿈을 꾸게 되는데 요셉이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술 맡은 자의 꿈은 이러하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해석하여 이르기를 “세 가지는 삼일이라. 지금부터 삼일 안에 왕께서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나가게 하여 주십시요”. 또한 떡 굽는 관원장이 요셉에게 이르되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이 해석하여 이르되 ‘지금부터 삼일 안에 왕이 당신의 머리를 들고 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삼일 후는 왕의 생일이기게 왕이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였는데, 과연 술 맡은 관원장은 석방되었고 떡 굽는 관원장은 처형되어 공중에 메달리게 됩니다.

 

2년 후에 바로가 꿈은 꾸었는데 ‘왕이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왕이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었습니다. 왕이 온 나라에서 그 꿈을 해석할 사람을 찾으나 찾지 못하다가 술 맡은 관원장이 왕에게 자신이 옥에 갇혔을 때 꿈을 정확히 해석한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이 요셉이라고 말을 하니 요셉이 왕에게 나아와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일곱 해 풍년을 말하며,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와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은 일곱 해 흉년을 말합니다. 왕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시고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왕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일곱 해 풍년 동안에 매년 이집트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어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십시요.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곧 닥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왕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으니 너는 이집트를 다스리라하고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임명하게 됩니다. 요셉의 나이 겨우 30살 때의 일입니다. 또 왕이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합니다.

 

바. 가족의 상봉과 행복한 생활 (창 42:1 - 43:14)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먹을 곡식이 없게 되자 야곱은 요셉의 형 10명을 이집트에 먹을 곡식을 사러 보냅니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차리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양식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틈을 엿보러 온 정탐꾼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형들은 자기들은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며 원래는 12명인데 한 명은 없어지고 막내는 아버지 곁에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요셉은 그러면 막내를 데려오면 믿겠다고 하면서 형제들 중에 한 명인 시므온을 옥에 가두고 나머지 형제는 고향으로 보냅니다.

 


형들은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각자의 곡식 자루를 쏟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곡식자루에서 자기들이 갖어 갔던 돈뭉치들이 나오자 심히 걱정을 합니다. 르우벤이 벤냐민을 데리고 이집트에 가기를 원하지만 야곱이 벤냐민마저 잃을 수 없다고 반대를 합니다. 다시 유다가 아버지께 간청을 하여 벤냐민을 데리고 가리를 원하니 드디어 아버지 야곱이 벤냐민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들은 예물로 드릴 가나안 땅의 아름다운 소산물 즉 유향, 꿀, 향품, 몰약, 감복숭아 등과 전 보다 갑절인 돈을 가지고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갑니다.

 


이집트에 내려온 형제들 중에 벤냐민이 있는 것을 본 요셉은 시므온을 형제들에게 다시 내주고, 청지기에게 형제에게 씻을 물을 주고 나귀에게도 먹을 것을 주고 또한 정오에 자기 집에서 형제들과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정오가 되어 요셉이 나타나자 그들은 요셉에게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을 합니다. 요셉은 가족의 안부 특히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습니다. 벤냐민을 본 요셉은 사랑스런 마음이 복받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안방으로 가서 울고 얼굴을 다시 씻고 나와 점심을 같이 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자기가 형들이 노예로 판 바로 그 요셉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저 자기를 이집트에 보낸 것이니 두려워 말고 아직 흉년이 5년이나 남았으니 속히 아버지와 전 가족을 이집트로 모시고 와서 같이 살기를 원합니다.

고향땅에 도착한 형제들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것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립니다. 이리하여 아버지 야곱과 전 가족이 가축과 모든 재물을 가지고 이집트의 고센 땅에 도착합니다.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서 온 66명과 요셉가족 4명을 합쳐 도합 70명이었습니다. 요셉은 고센 땅에 가서 아버지 야곱과 뜨거운 포옹으로 상봉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잃어 버린 아들을 보게 되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면서 고센 땅에서 목축을 하며 흉년을 풍족하게 견디어 냅니다.

요셉이 7년 흉년 동안 기근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이 총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였으며, 또한 토지법을 확립하여 왕의 통치를 강화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고센 땅에서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죽어 고향 땅으로 메어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를 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후에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팔아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안심을 시키고 형제들의 전 가족을 돌보며 화목한 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사. 성경적 교훈

 


요셉이 노예로 팔려 이집트에 오도록 한 것은 형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서 7년 흉년에 대비하도록 먼저 이집트에 와서 총리가 되게 하고 또한 전 가족이 흉년 기근에 굶어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하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셉이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집트 뿐 만이 아니고 이스라엘까지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흉년을 잘 견디어 내도록 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관하시고 역사하시어 야곱의 가족을 아끼시어 미리 7년 흉년에 대비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고,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한 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야곱이 비록 청년기에 많은 고난을 겪었고 또한 형제간에 다툼도 있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의 가정을 단련하시어 담대하고 강하게 하셨으며, 야곱의 말년에는 전 가족이 모여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이후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누립니다.

 

3. 욥의 가정

 

가. 화목한 가정 (욥 1:1 - 47:31)

 

욥은 온전하며 정직하며 악한 면이 전혀 없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무결점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일곱 아들과 셋 딸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아주 부유하여 7000마리의 양, 3000마리의 낙타, 500마리의 소, 500마리의 암나귀, 그리고 많은 종을 거느린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들의 생일에는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셨습니다. 잔치가 끝나면 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도록 늘 조심하였습니다. 욥은 그야말로 모든 면에 있어서 풍족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 욥의 첫 번째 고난 (욥 1:6 - 12)

 


하나님이 욥에 대하여 칭찬을 하자 사탄이 말하기를 욥이 하나님을 따르고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보호하여주고 욥에게 복을 내려 그의 재산이 넘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탄이 다시 말을 하기를 욥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라고 말을 합니다.

 

욥의 첫 번재 고난은 이렇게 시작되는데 스바 사람이 와서 소를 빼앗고 칼로 종을 죽이고,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리고, 갈데아 사람들이 와서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이고, 큰 바람이 불어와 집을 치니 집이 무너져 모든 자녀들이 죽습니다. 욥은 모든 소유를 빼았기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다. 욥의 두 번째 고난 (욥 2:3 - 6)

 

하나님께서 욥이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었어도 온전한 모습을 지킨 욥을 칭찬하자 사탄이 말하기를 욥은 그의 모든 소유물을 내놓고 자기의 생명을 지킨 것 뿐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욥의 뼈와 살을 치면 하나님께 욕을 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욥의 두 번째 고난이 시작되는데 발바닥부터 머리의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합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온전함을 지키고 있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까지 합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하고 입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 때에 친구 3명이 욥을 위로하러 옵니다. 밤 낯 7일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욥이 자기의 태어남을 저주합니다(3장).

 

마. 하나님과의 대면후 회개 및 회복 (욥 42:1 - 6)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을 질책하고 욥이 무엇을 알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대면 후‘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기 40:4)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귀로 듣기만 한 주님을 이제 눈으로 뵈옵니다. 이제 티끌과 재 간운데에서 회개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과 친구들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욥의 고난을 돌이키시고 욥의 소유물을 이전 보다 갑절을 주십니다. 또 일곱 아들과 세상에서 제일 어여쁜 세 딸을 도로 주시고, 또한 수명도 140년을 더 하시어 늙어 나이가 차서 죽게 합니다.

 

바. 성경적 교훈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을 욕하지 아니하고 인내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에도 욥을 칭찬하였습니다. 욥을 의로운 사람으로서 노아와 다니엘에 견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에사겔서 14장 14절을 보면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라고 말씀하셨고, 20장에서도‘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도 자녀는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사무엘 가정

 

가. 한나의 번민 (사무엘상 1:1 - 8)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한나가 임신을 하지 못하게 하여 남편 엘가나는 브닌나라하는 또 다른 부인을 두게 되었습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잉태하지 못함으로 한나를 심히 격동하게 하여 괴롭혔습니다. 엘가나는 한나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며 위로하려 하였지만 그 시대 상황에서 ‘임신을 못하는 자신의 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또한 남편의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브닌나로 하여금 질투심을 자극시켜 한나로 하여금 더욱 괴롭게 하였습니다.

 

나. 한나의 서원 및 아들의 양육 (사무엘상 1:9 - 8)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서 아들을 잉태하게 해주시면 아들을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으로 바치겠다고 통곡하며 서원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한나의 번민을 해결해주시고 아들을 낳게 해주십니다. 아들을 낳으니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여호화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이 젖을 떼기까지 양육에만 신경을 씁니다. 젖을 뗀 후에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앞으로 나가는데 이 때 수소 3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22L)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바칩니다. 이 때부터 어린 사무엘은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기게 되고 어머니는 매년 겉 옻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고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자랍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축복을 더 크게 하여 주셔서 세 아들과 두 딸을 갖게 됩니다. 이후 사무엘은 사울왕과 다윗왕을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고,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됩니다. 한나는 성경에서 아름다운 어머니 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다. 성경적 교훈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나와 엘가나를 단련하신 후에 한나로 하여금 귀한 아들 사무엘을 낳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또한 그토록 수태를 하지 못하여서 애태우던 한나로 하여금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갖도록 하였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2:1-3)

 

사무엘이은 어른이 되어 여호와께서 그와 늘 함께 하셨으며, 그의 말은 하나도 이행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습니다. (1:19,20) 사무엘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블레셋에서 구원하였고,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 최초의 왕정정치를 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모세와 같은 믿음의 지도자로 견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예례미야 15:1)

 

5. 세례 요한의 가정

 

가. 세례 요한의 탄생 계시 및 출산 (누가복음 1:5 - 13)

 


엘리사벳은 남편 사가랴와 함께 의인이며, 주의 계명과 규례를 흠이 없이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가지 큰 근심거리는 나이가 많도록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인이 자식을 수태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사벳은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게 된 나이에 남편 사가랴가 제사장의 직분으로 성전에서 분향을 할 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아들이 잉태될 거라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사가랴는 의심을 품어 곧바로 벙어리가 되었지만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태어날 세례 요한은 이미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기한이 다 되어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나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던 날 모든 이웃과 친족들이 함께 즐거워하였으며, 이후 8일이 되어 할례를 받고 이름을 지으려 할 때 아버지 사가랴가 칠판에 ‘요한’이라 쓰니 그 때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이때부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나. 마리아의 방문 (누가복음 1:39 - 56)

 


엘리사벳이 아들을 수태한지 6개월 후에 마리아도 천사를 통해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그 아들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메시아 예수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천사의 말대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친족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자기 복중에서 아이가 기쁨으로 뛰노는 기이한 현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여자 중에 당신이 복이 있으며 당신의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믿음과 순종 안에서 의롭고 맑은 영혼을 소유한 엘리사벳은 자기보다 한참 젊은 마리아를 주의 어머니로서 올바로 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뻐 찬양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3개월쯤 같이 있다가 엘리사벳의 전송을 받으며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 세례 요한의 사명 (요한복음 1:15 - 36)

 


세례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 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 까지 광야로 나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생활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치며,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광야 요단강가 베다니에서 세례를 베풀 때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요한의 정체를 알고자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으니 요한이 대답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대답하였습니다. 또 묻되“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선지자냐?” “아니라” 또 묻되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한이 대답하기를“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그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며,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3 : 11) 세례요한은 뒤에 오실 예수님을 위하여 순전히 그의 길을 곧게 하고 준비 하였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생일날 목이 잘려 소반에 헤로디아의 딸에게 선물로 바쳐지는 순교를 하였습니다.

 

라. 성경적 교훈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제자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 곧 ‘그의 길을 예비하는 것’에 순종을 다하였고 무척 겸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만을 목숨을 다하고 감히 예수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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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주일예배설교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

 

 

 

제목 :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

말씀 : 마27:45-54

오늘은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고난주간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금요일을 지나 무덤에 계셨던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다 그랬지만 특별히 이 기간은 특별히 더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와 천대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낮아지셨던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고난주간으로 정하여 주님의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경건의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고난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당하셨던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에 진정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셨던 죄사함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예수님은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이었던 바라바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당하심으로 멸시천대를 당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군중들에게 물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놓아주느니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바와 비교되는 것 자체도 치욕이고 모욕을 진대 하물며 그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그뿐이 아닙니다. 막14:65에 보면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치며, 또 얼굴을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춰 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면서 조롱하였으니 천하에 이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패역부도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무지막지한 로마병정들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극심한 모욕한 멸시천대를 당하십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입히고는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침을 뱉으며 꿇어 엎드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면서 온갖 조롱을 해댑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며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은 조롱을 퍼부어 댑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로 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의 위협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라바보다도 흉악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 씌움을 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선지자 노릇 한번 해봐라, 십자가에서 한번 뛰어보라며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멸시천대와 조롱을 당했더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힘도 없고, 빽도 없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수모를 당했다면 도리없이 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십니다. 당장이라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을 요절 낼 수 있는 권세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참으셨던 것입니다.

 

2.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의 당하신 그 육체적 고통은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안토니아 요새에 있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십니다.

가시는 길도 고통과 아픔 그 자체였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로 험한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로마병정들의 채찍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습니다.

로마병정들이 휘두르는 채찍의 끝에는 쇠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휘두를때만 살쩜이 떨어나가고, 그 상처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옮기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온통 피로 얼룩이 졌고, 넘어지고 쓰러질때 십자가는 예수님의 등뼈를 짓눌렸습니다.

그러한 처절한 고통속에서 드디어 주님은 골고다 언덕에 도착합니다. 잔인한 로마 병정은 십자가를 땅에 놓고 예수님을 십자가위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시 시작합니다. 양팔을 벌려 십자가의 가로대에 대고는 커다란 대못을 주님의 팔목에 대고 박기 시작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울려 퍼지는 망치소리와 함께 주님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사람들의 폐부 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두 발목을 포개어 십자가의 수직 대에 대고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합니다.

(복음송 :그때 그 무리들이)

1절 :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망치소리는 산을 울리고, 멀리서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신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옵니다. 드디어 무지막지한 로마 병정들은 주님께서 못박히신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기 시작합니다.

십자가가 세워지면 질수록 못 박힌 주님의 손목, 못 박힌 주님의 발목에는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살은 찢겨지고, 뼈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으스러져 갔습니다. 손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주면, 이번에는 발목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발목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하게 하기 위하여 발목에 힘을 뺄라치면 이번에는 손목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이 온몸을 전율시켰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이 온 몸과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주님의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져 갔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주님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젖어 들어왔습니다.

(찬송가 144장 1절)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자신을 그 처절한 고통속에 내 맡기셨습니다. 멸시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난 파도를 향하여 명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죽음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호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열두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서 로마 병정들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완악한 무리들을 당장 해치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시간은 흘러 정오가 되었습니다. 갑자기 어둠이 밀려 왔습니다. 가장 햇빛이 찬란히 빛나야 할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멀리 멀리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간간히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순간 주님의 절규가 들려왔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인간 예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잠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평정을 찾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당신의 오셨던 그곳으로, 당신의 영광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온갖 멸시천대와 조롱과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씌움과 침뱉음과 뺨맞음을 당하셨습니다.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시며 험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손목이 찢어 졌습니다. 발목이 찢어지고, 뼈는 으스러졌습니다. 피는 흐르고 또 흘러 십자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골고다 언덕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래서 태양은 빛을 잃어 버렸고, 땅은 진동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그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고통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 저주의 죽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그 멸시받은 죽음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시요, 섭리자신데, 없는 것도 있으라 하시면 있고, 있는 것도 없으라 하시면 없게 하시는 분이신데, 지구를 태양을 향하여 돌라하면 돌고, 달더러 지구를 돌라고 하면 돌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산자를 죽으라하면 죽고, 죽은 자를 살라하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처절한 아픔과 죽음을 당하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은 그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의 문제는 도저히 스스로가 해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인간 속에 있는 부패된 죄악성은 결코 사랑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악성을 심판하시자니 사랑하는 인간이 죽겠고, 인간을 살리자니 공의의 속성이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드디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공의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사랑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절대로 묵과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험하고 가파른 골고다 언덕을 무거운 십자가를 걸머지고 오르시던 주님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채찍에 맞고 또 맞으며, 넘어지고 엎어지고 쓰러지며 오르시던 그 갈보리 언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망치소리 요란하게 주님의 손목과 두 발목에 사각형의 대못이 박히던 그 순간, 그 골고다 언덕에 울려퍼지던 처절하고도 끔찍한 주님의 신음소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상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여러분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영적 고통을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사망의 영원한 권세아래 고통받게할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때에 진정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주님안에 있는 참된 자유와 평강과 생명의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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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설교 <화목함을 선택하며 살자>


 

 


화목함을 선택하며 살자

 
찬송 :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440장(통 497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창세기 13장 1∼13절

 

말씀 :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릅니다. 선택한 것을 후회하거나 기뻐하는 것은 모두 자기 몫입니다. 그러기에 선택은 신중해야 하고, 사려 깊어야 하며,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선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말씀에서 그 기준을 찾아봅시다.


 
첫째, 화목함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것보다 화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화목은 대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희생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해도 내 안에 화목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성공하고 출세했다고 한들 하나님과 화목함이 없으면 주를 볼 수 없습니다. 더불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때, 거룩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둘째, 영적인 통찰력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조건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지위와 명예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기만 하면 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 신앙적 기준이 먼저였습니다. 신앙적 기준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에베소서 1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신앙적 판단과 통찰력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기적 욕심에 이끌리거나 환경과 여건에 요동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신앙적 기준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할 때 주께서 더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이 절대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 안에 자신의 미래를 맡겼습니다. 자신이 안일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약속에 미래를 전인격적으로 내어 맡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 미래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믿음 안에서 신앙적 통찰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처럼, 이웃과 화목하십시오.

 

기도 : 하나님,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주님의 통찰력으로 선택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스도처럼 화목하게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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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설 명절 성묘 예배 설교 / 성묘 예배 순서

 

 

 

성묘 예배 설교.   

성묘 예배 순서

개 식 사 /지금부터 ㅇ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어머님)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신앙고백 /우리의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히겠습니다.

찬 송 / 544장, 539장. 376장. 중에서 한 장을 같이 부릅니다.

성 경 /(1)욥1:21, (2)창9:20-29, (3)히11:4-5절,

설 교 /(1)빈손으로 가는 인생, (2)축복 승계의 비결,
(3)인생의 발자취.
기 도 / 설교자가 뜨겁게 기도한 후 주기도로 마칩니다.

*친교 : 형제간의 친교,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선친의 신앙과 모범된 사실을 자녀들에게 들여주고 기념촬영을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성묘 예배 설교 # 1 . 빈손으로 가는 인생. (욥1:21절, 찬송가 : 544.542.376.364장)

오늘 이 시간 아버님 (어머님) 의 묘소 앞에서 생각코져하는 말씀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란 제목의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1.욥의 신앙 생활을 살펴봅니다.
1)동방의 부자였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안이었습니다.
2)그의 소생은 아들 일곱과 딸 셋으로 신앙의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3)생일 잔치 후에 회개의 제단을 쌓아 하나님 앞에 신앙을 보여 드렸습니다.

2.욥의 가정에 찾아든 무서운 시험이 있었습니다.
1)욥의 행복을 시기한 자가 있었으니 시험자자 마귀였습니다.
2)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욥의 재산을 강타하였습니다.
3)열 남매까지 잃는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3)욥의 신앙 고백입니다.
1)참 신앙은 환난의 대풍이 불 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2)욥은 자기에게 있던 소유를 다 잃은 후에 원망대신 감사찬송하였습니다.
3)"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란 그의 찬송 제목이기도 합니다.

말 없는 묘소는 욥의 신앙철학을 웅변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정로는 오직 한길.... 예수의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여 만 왕의 왕으로 모실 때 만이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가문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자손 대대로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가정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묘 예배 설교 # 2. 축복 승계의 비결. (창9:20-29절, 찬송가: 544.542.376.364장)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조상 없는 자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축복계승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셈과 야벳은 축복의 승계자였습니다.
1)노아도 인간 이였기에 부끄러운 하체를 들어내어놓고 누워 있었습니다.
2)함은 부친의 부끄러움을 형제들에게 드러냈으므로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3)셈과 야벳은 부친의 부끄러움을 덮어 주었으므로 축복의 승계가 되었습니다.

2.노아의 예언이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1)신앙의 조상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는 것을 교훈합니다.
2)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진리를 교훈합니다.
3)예언대로 함의 자손은 종으로 셈의 자손은 종교적인 복을 야벳의 자손은 물질적인 복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3.축복 승계의 구체적인 비결입니다.
1)조상들의 믿음을 승계하는데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2)아브라함의 믿음이 노아의 신앙을 계승한 믿음이었습니다.
3)오직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노선을 떠나지 않는 자는 역사의 변천에서도 축복의 승계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 아담 - 에녹 - 노아 - 셈 - 아브라함 - 다윗 - 예수그리스도 - 이 노선이 축복 승계의 노선이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한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넉넉한 승리를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묘 예배 설교 # 3. 인생의 발자취. (히11;4-5절, 찬송가 :544.542.376.364장.)

우리 인생은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 자취가 남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인데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자취를 남긴자들입니다.
1)불순종으로 죄악의 자취를 남기고 간 것입니다. : 좋지 못한 자취입니다.
2)아담 하와 가인 가롯 유다의 자취가 그러합니다. :죄악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3)나는 지금 어떤 자취를 남기고 있습니까? : 인생은 언제나 현재가 중요합니다.

2.우리 인생의 구주 예수님의 자취는 어떠하였습니까?
1)천국에서 땅위에 오신 겸손의 자취셨습니다.(마1:23절), :영광 받으려교가 아니라 자신을 주시려고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자취셨습니다.

2)종의 자취로 오셨습니다.(빌2:6-7절) :하나님께 순종하신 순종의 자취셨습니다.
3)십자가의 자취셨습니다.(벧전2:21절) :인생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자취하셨습니다.

3.믿음의 사람들의 발자취는 어떠하였습니까?
1)아벨의 발자취는? : 예배의 발자취였으니 참된 예배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예배였습니다.

2)에녹의 발자취는?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더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3)믿음의 발자취는? :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로 매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 형수님)의 묘소 앞에서 다짐할 것은 좋은 발자취를 남기겠다는 결의와 십자가의 발 자취를 잘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는 후손들이되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하늘의 복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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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_ 세상을 품고 기도할 자 누구인가? (시편 67:1-7 )

 

 

 

제목 : 세상을 품고 기도할 자 누구인가?

말씀 :  시편 67:1-7


오늘 시편 기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 합니다. 복을 달라는 기도를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민족과 온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달라는 기도로 특별한 시입니다. 본문은 모든 열방을 향한 기도입니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듣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관련된 말은 듣기도 지루해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온 열방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하는 사람만이 그 복의 기쁨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그가 진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시인이 무슨 복을 받았을까요? 풍성한 열매일까? 오곡백과 풍성한 수확이 복을받았다고 하진않습니다.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1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로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의 환한 얼굴을 보았다는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것이며 그 복의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를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복음을 믿고, 살아내고, 전하는 사명 즉 믿음과 삶과 사명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복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죄를 이기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고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가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두번째가 빠져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것인데 이는두번째 삶이 살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증명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지시나요? 여기서 신앙인들이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어떤 역사를 통하여 그런 일을 하실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환한 얼굴로 비추어 준 사람들이 일어나면 여호와의 지식이 온 땅에 퍼지는 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늘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 은밀한 죄를 짓지 않는 사람 고난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인 수가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교사님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전에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은 속에서부터 생수가 솟아나는가? 환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는가? 를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삶이 하나도 안바뀝니까?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찌 그런 모습인가? 삶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을 달라고 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짜 믿는 믿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믿는 사람은 내 형편이 어렵더라도 내 속에서부터 기쁨이 솟아 올라옵니다.  세상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 흔적이 없이 믿는다고 하니 조소의 눈빛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어떻게 삶이 이렇듯 하나도 바뀌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렇다면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삶 전체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그런 복은 모든 그리스도 인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로이 있다면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어디 계신줄은 모르지만 예수님은 들으시고 오실 수 있으니 소리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소경 바디메오와 같은 사람이 계실 수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신다면 주님은 우리의 갈망을 들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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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예배기도문 (온 가족이 교제를 나누는 행복한 시간)

 

 

 

사랑의 하나님!

 

설날을 허락하시고 온 가족이 교제를 나누며

귀한 것으로 먹고 마시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주께서 우리 민족에게 복을 주신 명절이

이 민족 모두에게

축제의 설이 되게 하시고

주 안에서 온 가족이 하나가 되는 귀한 사랑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조상들의 훌륭한 전통을 이어받아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서로의 건강과 형통을 위해 축복하는 설 명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런 축제 가운데서도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을 생각하고

나누고 베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

가정마다 남 모르는 고민과 근심으로 눈물짓는 이들의 무거운짐을

주님과 함께 대신질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시험에 빠진 이들을 강하게 붙들어 주옵소서.

 

주님!

숨어 있는자를 찾으시고

남모르게 행하는 선한 손길을 기뻐하시는 주님

오늘도 주님의 그늘에 숨겨진 자 되게 하옵소서.

사람앞에 드러나는 것보다 숨어서 드리는 골방의 기도가 많게 하시고

은혜를 받았어도 티가 나지 않게 하시고

사랑을 행하여도 드러나지 않게 하옵소서.

 

선조님의 얼과 생전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옵시고

늘 연로하신 가운데 노심초사 하며 수고하시는

부모님의 건강을 붙들어 주시고

늘 주님 친구가 되어 주시어

날마다 기쁨과 소망의 삶으로 평안한 노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태의 열매로 자녀들을 허락하시고

건강하게 성장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기억 하시옵고,

우리의 자녀들을 이 민족에게 꼭 필요한 일꾼으로 세우시되

어떠한 상황에도 감사하며 사랑이 많고 예의바른 자들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한 자리에 모여 찬송하고 영광 돌리게 됨을 감사하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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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둘째 주일 예배 설교

 

 

 

제목 : 믿음으로 새해를
말씀 : 히 10:32-39 /계 1:8
 
새해를 기대하는 사람과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잡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확신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염려와 근심, 걱정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3).
 사단이 보는 세상은 믿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속삭이며 미래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게 합니다.
믿음을 떨어트리는 것은 사단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새해를 기대해야 합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결심을 하여도 우리는 결심한 대로 전부를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복된 미래를 열어주고 믿음으로 살 때에만 주님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새해를 여는 복된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서 주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복된 새해를 여는 열쇠는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복된 길이고 능력이며 생명이신 분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미래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고백하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내 삶을 살고 계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주님이 내 안에서 주님의 삶을 살기 때문에 염려 근심을 이길 수 있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내 안에 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순간순간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혀 기도와 찬미를 합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쇠사슬이 풀립니다.
주님과 교제하였기에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옥문이 열리자마자 도망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간수의 구원이나 빌립보 선교는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주님을 의존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미래가 열립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갈 때 열려진 길로 가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대인을 위해 왕에게 나가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왕비이지만 함부로 왕에게 나갈 수 없습니다.
법을 어기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를 통해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에 4:14)
자신이 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순종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주님을 의존하기 위해 금식 한 후 왕에게 나갑니다.
주님을 의존할 때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성도가 믿음의 길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주위의 역경과 환난에 져서 퇴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믿음에 계속적으르 정진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과 인내란 차의 두바퀴,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으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내가 따르지 않는 신앙은 일시적 감정이나 결심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신앙 없는 인내 또한 단순한 억지 태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내란 믿음에 기초하며 믿음 없는 인내는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당하는 인내를 잘 참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로부터 큰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속히 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직면한 고난과 담대하게 맞서면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내 삶을 대신 사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고백하면서 자리를 내어 드리지 않는다면 주님이 일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이 가득 차 있습니다.
새해가 왔다고 소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일들은 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 때문에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해요 방패이십니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길을 알려주시고,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방패가 되십니다.
그런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힘든 세상이지만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왔다면 먼저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면 우리가 그 상황을 긍정할 때 오히려 위기는 기회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올지라도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을 긍정하고 신뢰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긍정으로 열어주십니다.
 새해를 맞아 새로운 소망을 품고 올 한해는 조금 더 주님과 가까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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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신년 축하 감사 예배 기도문 ( 주일예배대표기도문)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또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감격을 맛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둡고 암울한 세상에 살지만

소망중에 새해를 맞이할 수 있도록

새힘 주시고 격려해 주심으로

저희들은 위로를 얻으며

희망을 안고 새출발을 다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이제로부터 올해를 마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까지

우리의 이 다짐과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저희 교회를 복되게 하셔서

지난 해에도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게 하신

하나님!

수고하고 충성한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옵소서.

 

올 한해는 더욱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맡겨진 직분과 사명을

아름답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모든 기관과 부서들이

주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소서.

 

목사님을 더욱 강건하게 하셔서

교회와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기에 부족함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마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이 민족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하시고

더 많은 사람이 주님의 도에 복종하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세계 열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더 높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 일을 위하여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이

귀하게 쓰임받게 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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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고난주간 성례식예배 대표기도  (세례와 성례식)

 

 

저희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아버지, 오늘 고난주간을 맞아 거룩한 주님제단에 나와 고난당하신 그 모습과 의미를 묵상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영광과 찬양을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자 고난당하시어 저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참 생명과 자비와 평화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들 주님의 고난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를 외면한 채 인간의 욕심으로 방황하며 살아 왔습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불쌍히 여기사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아버지, 이 시간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성례식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일평생 믿음의 길을 걸으며 형통의 복을 누리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성례식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성령으로 회복되며 게으르고 나태하였던 저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님과 동행하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부르짖는 기도마다 응답받는 역사가 일어나며 영혼 구원과 오류동지역에서 주님의 사명 감당하는 모델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새 성전을 세우며 더 큰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부흥하고 발전하는 축복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선우교회의 모든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합하여 선을 이루며 주님께 영광돌리는 교회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으로 주님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세례와 성례식을 집례하시는 서윤심 목사님께 성령이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마음 밭에 떨어져서 귀한 결실을 맺으며 은혜의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사정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님 있습니다. 어디에 있던지 주님께서 기억하여주시고 몸이 불편한 분, 주님의 피로 안수하여 치유하여주시고 다음에는 함께 은혜 받게 하옵소서. 저희들이 드리는 예배를 온전히 받아주시고 주님께서 주장하셔서 마치는 시간까지 인도해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삶을 변화시켜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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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주일예배설교. 2018년 나의 결산보고

 

 

 

오늘은 2018년 한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이기도 합니다.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마감하면서 송년주일을 경건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에벤에셀, 즉 하나님이 여기까지 지켜주심에 대하여 감사드리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통하여 다함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은 가게 하나를 운영할지라도 그날 하루의 결산을 합니다.
본전을 빼고 순수 수익을 꼼꼼히 챙겨봅니다. 그리고 월별 누계를 내보고, 년 말 결산을 내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의 새로운 계획을 새워봅니다. 기업체나 정부도 1년 예산과 결산을 해 봅니다.
열차도 출발역이 있으면 종착역이 있드시 인생도 총결산을 해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

인생은 대개 1월이 되면 “이상주의자”가 되었다가 6월쯤 되면 “현실주의자”가 되고, 12월에는 “허무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로운 비젼을 갖고 가장 아름다운 신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획을 세웠다가 6개월이 지나면 세웠던 계획들이 마음대로 이루워지지 않고, 그만 현실 속에 푹 빠져버린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년 말이 되면 자신이 한 해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 참으로 허무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자기의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렸고, 내 인생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고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가운데 우리는 나이를 한 살씩 더 들게 되고, 세월의 빠름을 절감합니다. 특히 목회자는 세월의 빠름을 더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고 인생은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들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결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올 해를 마감하면서 이 예배를 통해서 조용히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결산보고를 하나님 앞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달란트를 받은 자들이 각자가 주인에게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결산보고를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특히 여기서 비유로 말씀한 달란트 비유는 종말에 관한 내용이요,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시오,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 역사의 마지막 때, 역사의 종말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대해서 결산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를 통하여 한해를 마감하는 우리는 복음적으로 조명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달란트를 보고하자는데 있습니다.
첫째 달란트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사람이 먼 나라로 떠나면서,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라. 그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곧 여행을 떠났더라’(마 25:14~15)

인생은 누구나 달란트를 받고 태어납니다. 각자의 달란트가 다 있습니다.
특히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달란트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가장 값진 것들이요, 이는 내가 싫다고 해서, 거절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명인 달란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한해를 마감하는 주일, 오늘 우리는 달란트를 결산해 봅시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다면 당연히 다섯 달란트를 이를 남겨서 열 달란트를 주인에게 결산해야 할 것입니다.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두 달란트를 더 이를 남겨서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가진 자도 왔으나 이를 남기지 아니한 고로 악한 종이 되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이를 남긴 종들은 주인에게 대 환영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은 BC 4년에 헤롯 왕이 죽고, 그 이후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그 땅은 셋으로 분할이 되었습니다.
한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또 한 지역은 헤롯 빌립에게, 또 한 지역은 아켈라오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서 이 아켈라로에게 주어진 땅이 유대 땅입니다. 아켈라오는 유대 땅을 분할 받고 로마의 형제에게 자신의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떠납니다. 그때 신하들을 불러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각자에게 무엇, 무엇을 잘하라고 달란트를 맡기고 갑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우리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를, 역사적인 배경을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켈라오는 모든 종들에게 달란트 직무를 맡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주께서 달란트를 맡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 결산하는 날이 옵니다. 그때가 주님이 재림의 때입니다. “자기의 종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종들은 오늘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맡겼다는 것은 복음의 사역 곧 구원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도 달란트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달란트를 거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절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둘째 달란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주어집니다.
‘그가 각자의 능력에 따라’(15)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세 가지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①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능력을 개발하여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린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고, 어떤 가르치는 일을,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일을, 사람들은 다양하게 능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달리 칭찬을 잘해 주는 달란트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② 직분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부흥 성장되면 집사, 교사, 찬양대, 권사, 장로, 목사, 이렇게 직분들이 다 주어져 있게 됩니다. 여기서 달란트는 능력과 직업과 직분, 이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달란트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러한 달란트를 주었느냐고 불평하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내게 이러한 직분을 주셨느냐고 말할지 몰라도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요 달란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외면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에 1년 동안 열심히 했을 때 1년을 지나고 나면 축복받은 삶이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으면 결과를 기다리십니다. 한 달란트를 주셨어도 그것은 일하라고 주셨기 때문에 1 달란트를 이를 남겨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지 않고 이 세상 일만 하느라고 묻어 두었다면 결과는 성경대로 될 것입니다.
조각가는 나무를 잘 다듬어서 조각을 합니다. 어떤 나무로는 좋은 것을 만듭니다. 좋은 작품을 만듭니다.
그런데 똑같은 나무이지만 조각가에 의해서 어떤 나무는 가치 없는 것을 만들기도 합니다.
조각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주인님! 나는 저 나무와 같은 나무인데 왜 나는 환영받지 못할 작품은 왜 만들었느냐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만들어진 상태대로 요긴하게 쓰여 지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란트를 다섯을 주었든지, 두 달란트를 주셨든지, 한 달란트를 주셨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불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어진 달란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은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세 가지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구약교회는 제사 지내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일하는 교회입니다.
일하는 것이 신약교회의 특징입니다. 신약 교회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소망도 없이, 예배만 참석하고 헤어지는 신자라면 아직도 그는 구약교회 성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다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요 신자입니다. 우리는 달란트를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일군들을 세워서 주의 일하도록 기도하게 만드십니다.

매년 교회들은 주의 일을 위하여 각 기관에서 일할 일군들을 선출하게하시고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 순종하며 감사하며 감당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축복된 삶을 주 안에서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해 줌을 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내려주신 달란트로 사명을 바로 감당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가올 새해에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③ 일한대로 결산보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도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 했는가 대해서 각자가 받은 대로 결산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결산보고를 하였는데’(19절)라고 했습니다.
유대 땅에 왕으로 사명을 받고 떠났던 아켈라오가 로마로부터 다시 돌아왔을 때 종들을 부른 다음 결산보고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충성을 다한 신하는 많은 선물과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승진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실치 못한 신하는 즉각 처형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록입니다.
시작의 때가 있으면 끝을 맺는 때가 옵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맡길 때가 있으면 결산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이미 가장 가치 있는 달란트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면 각자의 달란트대로 계산하게 됩니다. 많이 심는 자들은 많이 거둘 것이고, 적게 심는 자들은 적게 거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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